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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6월 방한 당시 사진이 다수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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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imnews.imbc.com/replay/1999/nwdesk/article/1782234_30729.html 박일(88살, 전 김일성대학 부총장) 인터뷰] MBC 뉴스데스크  1999-06-16
* [https://imnews.imbc.com/replay/1999/nwdesk/article/1782233_30729.html 박일 전 김일성대학 부총장, 김정일 정신차려라 분노]  MBC 뉴스데스크  1999-06-16
: [https://imnews.imbc.com/replay/1999/nwdesk/article/1782234_30729.html 박일(88살, 전 김일성대학 부총장) 인터뷰] MBC 뉴스데스크  1999-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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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8일 (토) 17:40 판

박일 (朴一)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소련명: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박일
(Пaк-Ир Пёт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朴一)
박일 김일성대 부총장.jpg
1999년 6월 방한 당시 사진.
기본 정보
성별
남성
출생일
1911년 5월 1일
출생지
연해주 포시에트지구 얀치헤(연추)
경력
소련국립종합대학 철학과 교원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부총장
학력
연해주 고려사범전문학교 졸업
소련 레닌그라드대학교 철학과 졸업

박일(朴一,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1911~2001)은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직후 북한으로 와서 1946년 9월부터 1948년 2월까지 김일성대학 초대 부총장으로 재직했다. 김일성대학의 초대총장은 김두봉(金枓奉, 1889~1961 ?)이 맡았으나 그는 정치 일에 바쁜 사람이라 실질적인 학교 업무는 부총장인 박일이 관장했다.[1] 그는 당시 북한에서 최고위 조선인 권력자들인 김일성김두봉(金枓奉, 1889~1961 ?)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김일성대 부총장으로 있는 동안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책을 쓸 것을 지시받았으나, 우상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소극적으로 응한 탓에 1948년 3월 소련으로 소환 당한 후 계속 소련에서 살았다. 1990년대에 세 차례 방한하여 해방 직후의 김일성과 북한 상황에 대해 증언했다.

  • 그의 한국식 이름은 박일(朴一)이나 소련 이름은 박-일(Пaк-Ир)을 성처럼 사용하여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박일(Пaк-Ир Пёт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朴一,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Park Il Peter Alexandrovich)로 표기했다.

생애

한국 방문과 김일성에 대한 증언

그는 1991년 8월 서울에서 열린 한민족철학자대회에 참석하러 처음 방한하여 해방 직후의 북한 실정과 김일성에 대한 증언을 했고, 1994년 10월에도 재소(在蘇) 전직 북한 고위관료 출신 인사들과 함께 방한했다.[2] 또 1999년 6월 서울대학교 대학기록관리실의 초청으로 다시 방한하여 19일부터 22일까지 강연과 구술증언 채록에 응했다.[3]

그의 증언 중 김일성의 해방 전 만주와 소련에서의 행적은 직접 아는 사안이 아니므로 그다지 참고할 것이 없다. 해방후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칠 때 그의 학력이나 지적 수준이 낮아 이해를 잘 하지 못했고, 중국에서 성장한 탓에 중국어에 익숙하고 조선말이 서툴러 매사를 중국어로 먼저 생각한 후 조선말로 번역하여 말하느라 말이 매우 느려서 가르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하였다는 등의 증언은 당시의 김일성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하다. 심지어 "金은 전혀 교육을 받지못했었고 그의 한국말은 형편없이 서툴러 그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김일성은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중국에서 성장하며 교육받고 활동하는 동안 중국에 동화되어 조선인의 의식이 희박했다는 증거이고, 이와 유사한 다른 사람의 증언도 많다.

또한 소련 군정 당시 이미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박일은 이에 적극 협력하지 않아 다른 소련파와는 달리 일찍 1948년 3월에 소련으로 소환되어 갔다고 했는데, 이 탓에 오히려 나중의 소련파 숙청을 직접 당하지 않았으므로 전화위복이 된 것같다.

