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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은 대구폭동, 제주4.3폭동, 여순반란사건, 지리산(智異山) 등(等)의 투쟁(鬪爭)에서 연전연패하면서 1949년 말에는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내부에서 박헌영에 반대하는 반당의 움직임도 강해지기 시작한다. 박헌영은 김일성과의 권력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남한에서다수의 폭력 사태를 | 남로당은 대구폭동, 제주4.3폭동, 여순반란사건, 지리산(智異山) 등(等)의 투쟁(鬪爭)에서 연전연패하면서 1949년 말에는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내부에서 박헌영에 반대하는 반당의 움직임도 강해지기 시작한다. 박헌영은 김일성과의 권력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남한에서다수의 폭력 사태를 일으켰는데,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면서 남한에서도 그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김일성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아 궁지로 몰리게 된다. | ||
[[박헌영]] | [[박헌영]]은 대남 공작이 대부분 실패로 끝나자 더욱 초조해져 김일성과 경쟁적으로 전면적 남침 전쟁을 주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9100300209201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10-03&officeId=00020&pageNo=1&printNo=8045&publishType=00020 남로당 전향파(南勞黨 轉向派)의 활동(活動)을 여하(如何)히 추진(推進)시킬것인가 - 남로당(南勞黨)의 위기(危機)] 1949.10.03 동아일보 1면 |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9100300209201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10-03&officeId=00020&pageNo=1&printNo=8045&publishType=00020 남로당 전향파(南勞黨 轉向派)의 활동(活動)을 여하(如何)히 추진(推進)시킬것인가 - 남로당(南勞黨)의 위기(危機)] 1949.10.03 동아일보 1면 |
2022년 4월 12일 (화) 11:08 판
남조선로동당 | |
기본 정보[1] |
|
영어명 |
|
약칭 |
남로당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
스펙트럼 |
극좌 |
당직자 |
|
대표 |
|
역사 |
|
창당 |
1946년 11월 23일 |
해산 |
1949년 6월 30일 |
이전당 |
|
이후당 |
조선로동당 |
기타 |
|
주소 |
대한민국 서울시 |
개요
남조선로동당 줄여서 남로당은 남한에 있었던 공산주의 정당으로 제주 4.3 사건에 관여했다. 1946년 11월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으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이다. 당수는 초대 여운형, 2대 허헌, 3대 박헌영이 맡았다. 기관지로 노력인민이 있었다.
관련 사건
2·7 파업-
제주 4·3 사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남로당의 몰락
남로당은 대구폭동, 제주4.3폭동, 여순반란사건, 지리산(智異山) 등(等)의 투쟁(鬪爭)에서 연전연패하면서 1949년 말에는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내부에서 박헌영에 반대하는 반당의 움직임도 강해지기 시작한다. 박헌영은 김일성과의 권력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남한에서다수의 폭력 사태를 일으켰는데,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면서 남한에서도 그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김일성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아 궁지로 몰리게 된다.
박헌영은 대남 공작이 대부분 실패로 끝나자 더욱 초조해져 김일성과 경쟁적으로 전면적 남침 전쟁을 주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남로당 전향파(南勞黨 轉向派)의 활동(活動)을 여하(如何)히 추진(推進)시킬것인가 - 남로당(南勞黨)의 위기(危機) 1949.10.03 동아일보 1면
“ |
남로당 전향파(南勞黨 轉向派)의 활동(活動)을 여하(如何)히 추진(推進)시킬것인가 정계단층(政界断層)
확실(確實)히 남로당(南勞黨)과 박헌영(朴憲永)은 고민(苦悶) 하고있고 남한 모지하(南韓某地下)에서 질식(窒息)하고 있는 김삼룡(金三龍)은 불안(不安)에 떨고 있다. 北韓國 (북한국가)에서 공급(供給)하는 자금(資金)과 폭력(暴力)으로 유지(維持)해 오던 박헌영(朴憲永)의 국제노선(國際路線)은 점차(漸次) 조직화(組織化) 되여가는 반당세력(反黨勢力)을 수습(收拾)하지 못하고 백골(白骨) 우에 왕좌(王座)를 쌓을려는 그의 야망(野望)은 이제 중대(重大)한 기로(岐路)에서 회의(懷疑)와 모색(摸索)으로의 전동(轉動)을 여지(餘地)없게 하고만 것이다.
