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이란 박헌영(朴憲永, 1900 ~ 1956)이 1946년 1월 5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합의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혔는데, 국내 언론 보도와는 달리 뒤늦게 전해진 외신보도는 그가 "소련 1개국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하여 이 때문에 벌어진 논란을 말한다.

사건의 개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朴憲永, 1900 ~ 1956)은 1946년 1월 5일 내외신 기자 회견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튿날 국내 신문에 실린 기사[1]에는 박헌영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하며 반탁진영을 비난했다는 발언 요지가 실렸다.[2][3][4] 좌파 진영은 연말의 반탁 입장에서[5] 새해 벽두에 찬탁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큰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다[6][7]. 그런데, 1월 15일 청취된 샌프란시스코(桑港) 방송[8]에서 뉴욕타임즈(NYT)에 보도된 존스턴(Richard J. H. Johnston, 1910~1986)[9][10] 기자의 서울발 기사를 인용하여 "박헌영이 인터뷰에서 소련 1개국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나아가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는 보도를 하여, 이에 격분한 사람들과 정당, 단체들이 박헌영 측에 거세게 항의하고 비난하는 파문이 일어났다.

이에 1월 17일 박헌영조선공산당은 기자회견에서 그런 발언을 한 일이 없다며, 명백한 오보이고 사실무근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기자 회견에 참석했던 국내기자들도 박헌영이 그런 발언을 한 일이 없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래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 대한 항의와 비난은 그치지 않았으므로, 조선공산당은 1월 26일에 책임비서 박헌영의 명의로 미군정청에 문제의 기사를 쓴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를 추방해달라는 공문서를 접수시킨다.

사태를 주시하면서도 민간의 일이라 직접 개입하지는 않고 있던 군정청은 불가피하게 진상 조사를 시작하게 되고, 그 결과 존스턴 기자의 기사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2월 18일 발표한다. 공식적으로는 사건은 이로서 종결되었지만, 조선공산당은 한 차례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한민당 등은 박헌영의 매국적 발언이 사실로 확인되었다며 공격하는 등 한동안 여진이 계속되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일들에 묻히게 된다. 이 사건은 남한에서 박헌영의 입지를 좁히고,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

그런데 근래의 대다수 연구자들은 찾아낸 일부의 당시 신문 기사와 미군정청 문서를 토대로 존스턴의 기사는 오보이며, 미군정이 오보인 줄 알면서도 은폐하고 조작된 조사 결과를 발표하여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탄압하는 데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또 학계와 일반에는 이것이 널리 사실로 인정되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에 "박헌영 존스턴"으로 검색해 보면 온통 이런 식의 주장만 나오고, 이에 대한 반박 글은 거의 전무하다.

그러나 새로 발굴된 당시의 주요 문헌들을 보면 이런 주장은 성급한 판단으로 잘못된 것이고, 당시 미군정청의 최종 조사 발표가 맞다는 것이 재차 확인된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대로 미군정청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하여 음모를 꾸몄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새로 발굴된 자료들까지 검토하여 사건의 진상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946년 1월 5일의 박헌영 내외신 기자 회견은 내신과 외신 구분하여 따로 열렸고[1][11], 외신회견에서는 박헌영 본인도 영어로 문답하였다. 따라서 국내신문 기사와 기자들의 성명 및 이를 근거로 존스턴의 기사가 오보라고 판단한 미군정청 일부 인사들의 기록이 외신 보도가 실제 오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들도 내외신 회견이 동시에 열린 줄로 잘못 알고 오판한 것이다. 2월 18일 미군정청의 공식적인 조사 발표 후에는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기록을 남긴 군정청 인사는 아무도 없다.

모든 연구자들이 존스턴 기자의 박헌영 인터뷰 기사는 뉴욕타임즈에 실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1946년 1월 10일자 기사로 실렸다.[12]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없는 NYT 기사를 조작하여 있는 것처럼 방송했다는 음모론의 근간이 무너짐.)

