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회고록의 김혁 사진.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있는 김혁(金赫)의 묘지 앞에 세워진 반신상. 하단에 새겨진 그의 사망일자는 틀린 것이다. 1930년 7월 조선혁명군 입대라는 것도 실제로는 국민부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타도를 목표로 했던 이종락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김혁(金赫, 1907.10.11 ~ 1930.08.25)[1]은 1930년 무렵 만주에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 사령 이종락(李鍾洛, 1907 ~ 1940)의 부하로 활동하던 북한 김일성의 동료였다.

본명은 김근혁(金根赫)이고, 당시 기록에도 본명 김근혁(金根赫)으로 나오나, 북한에서는 혁명시인 김혁(金赫)으로 널리 선전되고 있는데, 김혁이란 이름을 실제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북한은 그가 김일성에게 지어준 "한별"이란 이름을 한자로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이를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적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로 보기 어렵다.

개요

1933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석간 2면의 최여정(崔汝貞) 체포 기사[2]에 김근혁(金僅赫)이 1930년 10월 30일 밤 11시 하얼빈(哈爾濱)의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실제 사건은 같은 해 11월 2일 새벽 5시경에 일어났다.

기록에 나오는 김근혁(金根赫)의 행적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까지 정의부(正義府) 또는 그 후신 국민부(國民府)의 부원으로 활동하다 1930년 여름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나와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다. 당시 김성주 즉 북한 김일성도 이종락의 부하였으므로 그와 서로 잘 알던 사이는 맞을 것이다. 이종락은 원래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제5중대장이었으나, 그가 국민부를 탈퇴한 후 만든 군사조직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원래의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주적으로 삼아 타도를 주요 목표로 했다.

김근혁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30년 11월 2일 새벽 5시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의 부가전(傅家甸)[3] 북삼도가(北三道街)의 가토 우메요시(加藤梅吉)가 경영하던 복덕루(福德樓)를 습격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이 1933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 보도기사에 나온다.[2] 기사에는 김근혁의 이름 한자가 김근혁(金僅赫)으로 나오나 僅은 根의 착오일 것이다. 기사에 나오는 김광렬(金光烈), 계영춘(桂永春) 등은 당시 김근혁과 김성주(김일성)의 상관 또는 동료들이고, 특히 유봉화(劉奉華)는 1931년 3월 북한 김일성과 함께 체포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다.[4][5][6] 체포된 후 김근혁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알려진 행적도 없으므로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다지 주목을 받을만한 행적도 없고, 이름이 널리 알려질만한 인물도 못되지만 북한에서는 그가 김일성에게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한별을 칭송하는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도 작사, 작곡해 동지들 사이에 보급했다며 찬양하고 있다. 한별을 한자로 처음에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차광수의 제의로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적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이 일을 소재로 1980년대에 "조선의 별"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 김일성 우상화 교육에 이용했다. 실제로는 없던 일을 꾸며내어 별 대단한 행적도 없는 김일성의 과거 선배들을 김일성 미화 찬양에 악용하고 있다.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김혁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반신상도 세웠으나 시신없는 가묘로 보인다. 반신상 아래에 새겨진 사망일자 1930년 8월 25일은 그가 1930년 11월 2일 하얼빈에서 체포되었으므로 명백히 틀린 것이다. 또 그가 1930년 7월 조선혁명군에 입대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국민부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타도를 목표로 했던 유사한 이름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에 가담한 것이다.

김혁의 아들 김환(金煥, 1929~2009)은 북한 부총리를 지냈다.[7][8][9][10][11]

당시 기록에 나오는 실제의 김혁

김혁(김근혁)에 대한 당시 기록은 많지 않으나 아래와 같은 몇 건이 발견된다.

