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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왕복 모두 김일성 혼자 걸은 것으로 주장하며, 칠골로 걸어 왔다는 경로를 '''배움의 천리길''', 1925년 1월 칠골 외가를 떠나 같은 길을 거꾸로 걸어 만주로 돌아간 길을 '''광복의 천리길'''이라 명명하고, 매년 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걷도록 하는 행군을 시키고 있다.<ref>[http://www.dailynk.com/%E5%8C%97-%EA%B4%91%EB%B3%B5%EC%9D%98-%EC%B2%9C%EB%A6%AC%EA%B8%B8-%EB%8B%B5%EC%82%AC-%EC%8B%9C%EC%9E%91/ 北, '광복의 천리길' 답사 시작] dailynk 2005-01-23</ref>  당시 김일성이 만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느면서 맹세했다고 하는 말이 각종 김일성 전기에 판박이처럼 나온다.<ref>김일성저작집1 p.361</ref>
북한에서는 왕복 모두 김일성 혼자 걸은 것으로 주장하며, 칠골로 걸어 왔다는 경로를 '''배움의 천리길''', 1925년 1월 칠골 외가를 떠나 같은 길을 거꾸로 걸어 만주로 돌아간 길을 '''광복의 천리길'''이라 명명하고, 매년 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걷도록 하는 행군을 시키고 있다.<ref>[http://www.dailynk.com/%E5%8C%97-%EA%B4%91%EB%B3%B5%EC%9D%98-%EC%B2%9C%EB%A6%AC%EA%B8%B8-%EB%8B%B5%EC%82%AC-%EC%8B%9C%EC%9E%91/ 北, '광복의 천리길' 답사 시작] dailynk 2005-01-23</ref>  당시 김일성이 만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느면서 맹세했다고 하는 말이 각종 김일성 전기에 판박이처럼 나온다.<ref>김일성저작집1 p.361</ref>
{{인용문|『나는 14살 때에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 때 나는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어린 가슴에도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말은 해방 직후 김일성 수행기자를 하다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한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E%AC%EB%8D%95_(1911%EB%85%84)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이 지어낸 것으로, 1945년 10월 19일자 평양민보(平壤民報)에 처음 실렸다.<ref>한재덕(韓載德),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53791462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81</ref><ref>한재덕(韓載德),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56891437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p.67~68 ; p.110.</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52400209102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2-05-24&officeId=00020&pageNo=2&printNo=12466&publishType=00010 한재덕(韓載德),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1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동아일보 1962.05.24, 2면<br>한재덕(韓載德), 『김일성을 고발한다』 (내외문화사, 1965) p.96</ref>
{{인용문|『나는 14살 때에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 때 나는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어린 가슴에도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말은 해방 직후 김일성 수행기자를 하다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한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E%AC%EB%8D%95_(1911%EB%85%84)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이 지어낸 것으로, 1945년 10월 19일자 평양민보(平壤民報)에 처음 실렸다.<ref>한재덕(韓載德),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53791462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81</ref><ref>한재덕(韓載德),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56891437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p.67~68 ; p.110.</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52400209102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2-05-24&officeId=00020&pageNo=2&printNo=12466&publishType=00010 한재덕(韓載德),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1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동아일보 1962.05.24, 2면<br>한재덕(韓載德), 『김일성을 고발한다』 (내외문화사, 1965) p.96</ref>


===김형직의 사망===
===김형직의 사망===

2018년 8월 31일 (금) 16:43 판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영어: Kim Il-sung)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하 북한) 출범 당시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다.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 기반이 전혀없었던 그는 운좋게 스탈린의 간택을 받아 소련군 무력의 도움으로 북한의 최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초기에는 연안파, 남로당파 등 여러 세력과 연합할 수 밖에 없었다. 6.25 남침 전쟁 실패후 책임을 박헌영 등에게 덮어씌워 남로당파를 숙청하고,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일으켜 연안파, 소련파등을 숙청하여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1967년 마지막 남은 갑산파를 숙청한 후부터 장남 김정일에로 권력 승계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김정일의 권력이 김일성을 능가하게되어 김일성은 명목상의 최고 지도자로 전락하였다. 그는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케한 전범이고, 정치적 반대 계층을 탄압하고 수십만을 수용소에 가두어 반인도적 범죄를 자행한 최악의 반인권 사범이며, 국가를 김일성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고, 인민들의 대부분 자유를 박탈하여 노예화한 총책임자이다.

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대위"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가슴에 소련군 적기훈장을 달고 있다. 김일성의 왼편은 소련군 강미하일 소좌 (소련의 고려인)이고, 뒷줄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 쪽이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출생과 가계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1]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용산면(龍山面) 하리(下里) 칠골의 외가에서 김형직(金亨稷, 1894~1926)강반석(康盤石, 1892~1932) 부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생가로 알려진 만경대(萬景臺) 고향집은 조부모 김보현(金輔鉉, 1871~1955)과 이보익(李寶益, 1876~1959)이 살던 집이며,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에 속했다. 오늘날 칠골과 만경대는 평양직할시(平壤直轄市)에 편입되어 있다.