존스턴 기자의 뉴욕타임즈 기사[8], UP 통신이 타전한 기사[13][14][15], 군정청 홍보장교(PRO) Tucker 대위가 당시에 기록한 메모[16] 등에 나오는 박헌영의 외신회견 발언은 서로 부합하며, 미군정청의 최종 조사 발표문[17][18]에 나오는 것과도 일치한다.

뉴욕타임즈 기사를 인용한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미국의 소리 (VOA)" 한국어 방송이며, 서울중앙방송국이 이를 국내에 중계하여 청취된 것이다.[19] 이는 당시 매일 해 오던 프로그램 진행 방식이었으므로[20] 여기에 미군정의 음모가 개입되었을 여지는 없다. 미군정청이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직접 청취하고 국내에 널리 알리려고 보도자료를 만들어 돌렸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어로 하는 방송을 서울중앙방송이 국내에 중계했는데 미군정청 사람들이 한국어를 한국 사람들보다 더 잘 알아서 보도자료까지 만들어 한국사람들에게 배포했다는 말인가?

박헌영측은 그가 외신회견에서 문제의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외신 기자들의 기사나 증언이 아니라 관계없는 국내 신문 기사와 기자들의 성명을 제시하여 사람들을 속이려 하였다.[21][22][23][24][25]

결론 : 존스턴은 기사를 조작하지 않았고, 미군정청이 이를 공산당 탄압에 악용할 음모를 꾸민 적도 없으며, 진상조사 발표문[18]을 조작하지도 않았다. 박헌영은 외신회견에서 실제로 "소련 1개국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는 문제의 발언을 하였다.


박헌영이 발언할 때마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 미군정청 기록들도 꼬집고 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는데 박헌영은 입만열면 다른 사람들은 반동으로 몰고, 공산주의자들만 민주주의자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을 얄팍한 사탕발림이라고 하고 있다.[26] 해방 당시에도 공산주의식 용어혼란 전술이 만연해 있었고, 박헌영은 그런 방식을 가장 애용하는 선동가였다. 박헌영식의 논리라면 그가 추종하는 스탈린이 가장 민주적인 지도자가 되고, 미국은 파시스트 반동국가가 되는 듯하다.


[코멘트]

  • 박헌영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좌익들도 1945년말까지는 반탁을 주장하다가 새해 초에는 일제히 찬탁으로 돌아섰다. 박헌영은 1월 1일과 1월 3일 두 차례 연달아 미군정사령관 하지(Hodge) 중장을 만났는데, 1월 1일에는 반탁을 주장하다 1월 3일에는 찬탁으로 돌변해 있었다고 한다.[27] 하지는 좌익들이 새해 벽두에 일제히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 데는 소련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아마도 이런 일로 해서 공산당과 박헌영은 상대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은 듯하다.
  • 박헌영이 기자회견을 열었던 1월 5일 오전 11시에 서울 광화문에서는 12월 30일 암살 당한 송진우(宋鎭禹, 1890~1945)의 영결식이 있어[28] 우파 언론 기자들은 그쪽으로 가고, 박헌영의 회견에는 좌파 언론 기자만 참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회견 기사도 좌파 언론들이 주로 실었다. 이때문에 내신 회견에 참석했던 국내 기자들이 자신들은 참석하지도 않은 외신 회견 발언을 두고 모두 박헌영을 옹호하는 성명을 낸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날 평양에서는 소련군이 반탁 의사를 굽히지 않던 조만식을 친일파로 몰아 고려호텔에 연금하였다.
  • UP 통신이 타전한 박헌영 외신회견 기사는 국내에 좀 늦게 보도되었는데, 당시 UP와 계약한 국내통신사는 조선통신사로, 좌파 계열이라 좌파에 불리한 기사는 보류시키고 내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므로 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 외신회견 참석자 중 태평양판 성조지(Pacific Stars and Stripes) 기자 콘월(Robert Cornwall) 중사가 박헌영은 존스턴의 기사와 같은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면서 영자신문 Seoul Times 가 보도하였는데[29], 그는 미군정청 조사에서는 존스턴의 기사가 맞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하여 엇갈리는 진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엇갈리는 그의 말은 무시하더라도 다른 UP 기사나 Tucker 대위의 메모, Massock 의 진술 등만으로도 NYT 존스턴 기자의 기사가 오보가 아니라는 것은 증명된다.
  • 미군정청의 조사 발표가 있은지 불과 19일 후인 3월 9일 오전 11시에 박헌영이 공동 의장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의장단 7명 (의장 3명, 부의장 4명)이 New York Times의 Johnston, UP 의 호이트(Palmer Hoyt, 1923 ~ 2005) 등 외신 기자와 회견을 한다. 박헌영은 자신이 추방을 요구했던 존스턴 기자와 다시 회견을 한 것으로 보아 군정청 발표를 승복한 것으로 보인다.[30][31] 또 그는 3월 26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UP의 호이트 기자가 3월 22일 서면으로 제출한 질문에 대해 응답하였다.[32][33] 박헌영이 문제의 기자들과 계속 회견을 가진다는 것은 그들이 썼던 기사가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짜 기사를 쓰는 사람과 계속 인터뷰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논란이 일 것이 뻔한 문제의 발언을 박헌영같은 노회한 정치인이 했을 가능성은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도 당시에 그것을 알았기에 국내 기자회견에서는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고, 국내에 보도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외신회견에서만 문제의 발언을 하였다. 그는 당시 김일성과 지도자 경쟁을 하는 상황에 있었으므로 지도자 결정권을 가진 소련에 대한 아부성 발언이 외신을 통해 소련에 알려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뉴욕타임즈 기사를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인용 보도하지 않았더라면 국내에는 문제의 발언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기자회견 며칠 후인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이 되어 공식적으로 지도자로 나선다.