하얼빈 복덕루(福德樓) 습격 사건

김근혁(金根赫)등 조선혁명군 사령부(朝鮮革命軍 司令部)이종락(李鐘洛, 1907~1940) 부하 3명은 권총을 휴대하고 하얼빈(哈尔滨, 哈爾濱)의 부가전(傅家甸)[3] 북삼도가(北三道街)에 있던 일본인 가토 우메요시(加藤梅吉)가 경영하던 복덕루(福德樓)에서 1박하고, 다음날인 1930년 11월 2일 새벽 5시경 금품을 털어 도주하려다 놀라 깨어난 종업원들에게 들키자 조선인 여종업원 기금성(奇金星, 21세)과 장차절(張且節, 18세) 등 2명을 사살하고 김언년(金言年, 22세)과 중국인 뽀이 손왕해(孫王海, 40세) 등 2명을 부상시켰다. 출입문이 잠겨있자 김근혁은 유리창을 발로차서 깨고 도주하려다 자신도 발에 부상을 당하고 출동한 경찰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국내신문에도 사건이 보도되었으나, 체포된 범인의 이름이 김근혁(金根赫)으로 밝혀지는 것은 1933년 8월 공범 최여정(崔汝貞)이 체포되었을 때의 기사에서이다. 그는 체포된 후 대련(大連)으로 압송되어 간 것으로 보이며, 재판도 그곳에서 이루어진 탓인지 국내 신문에 재판과 처벌에 대한 후속보도는 없다.

북한은 김혁이 하얼빈에서 혁명활동을 하다 그의 근거지로 들이닥친 경찰의 체포를 피해 투신자살하려고 3층 건물에서 뛰어내렸으나 죽지 못하고 부상만 당한채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옥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기사에 의하면 김혁은 하얼빈의 복덕루에서 1박하고 다음날 새벽 여종업원 2명을 사살하고 잠긴 문을 열지 못해 유리창을 발로 차서 깨고 달아나려다 발을 크게 다치고 체포된 것이다. 체포된 사람의 이름이 표리삼(表利三)이라 했으나 김근혁의 가명으로 보인다.
복덕루를 습격하고 달아났던 사람들이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압송된다는 기사. 사건 당일 현장에서 체포되었던 김근혁도 대련(大連)으로 압송된 것으로 보인다.

1933년 8월 복덕루 사건의 공범이었던 최여정(崔汝貞)이 체포되었다는 기사에 사건 당일인 1930년 11월 2일 체포된 범인의 이름이 김근혁(金僅赫)으로 나오는데 주변 인물들의 이름으로 보아 김근혁(金根赫)이 틀림없다. 이 기사에는 사건이 일어난 일시도 1930년 10월 30일 밤 11시라 했으나, 사건 당시 보도에 나오는 11월 2일 새벽 5시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朝鮮(조선)○○軍(군) 崔汝貞被逮(최여정피체) 1933.09.10 동아일보 2면

김근혁의 상관이었던 이종락과 김광렬 등이 1931년 1월 28일 체포되었을 당시 기사에도 하얼빈의 복덕루 사건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김근혁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다.

軍資募集(군자모집) 數回(수회) 巡査(순사)까지 射殺(사살) 1931.02.04 조선일보 7면

기타 이종락 부하들의 군자금 강취 사건

위에 나오는 이종락이 1931년 1월 체포되어 한 조사 기사에는 하얼빈 복덕루 사건 외에도 아래와 같은 군자금 강제 징수 사건이 나온다.

백신한(白信漢)

被殺(피살)된 國民府員(국민부원)은 寧邊(영변) 出生(출생) 白信漢(백신한) 1929.12.10 동아일보 2면
銃殺(총살)된〇〇團(단)은 軍校出身(군교출신)의 白信漢(백신한) 1929.12.12 조선일보 2면

현대홍(玄大洪)

朝鮮(조선)〇〇 玄大洪(현대홍)을送局(송국) 1930.08.01 조선일보 7면
朝鮮(조선)○○軍(군) 玄大洪公判(현대홍공판) 1932.03.25 동아일보 2면
十七回나 强盜질 장춘서 잡혀 매일신보 1930-08-02 석간 07면 05단
○○隊員 長春서 逮捕押送 자금을 강탈하는 것을 매일신보 1930-08-03 석간 02면 07단
時局標榜코 軍資金强請 ○○○○○단원인 玄大洪에 十二年役 매일신보 1932-03-25 7면 8단

북한은 김일성 미화를 위해 김혁을 이용

1930년에 김혁은 23세였으나 북한 김일성은 18세에 불과했는데도 북한은 마치 김혁이 김일성을 엄청나게 흠모하고 떠받들던 충직한 부하였던 것처럼 조작하고 있다.

