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독립운동의 실상을 여러 측면에서 알아본다. 어느 증언이든 한 단면이며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닥종이 인형 작가 김영희의 증언

닥종이 인형 작가인 김영희는 그녀의 책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의 pp.307~309 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사람에 대한, 어느 이상주의 단체에서도 실망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증오하던 신문기사를 기억하는데, 독립운동가의 사진이 동그랗게 신문에 났을 때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아버지는 그 독립운동가 사진에 탁 하고 침을 뱉고는 그 사진을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후벼 팠다.

그 행동은 미루나무 같이 훤칠하고 도량 넓은 아버지의 행동이 아니었다.

그 기사는 독립운동가 아무개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린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늘 잔인하게 그런 기사를 대했다.

 "요즘 세상 총질을 못해서 굶는가!"

아버지는 만주 시절, 그의 정의와 혈기로 독립군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젊은 청년으로 당연한 행동이었다.

나라가 없는 민족이 제일 먼저 할 일은 다시 내 땅을 찾는 것이었고, 또한 할아버지에 대한 일본인들의 탄압도 중국으로 가게 된 큰 이유였다.

아버지는 그의 과거사를 처녀가 된 나에게 말할 때 눈이 빛나곤 했다.

그 내용은 그때 나에게 깊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당시 독립군 군사 훈련은 수수밭이나 갈대밭에서 했다.

만주의 갈대나 수수는 키가 커서 그들의 행동을 감출 수 있었다.

그의 말을 빌면 독립군도 여러 파가 있어 머리가 아플 정도라고 했다.

아버지가 존경했던 ㅈ 선생의 뛰어난 능력을 믿고 그의 청춘을 대한의 독립에 바치려고 했다.

 "영희야. 글쎄 죽일 놈들이 독립군이랍시고 가을만 되면 재만주 교포 마을에 나타나 짐승보다 못한 짓들을 했어."

아버지는 그 장면들을 설명할 때 몸을 벌벌 떨며 흥분했다.

가난한 교포들이 가을걷이를 끝내고 양식을 재어 놓으면 싸락눈 오기 전에 독립을 표방한 도적떼들이 엽총을 메고 나타났다.

재만 교포들을 마을 마당에 모이게 해놓고 헛총질을 해대며 독립자금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부녀자 반지부터 수수, 좁쌀까지 겨울에 먹을 미음 쑬 것도 안 남기고 싹 쓸어가면, 그 다음은 다른 도적떼가 독립군을 빙자해서 나타나고…….

그들의 횡포는 식구 앞에서 부녀자를 겁탈하든지 장정을 인질로 잡아가 귀를 잘라 보내고 돈으로 바꾸자고 협박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말했다.

독립군이라 칭한 그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떡칠을 하듯 머릿기름을 바르고 달빛 아래 나타나면 머리통이 철판같이 번들번들 빛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의 꿈에 자신을 잃었다.

 "영희야, 어느 놈이 진짜인지 모르는 판에 도적놈 소리나 면하고자 통분을 하며 독립군에서 나와버렸어."

아버지의 말은 쓸쓸했다.

아버지는 잘 알려진 몇몇 독립운동가도 존경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그림자를 상세히 알고 있어 오히려 실망만 한 것이다.

 "유관순 한 분만 독립운동을 제대로 했지 바지 입은 놈들 제대로 독립운동 한 것 못 봤다. 그저 제 욕심이 많아, 나라 없는 주제에 권력 다툼이나 했지. 그래도 독립이 되니 제일 먼저 설치는 놈들이 그 도적떼라니, 꾹 참고 독립을 기원한 사람들 딛고 올라가서 한 자리씩 맡아보려고……."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진짜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못 살아남고 다 죽었어. 해방 후 꾀 많은 독립군들은 기회를 얻어 한 자리 하고, 총질이나 해대던 무식한 놈들은 세상이 변한 후 총질 못해 가난하게 살고……."

김학철의 봉오동 전투 회고

“내 경험으로 볼 때 봉오동 전투니 청산리 전투에서의 전과는 적어도 300배 이상 과장된 것이에요.”(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출신 ‘김학철 평전’ 중에서)

김학철의 봉오동 전투 관련 회고 부분이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신화에 가까울 정도로 과장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요. 때로는 민족의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신화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겠지요. 그러나 과장과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과거사를 미화시키는 작업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 같아요. (중략) 과장하는 만큼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잖아요? 이제는 역사와 전설을 구분해도 좋을 만큼 이 사회가 성숙하지 않았습니까? 독립군의 대일 무장항쟁만 해도 그래요. 1998년 10월 2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글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어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명을 부상시켰으며, 같은해 10월 청산리 전투에서는 일본군 1개 여단을 사살한 것으로 전하고 있어요. 내 경험으로 볼 때 봉오동 전투니 청산리 전투에서의 전과는 적어도 300배 이상 과장된 것이에요.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은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은 정신의 투쟁이지, ‘대첩’이나 ‘혁혁한 전과’는 불가능한 전력이었어요. 일본군과 맞닥뜨렸을 때 열에 아홉 번은 졌어요. 어쩌다가 한 번 ‘이긴’ 경우도 일본군 서너 명 정도 사살하면 대전과로 여겼어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윶진 아비마냥 자꾸 지면서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날까지 계속 달려든 것입니다. 그 불굴의 정신만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학철 평전’, 실천문학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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