1991년 8월

오는 21일부터 서울서 열리는 한민족철학자대회에 참석할 예정인 朴씨는 당시 5-6명의 무장군인이 엄중 경계를 한 모란봉 기슭 한 비밀가옥에서 46년11월부터 47년12월까지 1주일에 5회, 하루 2시간씩 이들 두 金씨에게 교육을 실시했으며 당시 이같은 사실은 극비에 부쳐졌다고 말했다.

교육내용은 주로 '변증법적 유물론', '볼세비키사상과 활동','레닌의 세계관','소련공산당사'등이었는데 특히 사회주의 이론지식이 부족한 김일성에 대해 소련군측은 집중교육을 시키도록 주문했다는 것이다.

朴씨는 김일성이 주로 중국에서 빨치산활동을 한 탓인지 사물을 판단하는데 우선 중국어로 궁리하는 습관이 있어 교육에 애로가 많았으며 1백여편의 그의 연설문을 작성할 때 金의 지적능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평양에서 그가 가르친 두 김씨는 김일성김두봉(金枓奉, 1889~1961 ?)이다.
北韓(북한) 진주한 蘇軍(소군)사령부서 특별 지시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한때 金日成(김일성)에 마르크스 레닌主義(주의) 특별교육
"다시 만나면 6.25 누가 일으켰나 묻고싶어"
前(전) 金日成大(김일성대)부총장 朴一(박일)씨가 밝히는「祕史(비사)」
對談(대담)=高大(고대) 申一澈(신일철)교수
하바로프스크서 農事(농사)짓던 無名人物(무명인물)
「재주보다 忠直(충직)」스탈린原則(원칙)따라 발탁
北韓(북한)의 土地(토지)개혁은 蘇(소)작품…金(김)이 한일은 代讀(대독)뿐
朴씨는 "金은 전혀 교육을 받지못했었고 그의 한국말은 형편없이 서툴러 그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면서 金이 어렸을때부터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랐었다고 설명했다.

1994년 10월

“주체사상은 새빨간 거짓말”/박일 전김일성대학 총장(인터뷰)
◎46∼48년 김에 마르크스·레닌사상 가르쳐/빨치산으로 활약했다던 지점 못찾아내
『김일성이 만들었다는 「주체사상」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지난 46년9월부터 48년3월까지 만 1년6개월동안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낸 박일씨(83·알마아타 거주)는 2일 『주체사상은 북한에 주둔한 소련공산당과 김일성측근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말했다.

46년10월 하순부터 48년1월초순까지 김일성의 개인교수로도 일한 박씨가 김일성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조선어와 러시아어를 구사하는데다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때 부모들이 이주한 연해주에서 태어난 박씨는 37년 레닌그라드 국립교육대학에서 철학을 전공,졸업 뒤 키르기스공화국내 한 교육대학에서 마르크스·레닌 강사로 일하다 소련이 2차세계전쟁에 참전하면서 러시아교수들이 여기에 동원되는 바람에 철학교원이 없던 알마아타국립대 철학교수로 임명돼 44년부터 87년까지 일했다.

박씨는 해방과 함께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이 정책수행을 위해 동원한 지식인 가운데 유일하게 러시아어와 조선어를 유창하게 구사,김일성대학 총장에 임명됐다.

박씨는 『대학총장 취임 3개월 뒤인 46년12월 어느날 북한주둔 소련군 참모부 민정장관이던 로마넨코 대장으로부터 김일성과 김일성대학 명예총장으로 있던 조선공산당 인민위원회위원장 김두봉에게 마르크스·레닌사상을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고 김일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35세였다는 박씨는 『동갑이던 김일성에게 스탈린이 지은 「소련공산당약사」라는 책자를 교재로 46년10월 하순부터 묘향산밑 김일성숙소에서 매일 아침 7시55분부터 1시간씩 강의를 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핵심부분을 비롯,책내용을 가장 알기 쉽게 설명했으나 이해를 잘 못해 결국 사회·인민·공산주의·사회주의·철학등 기본개념을 무려 2개월간이나 가르쳐야 했다』고 회상한다.