흔히 그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라고 하나, 그의 어린 시절 학교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성주(金聖柱)가 맞을 가능성이 크고[2], 김성주(金誠柱)로 기록한 문헌도 있다.[3][4] 김일성은 3가지 모두 자신의 이름이 맞다고 했다 한다.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金膺禹, 1845~1878)는 남의 집 소작농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 1860년부터 평양에 살고 있던 지주 리평택(李平澤)의 조상 묘를 봐주는 산당지기로 만경대에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5] 북한은 김응우가 제네랄 셔먼호 격침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나, 이런 말은 1967년 갑산파 숙청후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김일성 가계를 우상화할 필요성 때문에 지어낸 것이다.

조부 김보현은 평범한 농부였고, 부친 김형직은 숭실학교를 중퇴하고 만경대와 평안남도 강동군 봉화리에서 서당 교사를 하다, 장일환(張日煥, 1886 ~ 1918) 등이 주도한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무렵 중강진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압록강 대안(對岸)인 만주 임강현(臨江縣)으로 피신한다. 만주에서는 가짜 세브란스 의전 졸업장을 내걸고 무면허 한의원을 개업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수학기

김일성은 임강현에 살 때 처음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어 1921년 여름 부모가 장백현(長白縣) 팔도구(八道溝)로 이주하자 장백현 소학교에 다니게 된다. 장백현 소학교의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으나 중국 당국이 공개를 금하고 있다.[6]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

김일성은 1923년 1월 만주 8도구에서 걸어서 외가인 칠골로 와 외조부 강돈욱(康敦煜, 1871~1943)이 운영에 간여하던 창덕학교(彰德學校)를 2년간 다니다가 부친이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25년 1월 왔던 길을 다시 걸어서 만주로 갔다고 한다. 이때 그가 창덕학교를 다녔다는 것은 월남한 당시 급우들의 증언으로 사실 확인이 된다. 그러나 당시 어린 아이였던 그가 수백 km 의 먼길을 한겨울에 혼자 걸어서 왕복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눈덮히고 얼어붙은 산골 길을 어린 아이 혼자 걷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고 도중에 숙식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을 때이다. 올 때는 부친이 동행했고, 돌아갈 때도 누군가가 동행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왕복 모두 김일성 혼자 걸은 것으로 주장하며, 칠골로 걸어 왔다는 경로를 배움의 천리길, 1925년 1월 칠골 외가를 떠나 같은 길을 거꾸로 걸어 만주로 돌아간 길을 광복의 천리길이라 명명하고, 매년 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걷도록 하는 행군을 시키고 있다.[7] 당시 김일성이 만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느면서 맹세했다고 하는 말이 각종 김일성 전기에 판박이처럼 나온다.[8]

『나는 14살 때에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 때 나는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어린 가슴에도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말은 해방 직후 김일성 수행기자를 하다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이 지어낸 것으로, 1945년 10월 19일자 평양민보(平壤民報)에 처음 실렸다.[9][10][11]

김형직의 사망

만주로 돌아온 김일성은 부모를 따라 무송현(撫松縣)으로 이주하여 소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봄에 정의부(正義府)에서 운영하고, 최동오(崔東旿, 1892∼1963)가 숙장(塾長)으로 있던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의 화성의숙(華成義塾)에 들어갔으나 그해 6월에 부친이 사망하면서 그만두게 된다.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경향의 사람으로 만주에서도 찾아온 환자들이 공산주의자인 경우 치료를 거부하고 돌려보내 이들의 분노를 사서 테러를 당해 죽었다고 한다. 김형직은 한의원을 하면서 아편 밀거래에도 간여했다는 증언이 많은데, 이 때문인지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직후부터 남은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지는데, 당시 무송지방에 횡행하던 마적떼에게 재산을 약탈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중학교 과정

부친이 사망한 후 김일성은 한 동안 방황하다 마골단이라는 부유한 사람들을 골라 죽이고 재물을 강탈하는 극좌 폭력집단에 들어가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이때 정의부(正義府)에서는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파견하여 이들을 제압하는데, 이종락은 김일성을 불쌍히 여겨 데려와 평단중학교에 입학시켜주었다고 한다.(평단중학 재학은 북한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도 얼마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나 몇몇 사람의 후원을 얻어 길림의 육문중학교(毓文中學校)에 들어가게 된다. 김학규의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이 생전에 정의부 사람들과 상당한 친분이 있었으므로 정의부에서 김일성에게 장학금을 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 조직 사건으로[2] 경찰의 단속을 받아 육문중학교를 중퇴하게 된다. 이것이 북한에서 인정하는 김일성의 최종학력이다.