NYT 존스턴 기자와 미군정청의 음모로 몰아간 연구 사례

현대사 사료의 문제(서중석) > Ⅱ. 해방시기 사료의 문제①-국내자료(남한) 國史館論叢 第73輯 (국사편찬위원회, 1997) : 하지는 진상을 알고 있었는데도 박헌영이 말했다는 부분에 대한 존스턴의 보도가 정확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성명서가 나오자 우익 신문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이를 대서특필하였다. - 이는 아무 근거 없는 주장임.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중심, 2003년 08월 05일) pp. 72~73에 정리해 놓은 이 사건의 경과
정용욱, 『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p. 171~176.


참고 자료


각주

  1. 1.0 1.1 국제적 민주조선 수립, 통일전선은 4정당 교섭으로 : 공산당 朴憲永씨 내외기자단과 회견 자유신문 1946년 01월 06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 朴憲永氏와 記者團 會見, 統一 急速 實現 可能, 莫府會議 決定 承認을 原則으로 共産黨에서 各黨과 交涉中 중앙신문[中央新聞] 1946년 01월 06일
  3.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5일 > 조공(朝共) 朴憲永, 당면문제에 대해 내외기자단회견 서울신문 1946년 01월 06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 朴憲永氏 外國記者團과 會見 民主衆報 1946.01.07
  5.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조선공산당의 鄭泰植, 개인자격으로 탁치반대를 표명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6.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신문 1946년 01월 03일
    反託보다 먼저 戰線 統一,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 態度 表明. 중앙신문, 1946.01.03
  7. 託治(탁치)는 國際協力(국제협력) 朝共(조공)의 態度表明(태도표명) : 1월 2일 동아일보 1946-01-05 1면
  8. 8.0 8.1 朝鮮(조선)을 蘇聯屬國(소련속국)으로, 桑港放送(상항방송)이 傳(전)하는 朝共 朴憲永氏 希望(조공 박헌영씨 희망) 동아일보 1946-01-16 1면
  9. 부음 기사(Obituary) : RICHARD JOHNSTON IS DEAD AT AGE 76 New York Times December 25, 1986
  10. 존스톤씨 25일 離韓 자유신문 1949년 10월 19일
  11. UN의 한국문제처리에 관한 미국무부문서 5(대한민국사자료집) > 박헌영 발언관련 정보 (Information about Pak Hun Yung statement) 1948년 12월 2일 무초(Muccio) 초대 주한 미대사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 외신 회견은 한국 기자들과 분리해서 이루어짐.
  12. Richard J. H. Johnston, Communist leader favors Russian control over Korea New York Times 1946.01.10,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방문 열람만 가능) : 이 기사는 뉴욕타임즈 과거 기사 검색에도 잡히지 않아 일부 한정된 판에만 실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정치 고문이었던 Robert T. Oliver (1909 – 2000) 박사의 한국 관련 기사 스크랩 철에 들어 있다.
  13. 유·피가 傳(전)한 問題(문제)의 電文(전문) 동아일보 1946-01-17 1면
  14. UP 記者의 報道 조선일보 1946년 1월 17일자 1면 최하단 우측