일찌기 제이차미소공동위원회(第二次美蘇共同委員會) 당시(當時) 박헌영(朴憲永)의 국제노선론(國際路線論)에 감동(感動)한 스티코프 중장(中將)은 그때까지 김일성(金日成)에게 주었던 "위대(偉大)"한 칭호(稱號)를 "영명(英明)"한 칭호(稱號)로 바꿀 것을 명령(命令)하는 동시(同時)에 장차 박헌영(朴憲永)에게 "위대(偉大)한 지도자(指導者)"의 영예를 줄 것이라고 결심(決心)하였다는 것이다
박헌영(朴憲永)은 부수상(副首相)이지만 "위대(偉大)한 공산당(共産黨)의 지도자(指導者)로 자처(自處)하는 그로서 백두산(白頭山)의 일개(一個) "테로리스트" 김일성(金日成)의 이 使(사)를 장기간(長期間) 감수(感受)할 리(理) 만무(萬無)한 것이니 북한(北韓)에 있어서의 그의 지위(地位)를 강화(强化)하기 위(爲)해서 남한(南韓)에서의 희생(犧牲)의 증가(增加)가 필요(必要)하였고 그러기 위(爲)해서 강동정치학원(江東政治學院)을 주재(主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서상(敍上)의 남북노동당간(南北勞動黨間)의 감정적(感情的)인 반발(反撥)과 대립(對立)은 남한(南韓)에서의 희생(犧牲)의 증가(增加)와 아울러 남로당내부(南勞黨內部)에 있어서의 반박헌영(反朴憲永) 노선투쟁(路線鬪爭)을 유치(誘致)하는 결과(結果)로 나타난 것이다.
그 일례(一例)로 더월(去月) 서울 시당상임위원회(市黨常任委員會)의 대거(大擧) 반당성명사건(反黨聲明事件)을 들 수 있으니 군사총사령(軍事總司令) 조병수군(趙병水君)이 말하기를 "남로당(南勞黨)은 폭동(暴動)을 일으켜 무고(無辜)한 민중(民衆)을 살상(殺傷)하는데 시종(始終)하고 있다", "완전(完全)히 탈당(脫黨)한 것이 아니고 그대로 당(黨)에 머물러 있으며 그네들의 지시(指示)를 거부(拒否)하는 한편 반대투쟁(反對鬪爭)하겠다"라고 하였다. 오도(誤導)된 공산주의(共産主義) 청년(靑年)은 이상(以上) 고백(告白)에서 전술(前述)한 박헌영살륙정책(朴憲永殺戮政策)의 표면(表面)을 단적(端的)으로 표시(表示)하는 한편 남로당(南勞黨) 고민(苦悶)의 일면(一面)을 암시(暗示)하고 있다.
벌서부터 각 신문광고(各 新聞廣告)에 게재(揭載)되는 남로당(南勞黨) 탈당성명서(脫黨聲明書) 가운데는 권유(勸誘)에 의(依)한 것도 있겠지만 일군(一郡) 혹(或)은 수개면(數個面) 단위(單位)로 수십명(數十名) 혹(或)은 수백명(數百名)의 연명탈당(連名脫黨)은 모다 자발적(自發的)으로 행(行)하여지고 있음을 볼 때 박헌영(朴憲永)의 백골(白骨)의 왕좌(王座)는 바야흐로 붕괴전야(崩壞前夜)에 놓여 있거니와 이들 반당대중(反黨大衆)이 가지는바 정치적 의의(政治的 意義)는 자못 크다할 것이다. 더욱히 전향공산주의자(轉向共産主義者) 또는 반당 공산주의 대중(反黨 共産主義 大衆)의 힘을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테두리 속에서 정치적(政治的)으로 발전(發展)시킴에 있어서 현재(現在)의 구상(構想)에는 허다(許多)한 불비(不備)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지지 하는것은 사실(事實)이지만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현상(現狀)을 시인(是認)하지 아니하는 것도 또한 사실(事實)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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