반국민부 활동기 (1929~1932)

국민부(國民府)와 산하 군사조직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남만한인청년총동맹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와 세화군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9대장이었던 이종락(李鐘洛, 1907~1940)국민부(國民府) 내의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 8월 국민부를 탈퇴하고 나와 김광렬의 동아혁명군과 연합하여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라는 군사조직을 만든다.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에서 이탈해 나온 조직인데다, 국민부 타도를 목적으로 하면서도 같은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은 혼란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가 내세운 강령을 보면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 타도, 국민부 타도,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공산혁명 완수 등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하고 있고, 조선독립이나 항일투쟁이라는 말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1931년 1월말 이종락 등 지도부가 구속된 후 잔존세력이 세화군(世火軍), 동방혁명군(東方革命軍)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가며 조금 더 존속하나 1931년 말에 완전히 소멸한다.

조선혁명군 고동뢰 소대 참살

믿고 따랐던 상관 이종락이 체포 구금되고, 속했던 군사조직도 흐지부지 와해되자 의지할 데를 잃은 김일성은 무송(撫松)으로 돌아가 장아청(張亞靑, 1913~1937) 등 또래들을 모아 불량배 짓을 하고 다녔다. 이런 일로 중국인들 사이에 조선인들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측에 제압을 요청하자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1896~1934)은 이 패거리들을 제압하러 1932년 2월 중순 고동뢰(高東雷) 소대장이하 10명을 무송(撫松)으로 파견한다. 무송에 당도한 일행이 장거리 행군에 지쳐 피곤해서 잠든 사이에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은 이들 10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도망친다.[12] 이것이 김일성의 최초의 무장투쟁이다.

김일성은 또한 조선혁명군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중대의 무기를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13]

중공당 산하 유격대 활동기 (1932~1940)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6년 7월 ~ 1938년 6월)
총사령부(總司令部)군장(軍長)사장(師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부사령 왕덕태(王德泰, 1907~1936)
1군 군장 양정우1사장 정빈(程斌, 1911~1951)
1938년 6월말 투항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1937)
1937년 가을 전사
3사장 왕인재(王仁齋, 1906~1937)
1937년 가을 전사
2군 군장 왕덕태
1936년 10월 말 전사
4사장 안봉학(安鳳學, 1909~1937)
1936.09.30 투항
5사장 사충항(史忠恒, 1906~1936)
1936년 10월 전사
6사장 김일성(金日成, 1901~1937)
1937.11.13 전사
동북항일연군 1로군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8년 7월 ~ 1941년 3월)
총사령부(總司令部)방면군장(方面軍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1940.02.23 전사

부사령 위증민(魏拯民, 1909~1941)
1941.03.08 전사

제1방면군장 조아범(曹亞範, 1911~1940)
1940.04.08 내분으로 피살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1912~1994.07.08)

1940.10.23 소련으로 월경 도주[14][15]

제3방면군장 진한장(陳翰章, 1913~1940)
1940.12.08 전사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 박득범(朴得範, 1908~?)
1940.09.30 투항[16]


김일성 귀순 공작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의 성격

김일성 자필의 "항련 1로군 약사"

소련 도피 시기 (1940~1945)

남야영(南野營)

만주서 항일 빨치산(게릴라) 활동을 하던 김일성은 일본군에 쫓겨 상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대행 위증민(魏拯民, 1909~1941.03.08)의 허락도 없이, 전투 중인 상관과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1940년 10월 23일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였다. 월경 직후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포시예트(Posyet) 항으로 끌려갔다가 얼마간 감옥에 갇혔는데, 2로군 총사령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소련으로 도피한 동북항일연군 대원들은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 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 Вя́тское, Vyatskoye)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 캠프)과 보로실로프(지금의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 쪽으로 약간 떨어진 하마탄(Хаматан, Hamatan, 虾蟆塘), 즉 지금의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 Razdolnoye) 마을의 남야영(南野營, B 캠프)에 분산 수용되는데, 김일성은 남야영에 수용된다. 여기서 1941년 2월 16일 장남 김정일이 태어났다.

제88독립저격여단

1942년 7월 만주 빨치산들을 수용한 극동전선군 산하 제88독립저격여단(第88獨立狙撃旅團,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88th Separate Rifle Brigade), 통칭 88여단이 북야영이 있는 뱌츠코예 마을에 창설되면서 김일성 일가는 이때 하마탄(라즈돌노예)에서 뱌츠코예로 이주한다. 88여단의 여단장은 주보중(周保中)이었으며, 김일성은 부하 100 여명을 통솔하는 제1대대 영장(대대장)이 되었고, 대위(Капитан, Captain)의 계급을 받았다. 소련군에서 그의 이름은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이었는데, 이는 한자 이름 金日成을 중국식 발음으로 적은 것이다.(표준 중국어 보통화 발음은 아닌 듯함.)

