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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했던 김구, 김규식은 5월 5일 저녁 서울에 귀환하여 성명을 발표했다.
방북했던 김구, 김규식은 5월 5일 저녁 서울에 귀환하여 성명을 발표했다.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050700209201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5-07&officeId=00020&pageNo=1&printNo=7584&publishType=00020 兩金氏(양김씨) 共同聲明發表(공동성명발표)] 1948.05.07 동아일보 1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050700209201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05-07&officeId=00020&pageNo=1&printNo=7584&publishType=00020 兩金氏(양김씨) 共同聲明發表(공동성명발표)] 1948.05.07 동아일보 1면  
*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210100060&page=21 孫世一의 비교 評傳 (102)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좋은 時計 속처럼 돌아가는 政府 만들 터”] 월간조선 2012년 10월호





2018년 10월 7일 (일) 20:21 판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당시 임시정부 주석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 한독당(한국독립당) 당수로, 신탁통치 반대 운동, 남북협상 등 정치활동을 했으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1949년 6월 26일 암살 당했다.

생애


해방전 활동

  • 김구(Kim Koo)가 서명한 임시정부의 대독선전포고문 : 1945.02.28
The Declaration of War on Germany by Korean provisional Govt : 1945.02.28 인도 국립공문서관 소장 한국독립 및 정부수립 관련 자료

일본 아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좀 이상해 보인다.


남북협상

김구는 1947년 12월 1일에 소련이 UN의 남북동시총선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야하고, 이를 두고 남한 단독의 정부수립이라고 부르면 안 되며, 북한 지역은 추후에 조건이 되면 선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南北을 通한 選擧아니라도, 政府는 統一政府, 金九氏·聲明發表 婦女日報 1947.12.02


그러나 12월 2일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 1894 ~ 1947.12.02)가 암살되고, 이후 그가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법정에 나가 증언도 해야하는 등의 일을 겪으며, 이승만과 사이가 나빠지게 되고, 남한 단독의 5.10 총선 반대로 선회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을 추진한다.

남북협상은 1948년 5.10 총선거 직전인 4월 하순 ~ 5월 초순 남한 인사 200~300명이 방북하여 평양에서 열렸다.


양김씨(김구, 김규식)가 평양으로 출발도 하기 전에 북한 방송은 그들이 이미 항복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김구는 4월 19일 청년학생들이 경교장 앞에서 그의 방북을 가로막자[1] 담을 넘어 북행을 결행하였고[2], 5월 5일에 돌아왔다.[3]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1면
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 기자들에게『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5월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레베데프 비망록의 내용으로 보아 김구가 김일성에게 북한에서 노후를 보낼 과수원을 달라고 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일 수도 있는 것 같다.[6]

서울 귀환 후

방북했던 김구, 김규식은 5월 5일 저녁 서울에 귀환하여 성명을 발표했다.




  • 김구(金九) - 유어만(劉馭萬, Liu Yuwan) 대화 비망록 전문(全文) : 1948년 7월 11일. 원문은 영문임.
유어만(劉馭萬, Liu Yuwan)은 서울주재 중국(장개석 정부) 총영사
Record of Conversation between Kim Gu and Liu Yuwan : July 11, 1948 Wilson Center : 영문 원문
조갑제(趙甲濟), 이화장에 있는 ‘金九-류위완 대화 비망록’ 全文 공개 : 金九, “공산군 곧 남침, 공화국 세울 것”이라면서 주한미군 철수 주장 월간조선 2009년 9월호
조갑제(趙甲濟), 金九가 유어만 중국 공사와 나눈 대화록: 金九는 북한이 남침할 것을 알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였나? 조선 pub 2014-10-27
류근일, 김구 선생이 단독정권(대한민국)수립 반대한 것은 사실 - 이인호 이사장은 역사적 사실을 말했을 뿐 조선 pub 2014-10-24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