  15. 蘇聯 一箇國의 托治 反對치 안는다, UP가 報導한 朴憲永氏談 / UP 記者의 報道 공업신문 1946년 1월 18일
  16. 朴憲永 失言 事件 絶對로 辯明 못할 實事 : 臨席하엿든 美將校談 대동신문 1946-01-23
  17. Military Government Press Relaese, 18 February 1946 : Incl #1 to USAFIK G-2 Periodic Report #156 (19 February 1946).
  18. 18.0 18.1 美國記者(미국기자)와 朴憲永氏(박헌영씨)의 問答(문답) 正確 동아일보 1946-02-19 1면
  19. 朴憲永氏의 談話 問題化 중앙신문, 1946.01.17 1면 :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국내에 중계되는 과정이 나옴.
  20. 상항(桑港)으로부터 국어방송(國語放送) 중계(中繼) 1945-12-02 영남일보 2면
  21. Korean Nationalist Party spreads ill propaganda for Communist Party, even after writer spikes misunderstanding. : 박헌영 발언 논란에 대한 朝共의 반박 성명 (조선인민보 1946-01-18 기사 영역)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22. "유욕(뉴욕)紙 所報는 誤傳" 共産黨에서 記者團에 言明 : 조선일보 1946-01-18
  23. 민족적 지도자를 誣言하는 음모배 韓民黨幹部는 공개적으로 사과하라 - 필자가 취소하는 괴기사 사건의 진상에 대하야 성명함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부 (朝鮮共産黨 中央委員會 宣傳部) 1946.01.18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24. 1946-02-20 조선인민보 (영역) : 미군정청의 조사 발표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항변. (국립중앙도서관 미군정청 문서)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235, p.239
  25. 군정청 발표(軍政廳 發表)에 조공(朝共)서도 성명(聲明) : 조선일보 1946년 2월 20일 1면
  26. G-2 Periodic Reports, 2 January 1946 - 7 March 1946 p.102 박헌영의 민주주의관에 대한 코멘트, WS #6 (1945.10.30, p.6) ; p.182 박헌영이 말하는 공산당의 민주주의가 미국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설명이 나옴, WS #12 (1945.12.11, p.6)
  27.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 25 Jan. 1946 CG : Commanding General / USAFIK : United States Armed(Army) Forces in Korea / CINCAFPAC : Commander-in-Chief, Army Forces of Pacific (미육군 태평양방면군 사령부)
  28. 最後(최후)로 靈柩(영구)에 一哭(일곡) 昨日 故宋先生 永訣式(작일 고송선생 영결식) 1946.01.06 동아일보 2면
  29. American Correspondent Endorse Park's Statement of Deny 1946-01-18 「The Seoul Times」
  30. 자료대한민국사 제2권 > 1946년 03월 09일 > 민전 의장단, 외국인 기자단과 회견 조선일보 1946년 03월 09일
  31. 우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 民戰의장 제씨 외국기자와 문답 : 3월 9일 오전 11시 자유신문 1946년 03월 10일
  32. 南朝鮮에 黨員三萬餘, 共産黨 朴憲永氏 UP記者에 應酬 중앙신문 1946년 3월 28일
  33. UP記者 設問에 朴憲永氏의 答辯, 金日成氏大統領은 總意라면 支持한다 嶺南日報 1946.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