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해방 후 북한은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한 반면에 남한은 친일파가 득세하여 북한이 더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이다. 북한은 오늘날에도 최고 권력자의 말 한마디로 민초는 말할 것도 없고 최고위층 누구라도 고사총 세례를 받고 사라질 수 있는 나라이다. 최고 권력자의 고모부나 형도 이를 피해갈 수 없다. 이런 곳에서 해방 직후 혼란기에 친일파 청산이 정해진 법절차를 지켜가며 제대로 수행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지주 등 적대 계층과 정치적 반대 세력들을 제거하는 명분으로 친일파 몰이를 했을 뿐이다. 정권에 충성하는 자들은 친일파라도 다수 등용하고, 심지어는 일본인 기술자들까지 김일성 본인보다 더 많은 월급을 주며 고용하고 우대했다.

반면에 남한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야 친일청산 문제를 다룰 수 있었지만, 행위 자체가 국가가 생기기도 이전에 발생한 것으로 소급입법으로 처벌한다는 것이 법적으로도 논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반민특위 법안이 국회에 통과되자 법무장관이 대통령에게 소급입법과 단심 재판의 위헌성을 문제삼아 거부권 행사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여 미흡하나마 정상적인 입법과 수사 및 재판을 거쳐 다소간의 청산이 이루어 졌다.[1][2]


북한의 친일청산 법령 :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북한의 친일청산에 대한 유일한 법령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3월 7일 가결한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이다.[3][4]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해당하는 사람의 정의만 내려 놓고, 구체성도 없다. 해방 후 정권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반민족행위자에 포함시켰다. 권력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아무나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낙인 찍어 제거할 수단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다. 친일파라도 정권에 협조하면 구제해 준다는 부칙까지 달았으니 자의적으로 적용되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이런 이현령 비현령(耳懸鈴鼻懸鈴) 법령을 만들어 놓고 권력자 자의로 집행했으니,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했다는 말만 있을 뿐, 누구를 어떻게 조사하고 재판을 해서 무슨 죄목으로 어떻게 처벌했다는 기록이 전무한 것은 당연하다.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1946. 3. 7,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다음에 해당되는 자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이다.]

  1. 일제의 침략당시 조선민족을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팔아먹은 매국노와 그 관계자.
  2. 귀족칭호를 받은 자, 중추원 부의장 고문 및 참의, 일본 국회 귀족원과 중의원의 의원.
  3. 악질고관 (조선총독부 국장 및 사무관, 도지사, 도사무관, 도참여관).
  4. 일제경찰 및 헌병 고급관리 (경찰경시, 헌병 하사관급 이상) 사상범 담임판사와 검사.
  5. 고등경찰 중 악질분자 (인민의 원한의 대상이 된 자).
  6. 고등경찰의 밀정책임자와 밀정.
  7. 해내외 민족운동자와 혁명투사들을 학살 또는 박해한 자와 방조한 자.
  8. 도회의원 및 친일단체 파쇼단체 (일진회, 일심회, 녹기연맹, 대의당, 반공단체 등) 간부와 악질분자.
  9. 군수산업의 책임경영자 및 군수품조달 책임자로 악질분자.
  10. 일제의 행정, 사법, 경찰기관과 관계를 가지고 만행을 감행하여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으로 된 민간악질분자.
  11. 일제의 행정, 사법, 경찰의 관공리로서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이 된 악질분자.
  12. 황국신민화운동을 전개하여 지원병, 학도병, 징용을 실시하는데서 이론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의식적으로 행동한 악질분자.
  13. 8.15 해방 후 민주주의적 단체를 파괴하며 또는 그 지도자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였거나 테러단을 조직하고 그것을 직접 지도한 자와 그와 같은 단체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 혹은 테러행위를 직접 감행한 자.
  14. 8.15 해방 후 민족반역자들이 조직한 반동단체에 의식적으로 가담한 자.
  15. 8.15 해방 후 민족통일전선을 방해하는 반동단체의 밀정 혹은 선전원으로서 의식적으로 밀정행위를 감행한자와 사실을 왜곡하여 허위선전을 한 자.
  16. 부칙: 이상의 조항에 해당한 자로서 현재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자와 건국사업을 적극 협력하는 자에 한하여서는 그 죄상을 감면할 수도 있다.