김혁이 김일성에게 "한별"이란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은 사실인가?

북한은 김혁(金赫)이 김성주(김일성)를 흠모하여 1928년 10월에 "한별"이라는 이름과 함께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를 지었으며, 이후 동지들이 김성주를 "한별" 또는 이를 한자로 적은 "一星"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12] 1980년대에는 "조선의 별"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 이런 일을 사실인 것처럼 선전했다.[13][11]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김혁이 나이도 한참 아래인 김일성을 흠모했을 리도 없다.[14][15] 또 1970년대 이전까지는 "한별"이라는 이름이나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도[16] 언급된 적이 없으므로 이런 주장은 후일에 지어낸 것이다.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와 영화는 실제로는 김정일이 지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11]

하얼빈은 김일성의 동지인 김혁이 빨치산 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사망한 곳으로, 생전에 김일성도 들렀던 곳이다. 김정일은 이곳에 살고 있는 김혁의 자손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연변의 조선족 사회에서 "한별"은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 김인묵(金仁默)이라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17][18] 한별(김인묵)은 동만의 연변에서 공산주의 항일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932년 서울의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다.[19] 그는 연변 여성운동의 선구자 김영신 (金英信, 1905~1932)의 남편이라고 한다.[20] 바이두백과(百度百科)의 김영신(金英信) 항에는 그녀의 남편을" 韩星(金仁默)"이라 했는데 "한별"을 한자로 "韓星"이라 쓴 것이다.[21] 참고로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배우 박한별의 이름을 朴韩星이라 적고 있다.[22]

북한 김일성이 한별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말은 1970년 이전에는 나온 적이 없으므로 사실로 볼 수 없으며, 남의 이름을 도용하여 자신이 일성(一星)이라는 이름을 쓰게된 유래를 그럴듯하게 조작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혁의 최후 미화

위에서 본대로 군자금 강제모금애 나섰던 김혁은 1930년 11월 2일 하얼빈의 복덕루에서 여종업원 2명을 살해하고 출입문이 잠긴 현장을 탈출하기 위해 유리창을 발로 차서 깨다 발을 다쳐 체포된 후 대련(大連)의 감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의 체포와 죽음을 전혀 다르게 미화하고 있다.

김 주석은 김혁을 1930년 8월초 조선혁명군 소조를 내기 위해 하얼빈으로 파견했다. 김 주석은 회고록에서 “길림, 장춘, 류하, 흥경, 회덕, 이통 일대에서 주로 활동해온 그(김혁)에게 있어서 할빈(하얼빈)은 생소한 고장이었”는데 “나도 이 도시에 대해서는 별로 파악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김 주석은 “우리는 길림에 있을 때부터 할빈을 중시하였다”고 해 하얼빈을 중요 지역으로 삼았음을 시사했다.

김 주석은 하얼빈을 중시한 이유를 “거기에 국제당연락소가 있는 사정과도 관련된다”고 밝혔다. 즉, 김 주석이 “길림육문중학교에 조직한 공청과 연계를 가지고 있던 국제당 산하의 공청조직도 할빈에 있었”기에 “국제당과의 연계를 가지자면 어차피 이 도시에 우리의 통로를 내고 할빈을 우리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 주석이 김혁을 하얼빈에 보낸 중요한 목적은 “할빈 일대에서 우리의 혁명조직을 늘이는 한편 국제당과의 연계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김혁을 책임자로 한 조선혁명군 소조가 도착하였을 때 할빈의 공기는 매우 살벌하였다.” 합법적 조직들까지도 지하에 들어가야 할 형편이었고, 비합법적 조직들은 자기를 위장해야 헸다. 이런 어려움 속에 김혁은 “능숙한 조직적 수완과 담력을 가지고 청년들을 교양하고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기층 당조직을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과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사업도 힘 있게 밀고나갔”으며 “적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가며 국제당연락소와의 연계도 지어놓았다.”

