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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권에서의 경력==
==북한 정권에서의 경력==
소련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영주는 [[김일성]] 집권 후 북한 정권에서 한동안 승승장구하다 조카 [[김정일]]과의 후계 경쟁에서 밀려 1976년 5월 이후 권력 전면에서 사라졌다. 김정일이 후계권력 승계에 방해가 되는 삼촌인 김영주와 그 가족을 자강도 산골로 내쫓았기 때문이다. 그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던 쌍둥이인 딸 김영성과 아들 김정현도 퇴학하여 부모들을 따라 자강도로 내려갔고<ref>[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co-su-12062016091812.html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김영주] RFA 2016-12-06</ref>, 이들 가족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소련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영주는 형 덕택에북한 정권에서 한동안 승승장구하다 조카 [[김정일]]과의 후계 경쟁에서 밀려 1976년 5월 이후 권력 전면에서 사라졌다. 김정일이 후계권력 승계에 방해가 되는 삼촌인 김영주와 그 가족을 자강도 산골로 내쫓았기 때문이다. 그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던 쌍둥이인 딸 김영성과 아들 김정현도 퇴학하여 부모들을 따라 자강도로 내려갔고<ref>[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co-su-12062016091812.html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김영주] RFA 2016-12-06</ref>, 이들 가족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1993년 김일성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김정일을 설득하여 18년간 유폐시켰던 김영주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김영주에게는 ‘명예 국가부주석’이라는 자리가 주어졌다. 김영주는 그해 7월 27일 이른바 조국해방전쟁 40주년 승리기념탑 준공식에 김일성 부자(父子)를 비롯한 고위 당정(黨政) 간부들과 함께 참석, 18년 만에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ref name="kimyj"/>
1993년 김일성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김정일을 설득하여 18년간 유폐시켰던 김영주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김영주에게는 ‘명예 국가부주석’이라는 자리가 주어졌다. 김영주는 그해 7월 27일 이른바 조국해방전쟁 40주년 승리기념탑 준공식에 김일성 부자(父子)를 비롯한 고위 당정(黨政) 간부들과 함께 참석, 18년 만에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ref name="kimyj"/>

2019년 6월 14일 (금) 11:12 판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95)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 2015년 7월 19일 고령의 몸을 이끌고 지방의회 대의원 선거 투표에 참가했다.[1]

김영주(金英柱, 1920년 9월 21일 ~ )는 북한의 정치인으로 김일성의 동생이다. 일제시대에 일본군의 통역을 하다 해방 후 형 김일성이 북한의 지배자가 되자 권력 핵심부에 들어갔으나, 후계 경쟁에서 조카 김정일에 밀려 실권하고 18년 동안 자강도 유폐되었다.[2] 김일성이 사망 직전인 1993년에 그를 평양으로 불러올려 다시 공식 석상에 나왔으나, 형식적인 직책을 맡는데 그치고 있다.

생애 초기

김영주는 1920년 만주에서 김형직강반석 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는 김형직 부부가 임강현(臨江縣)에 살 때이다.[3][4] 형으로 성주(聖柱,김일성), 철주(哲柱)가 있다. 부모를 따라 장백현(長白縣) 팔도구(八道溝), 무송현(撫松縣) 등지로 옮겨가며 살다가[5][6] 6세(1926년) 때 부친을, 12세(1932년) 때 모친을 여의고, 고아가 되어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채 만주 각지를 떠돌며 어렵게 살았다.

만주에서의 자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34년 둘째형 철주가 죽고, 맏형 성주가 있는 동북항일연군 부대를 찾아가서 그들과 같이 머물다가 1937년 초 공비토벌에 나선 이도선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이도선의 형 이도일은 김형직의 친구였는데, 그 아들 김영주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집에서 몇년간 같이 살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 도시에서 일하고 싶다며 신경(장춘)으로 가서 일본인 가게에 취직을 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그는 일본말을 아주 잘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어느 때인가부터 일본군 통역이 되어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김영주는 자신이 형과 같은 부대에 있을 때 보천보 전투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하나, 그는 보천보 사건 발생 이전인 1937년 초에 이도선에게 붙잡혔으므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도선은 1937년 4월 24일 사망하므로 그 이전에 붙잡혔음.] 일본군 통역으로 있은 것을 부끄럽게여겨 자신이 항일투쟁을 한 경력도 있는 것처럼 꾸며댄 것이 아닌가 한다.