빨치산 동료들을 감시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로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다.

당시 그는 88여단을 관장하던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의 비밀 정보원(KGB 전신인 NKVD 요원)이 되어[17][18][19]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과 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Maxim Alekseevich Purkayev, 1894~1953) 대장에게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을 하였다.[20][21]

이 일로 상관들의 신임을 얻어 그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은 것이 그가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된 배경이다. 스탈린은 1945년 9월초 그를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시험을 본 후 북한지도자로 낙점하였다.[22][23] 당시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는 하바로프스크 군용 비행장에 수송기를 대기시키고, KGB 극동본부 요원 2명에게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안내하도록 했다고 한다.[22]

해방 직후

스탈린이 1945년 9월 초에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결정했다는 것은 이미 이때 북한을 분할 점령하여 통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9월 20일에 극동군 사령부와 평양의 소련 25군 사령부에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국가를 건설하라"는 비밀 지령문을 내려보낸 것은 당시 북한 분할 통치를 확실히 결정하고 있었다는 명시적 증거이다.

원산항으로 비밀리에 입북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

북조선 임시인민위원장

김일성 연보

김일성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나 북한 간행 전기들이 조작이 많아 정확한 진실을 알기 어렵고, 아직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아래의 김일성 연보도 작성자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보이고, 잘못된 것들도 있다.

각주

  1. 이 날은 타이타닉(Titanic)호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날이며, 북한은 이를 또한 김일성 우상화 선전에 이용하고 있다. 김일성 출생은 타이타닉 침몰보다 더한 재난이다.
  2. 2.0 2.1 「조선공산청년회 조직의 건(朝鮮共産靑年會 組織ノ件)」 1929년 5월 14일자 길림 총영사의 보고문
  3. 최형우(崔衡宇),《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 (漢城 : 東方文化社, 1945년 12월 10일) p.28
  4. 金日成은 나의 弟子다? 三八線 넘는 崔東旿氏談 민중일보(民衆日報) 1948/04/22
  5. 김응우와 샤만호격침기념비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7-06-20
  6. 長白縣 檔案館 所藏 韓國史 關聯 檔案資料 槪況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7. 北, '광복의 천리길' 답사 시작 dailynk 2005-01-23
  8. 김일성저작집1 p.361
  9.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81
  10.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p.67~68 ; p.110.
  11. 한재덕(韓載德),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1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동아일보 1962.05.24, 2면
    한재덕(韓載德), 『김일성을 고발한다』 (내외문화사, 1965) p.96
  12. 國史館論叢 第4輯 >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4. 抗日遊擊隊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143~145
  13. 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二) 匪名『金日成』을 襲名 滿鮮日報 1940/04/18, 6면
  14.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15.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16. 항일군 3인 왜 일왕에 충성맹세 했나 오마이뉴스 2007.09.13
  17. 美(미)정보전문 간행물 발표 "金日成(김일성) 항일투쟁은 조작" 1994.06.09 동아일보 5면
    KGB 비밀문서, 金日成 抗日투쟁 경력 일축 연합뉴스 1994-06-08
  18. Christopher M. Andrew, ‎Oleg Gordievsky, More Instructions from the Centre: Top Secret Files on KGB Global Operations 1975-1985, (Psychology Press, 1992) pp. 78~79
  19. 김충석, 소련 극동군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북한 정치에서 제88여단파의 기원과 형성 역사연구 제30호, 2016.6, pp.50~55.
    김일성은 소련 비밀경찰(NKVD)의 요원이었다! NewDaily 2015.12.02
  20.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 정치위원 呂政(여정) 手記(수기) <1> 1990.04.22 동아일보 : 솔로킨 소장이 소르킨 정찰국장이고, 부르가예프 대장은 극동전선군(원동방면군) 사령관 Maksim Purkayev 대장이다.
    여정(呂政, 본명 강수봉), 『붉게 물든 대동강 : 前 인민군 사단 정치 위원의 수기』,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1991.07.01
  21. 김충석, 소련 극동군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 북한 정치에서 제88여단파의 기원과 형성 역사연구 제30호, 2016.6
    김충석,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연구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6. 2)
  22. 22.0 22.1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하권 pp.202~204 ;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아카데미, 2008) pp.72-73
  23. 평양 소련군정 요원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Konovich Mekler, 1909~2006)도 김일성이 귀국전 스탈린의 면접심사를 받은 것을 증언했다 : 김일성정권 내가 만들었다; 소련군 정치장교 G .메크레르의 증언 <對談> / 메크레르,G·惠谷治 極東問題. 159('92.5) pp.48-58. 極東問題硏究所
    Kim Il Sung's Soviet Image-Maker Moscow Times 07/22/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