  • 출처: 김일성,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김일성저작집』2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113-114쪽.


김일성 교시 : 남조선에서 인테리를 데려올데 대하여

김일성전집4 에는 김일성이 1946년 7월 31일 남조선에 파견되는 일군들과 한 담화 "남조선에서 인테리를 데려올데 대하여"가 나온다.[5] 일제시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라면 지주나 부유한 집안 출신이 대다수이고, 친일파로 몰리기에 적합한 사람들이 대부분인데도 자신들이 필요하니 남한서 데려오라고 남파하는 공작원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다.


탈북 작가 최진이의 북한 친일청산에 관한 증언

류석춘․김광동, 북한 친일(親日)청산론의 허구와 진실 시대정신 2013년 봄호

북한을 대표하는 작가 양성기관인 김형직사범대 출신으로 1999년 월남한 탈북 작가 최진이는 북한의 친일청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해방이후 전 국민의 숙원인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 내는가 하는 문제는 정치가로서의 승패가 달린 관건적 안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떠오르던 많은 정치인사들 중 누구보다 정치 감각이 탁월했던 김일성은 이를 자기 권력기반 형성에 완벽하게 이용하였다. 그 대표적 방법이 인구 70 %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사회에서 일제시기 땅마지기나 가지고 있던 자들을 우선 처벌하는 일이었다. 3천 평 이상 소유한 자는 지주, 천오백 평부터는 부농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땅을 무상 몰수하는 것과 동시에 본인들은 전부 타고장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의 개인적 사정을 알 바 없는 낯선 고장 사람들은 국가가 ‘친일주구’ ‘역적’이란 딱지를 붙여놓은 추방자들을 심판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 심판대에 오른 사람들은 피비린내를 맡기 전에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군중 히스테리의 제물로 고스란히 바쳐졌다. 군중의 열기가 고조되면 될수록 김일성의 정치적 카리스마는 급상승하였다. 김일성은 북한인들을 ‘적대계급’ 증오사상으로 자극시킬 때 그것이 가져올 반사작용의 효과를 알았다. 농민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분배해 준 자신에 대한 숭배열이었다. 김일성이 무상 분배한 땅은 ‘국가’의 이름하에 곧 압수될 정치 미끼일 뿐이었다. 농민들은 얼마안가 나라에 땅을 몰수당하고 ‘사회주의’의 미명하에 지주의 머슴에서 수령의 노예로 신분이동을 하였다.”

북한의 철저한 친일청산이란 소비에트(soviet)화를 합리화시키고 나아가서 북한을 공산주의 체제로 재편하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가혹한 전체주의 공산혁명에 다름 아니었다.[3]


브라이언 마이어스 동서대 교수의 견해

브라이언 마이어스 (Brian Reynolds Myers, 1963 ~ )는 북한 전문가로 부산 동서대 교수이다. 독일의 튀빙겐 대학에서 북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김일성 치하의 문화에 대한 개척적인 연구라 할 만한 『한설야와 북한문학(Han Sorya and North Korean Literature)』을 출간했다.