해방 직후

그는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15 이후에도 통역으로 일본군 부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중국말도 잘 했으므로 국민당 군이 9월 15일 그가 속한 일본군 부대의 항복을 받을 때 통역을 맡았는데, 중국군 부대장이 그의 언어능력을 높이사서 중국군으로 받아들여 통역일을 맡겼다. 이후 중국군에서 복무하다 그 부대에서 사귄 친구 이용상과 함께 1946년 4월 30일 상해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온다. 이후 서울의 이용상의 집에서 1주일 가량 머물다 5월 6일 서울을 떠나 북한으로 갔다.

그는 중국에 있을 때 평양방송을 듣고 북한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김일성이 바로 자신의 형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평양에서는 한동안 김일성의 관저에 같이 살았다고 한다.

만주에서는 학교문턱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등을 잘 했다는 것으로 보아 언어 능력은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형 덕택에 특혜를 받아 모스크바 종합대학으로 유학을 하게 된다.

북한 정권에서의 경력

소련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영주는 형 덕택에북한 정권에서 한동안 승승장구하다 조카 김정일과의 후계 경쟁에서 밀려 1976년 5월 이후 권력 전면에서 사라졌다. 김정일이 후계권력 승계에 방해가 되는 삼촌인 김영주와 그 가족을 자강도 산골로 내쫓았기 때문이다. 그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던 쌍둥이인 딸 김영성과 아들 김정현도 퇴학하여 부모들을 따라 자강도로 내려갔고[7], 이들 가족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1993년 김일성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김정일을 설득하여 18년간 유폐시켰던 김영주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김영주에게는 ‘명예 국가부주석’이라는 자리가 주어졌다. 김영주는 그해 7월 27일 이른바 조국해방전쟁 40주년 승리기념탑 준공식에 김일성 부자(父子)를 비롯한 고위 당정(黨政) 간부들과 함께 참석, 18년 만에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2]

북한 정권에서 그의 이력은 아래와 같다.[8][9]

모스크바종합대학 (정경학부) 졸업[2][9]
1954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
1957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부장
1957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과장
1960.09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장
1961.09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4차 당대회)
1962.10 최고인민회의 제 3기 대의원
1966.10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66.10 비서국 비서
1967.11 최고인민회의 제 4기 대의원
1967.11 상임위원회 위원
1969.12 비서국 비서
1969.12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1970.11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70.11 비서국 비서
1970.11 정치국 위원
1972.07 남북 조절위원회 공동위원회 위원장
1972.12 최고인민회의 제 5기 대의원
1972.12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1973.09 조직지도부 부장(해임) *후임 : 김정일
1974.02 정무원 부총리
1993.12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93.12 최고인민회의 제 9기 대의원(보선)
1993.12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
1993.12 국가 부주석
1993.12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1994.07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1995.02 오진우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1998.09 최고인민회의 제 10기 대의원
1998.09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2003.09 최고인민회의 제 11기 대의원
2003.09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2008.10 박성철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2009.0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2009.04 최고인민회의 제 12기 대의원
2010.09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해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해임)
2012.02 김정일훈장 수훈
2014.03 최고인민회의 제13기 대의원
2014.0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참고 자료

각주

  1. 북한 김일성 동생 김영주 95살 고령에도 지방의회 투표 연합뉴스 2015년 7월 19일
  2. 2.0 2.1 2.2 [김정은 특집] 김정은과 그 형제들 월간조선 2010년 10월호
  3. 白山武士團員 逮捕의 件 : 1921년 05월 12일 조선소요사건관계 서류 >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3 : 康晋錫(變名 金在龍, 韓成龍,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大正 9년 (1920) 음력 2월.....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의 매부 金亨穆(金亨稷의 오류)의 집에 잠시 체류하다 같은 해 음력 4월 2일 임강현 천금동에서 목재 벌채 종사...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6권 > 1921년 4월 24일 >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康晋錫 (국사편찬위원회, 1971년)
  4.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8) - 서울신문 1992-10-27 4면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9) 1992. 12. 08 (화) | 서울신문
  5. 朝鮮人에 대한 施政關係雜件 一般의 部 3 > 陸軍側 調査에 관계된 鴨綠江 沿岸地方 支那地에서의 在住 朝鮮人의 戶口 其他에 관한 件 1925-05-05 간도 총영사(間島總領事) 작성 : p.24
  6. 장백현 8도구(長白縣 八道溝) 구글맵
  7.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김영주 RFA 2016-12-06
  8. 김영주 통일부 북한정보 포털
  9. 9.0 9.1 김영주(金英柱) NK 조선 2013-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