박씨는 47년5월까지는 하루에 한번씩 개인교습을 하다 이후로는 1주일에 3번씩 가르쳤으나 흥미를 잃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김일성 지도를 맡은 소련군의 레베제프 대장으로부터 『「김일성은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이라는 내용을 담은 김일성혁명투쟁사를 김일성과의 좌담을 통해 책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1년4개월동안 1주일에 2∼3번 김일성의 휴식시간인 하오6시부터 7시까지 좌담을 해 큰 노트 4권분량의 자료를 러시아어로 만들었으나 그 내용이 가짜인데다 허점투성이여서 결국 책을 출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박씨는 『김일성은 빨치산으로 활약했다는 지점을 지도에서 지적하지 못하는가 하면 「유라(김정일의 러시아어 이름)가 어디서 태어났습니까」라는 질문에도 「알아서 뭐하겠느냐」며 대답을 회피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대학총장으로 있을 때 평양 및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마르크스·레닌강연을 하면서 「김일성만세」를 청중과 함께 외치지 않은데다 허가 없이 대학에 조선학과를 개설하고 소련군 장군들을 상대로 태극기에 대한 설명을 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쫓겨났다.

6·25전쟁에 대해 『소련공산당 식민지정책의 부산물』이라고 잘라 말한 박씨는 『한국의 청년들은 안중근의사가 지닌 민족정신을 갖고 북한의 청년들이 「눈을 뜨도록」 도와줘야 한다』면서 『정치·사회적으로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해선 무식해선 안된다며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통일되는 날까지 살아 동포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싶다』는 박씨는 지난달 하순 서울에서 열린 북한민주화회의에 참석차 내한했다 3일 알마아타로 떠난다.

1999년 6월

김일성 가르친 박일씨 김일성 거짓 列傳(열전) 저술 끝까지 거부 1999.06.16 조선일보 27면
‘민족사 산증인’ 재외동포 모국방문 행사… 7명 인터뷰
◈김일성 가르친 박일씨 김일성 거짓 열전 저술 끝까지 거부

『제가 살 날이 얼마겠어요. 다음에 올땐 남북이 하나된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

박일(박일·87)씨는 37년 카자흐스탄 이주후 87년까지 카자흐스탄 종합대 철학교수로 재직했던 인텔리. 1930년 연해주 고려사범전문을 졸업하고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철학과를 마쳤다.

1946년 12월 박씨는 『북한에 가 김일성과 북조선군에게 마르크스-레닌 사상을 교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선말로 철학을 가르칠 사람이 박씨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평양대학(이후 김일성 종합대학) 부총장에 임명됐다. 북한에 머무르는 2년 동안 박씨는 김일성의 사상 스승이었다.

『김일성은 가짜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제게 김일성 열전을 쓰라더군요. 노트 4권 분량으로 작업했지만 학자의 양심으로 책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

그래서인지 소련 공산당과 김일성은 48년 3월 그를 카자흐스탄으로 내쫓았다. 박씨는 이후 다시는 북한 땅을 밟지 못했다.

『국가와 사회, 문화, 철학 모든 분야에서 거짓말로 세워진 나라가 북한입니다. 인민을 속이고 탄압하는 정부는 민족 전체를 위해 사라져야 합니다. 』
1999년 6월 방한 당시 사진이 다수 나옴.
박일(88살, 전 김일성대학 부총장) 인터뷰 MBC 뉴스데스크 1999-06-16
그의 육성이 잠간 나옴.

참고 자료

p.354 김일성은 소련어는 전혀 못했고, 조선말도 몹시 서툴렀다. 그는 중국말로 생각한 뒤 이를 조선어로 번역하여 말하느라 말이 몹시 느렸다.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