김 주석은 “할빈의 일을 추켜세우는 데서는 김혁의 공로가 컸다”면서 김혁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혁명의 한개 지역을 담당한 책임자답게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다가 할빈도리의 비밀연락소에서 불의에 달려드는 적들과 총격전을 벌리던 끝에 최후를 결심하고 3층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강철 같은 육체가 그의 뜻을 배신하였다. 김혁은 자결에 성공하지 못한 채 적들에게 붙잡혀 려순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박해에 시달리다가 옥사하였다고 한다.

김 주석은 김혁의 죽음을 접하고서 “김혁은 우리 혁명대오에서 백신한과 함께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삶과 젊음을 바친 첫 세대의 대표자의 한사람”이라면서 “한 명의 혁명동지가 천금보다 더 귀중했던 그때 김혁과 같이 훌륭한 재사를 잃은 것은 우리 혁명에 있어서 참으로 가슴아픈 손실이었다. 그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회고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석과 함께 항일빨치산 활동을 하다 일찍 사망한 김혁, 차광수를 거론하며 이들은 김 주석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수령님(김 주석)을 조선혁명의 영도자로 내세우고 끝까지 혁명적 의리를 지켰다”고 강조해 왔다.

참고 자료

북에서 ‘김혁 혁명투사 생일 100돌 기념 중앙보고회’ 열려 <조선신보>


각주

  1. 그의 생몰년월일은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있는 김혁(金赫)의 묘지 앞에 세워진 반신상 하단에 새겨진 것이나, 정확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그의 사망일자는 명백히 틀렸다.
  2. 2.0 2.1 前正義府員(전정의부원) 崔汝貞(최여정) 被捉(피착) 1933.08.19 동아일보 2면 / 朝鮮(조선)○○軍(군) 崔汝貞被逮(최여정피체) 1933.09.10 동아일보 2면
  3. 3.0 3.1 하얼빈(哈尔滨, 哈爾濱) 부가전(傅家甸) 구글지도
  4. 朝鮮(조선)○○軍(군) 男女 三名 被捉(남여 삼명 피착), 길림성 이통현에서 잡혀 武器(무기)도 押收(압수)되엇다 1931.03.26 동아일보 2면
  5. 이종락 부하(李鍾洛 部下) 삼명 우피검(三名 又被檢) 조선일보 1931.03.26 석간2 2 면
  6. 李鍾洛部下(이종락부하) 三名(삼명)이 被逮(피체), 이통현 공안국에 잡히어서 吉林省政府(길림성정부)로 護送(호송) 1931.05.04 동아일보 2면
  7. 김환(金煥, 1929~2009) 북한 정보넷
  8. 인물 - 북한을 움직이는 사람들(3) : 김환(金煥) 현대경제연구원 월간 「통일경제」 1995년 9월호 p.93
  9. 김환(북한) 나무위키
  10. 남북경제회담(南北經濟會談)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1. 11.0 11.1 11.2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북한은 왜 김혁의 아들 김환을 감추었나 RFA 2024.03.13
  1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장 6절 ‘혁명 시인 김혁’
  13. 조선의 별 위키백과
  14. 남만한인청년총동맹 - 위키백과
  15. 또 하나의 조작된 「神話(신화)」 1992.11.06 조선일보 23면
  16. "조선의 별" 노래
  17.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진짜 ‘한별’은 김인묵 RFA 2023.10.04
  18. 김일성의 이름은 어떻게 신화가 됐을까 rfa 2017. 2. 24
  19. [하루하나 연변항일사] 빛나는 그 이름 한별 연변통보 자유게시판 2008.12.12 :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간행한 자료라 함
  20. [우리 민족 항일투사] 김영신-중공동만특별위원회 부녀위원 길림신문 2023-08-23
    이 시기 잇달아 불행이 덮쳐들었는데 귀여운 딸애가 병에 걸려 죽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던 남편 한별이 희생되였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21. 金英信(1905-1932) 百度百科
  22. 朴韩星 维基百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