북한에 친일파가 없었다고 남한 좌파와 미국의 역사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해방 후 평양으로 이주한 거의 모든 지식인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일제와 협력한 사람들이었다. 소설가 김사량(金史良, 1914~1950)처럼 특히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몇몇 인물들은 사실상 서울에서 쫓겨났고,[6] 북쪽은 그런 협력자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1981년에 북한에서 발행된 한 역사책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 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테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오랜 인테리들의 혁명성과 애국적 열의를 굳게 믿으시고 그들을 새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 주시었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김일성 형제도 중국에서 일본군의 통역관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7] “북한은 이념적으로 공산주의 중국이나 동유럽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적대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에 더 가깝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가리켜 친일파를 숙청하지 않은 친일정권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김일성 치하의 북한문화를 연구하면서 확인했다. 김일성은 친일파를 숙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은 이승만 정권보다 친일 인텔리를 환영했고 그들에게 관대했다. 김일성은 친일 인텔리에게 정부의 고위직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우상화작업을 하게 했다. 일제가 해왔던 것처럼 히로히토와 같은 우상화 작업을 해나갔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상화에 동원한 수사(修辭)를 그대로 빌려왔다.”[8]


"김일성 장군의 노래" 작사한 이찬(李燦)은 친일 시인

이찬(李燦)이 1944-01-19 매일신보에 실은 친일시 〈송출진학도(送∙出陣學徒)〉

북한에도 애국가가 있지만 거의 불리지 않고, 남한의 애국가 역할을 하는 노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이다. 이 노래의 작사가 이찬(李燦, 1910 ~ 1974)은 친일 시인으로 일제 말에 〈송출진학도(送∙出陣學徒)〉등의 친일 시를 썼다.

북한에서 고위직인 문화성 부상, 민족예술극장 총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극작가 겸 작가 조명암(趙鳴岩, 1913~1993)은 일제시대에 조영출(趙靈出)이란 이름으로 대중가요 작사를 많이 하였는데, 친일 가요가 많고, 친일 작품도 많이 썼다.


북한의 일본인 기술자 특별 대우

북한은 다수의 일본인 기술자를 잔류시키고, 특별 대우를 했으며, 이들을 위해 일본어로 강의하는 학교, 일본어 신문 발간 등을 허용하였다.

이렇듯, 북한에서는 ‘친일파’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본인 기술자들도 활용하였다. 해방 후 북한은 거대한 공장을 자체적으로 가동하기에는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일본인 기술자들의 귀국마저 중지시키고 강제로 일을 하게 했다. 그리고 북한 기술자들로 하여금 기술 이전을 받도록 조치했다.

“이로 인해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868명이나 되었고 1947년에는 405명이 되었다. … 일본인 기술자에게는 월 4,500~5,000원을 지급했다.

당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김일성)이 4,000원, 동 인민위원회 과장급이 1,500원, 일반 사무원이 800~1,000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좋은 대우를 해 주었는가. … 흥남공장에서는 일본인 기술자 콘키치(昆吉朗)를 ‘노력영웅’으로 표창까지 했다.”[9]

북한 정권에 참여한 친일파


북한과 소련의 남한에 대한 친일파 공격과 미군정청의 반박 기록

아래 미군정 문서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적반하장식 언사에 대해 비판하는데, 그 중에는 남한에 대한 친일파 공격도 있고, 이에 대한 미군정청의 반론도 나온다. 공산주의자들의 남한에 대한 친일파 공격은 역사가 오래된 것이며, 적반하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월북한 친일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Choi Sung Hi, 1911~1969)를 중용한 것, 소련 군정 핵심인사 G. M. Balasanov가 일본인 하인을 고용한 것 등에 대한 비판도 있다.

Characteristic of the Communist-dominated Parties of Korea RG 332, USAFIK,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69, U.S.-U.S.S.R. 2nd Year: Efforts to Reopen Commission, 1947 Moscow thru U.S.-U.S.S.R.: Transcripts AG Radio, May 1947 (4 of 4)

[p.3] Again, although the communists in both zones have sniped continually at alleged pro-Japanese Koreans employed by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the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has not hesitated to include in its membership Choi Sung Hi, Korean dancer notorious for her collaboration with the Japanese. Furthermore, although the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has labored to remove all vestiges of Japanese influence in the schools of South Korea, North Korea has continued to maintain instruction in the Japanese language for the children of Japanese technicians remaining in the zone. Moreover, while the colleagues of the Soviet Delegation have thundered against Japanese collaboration, Counsellor G. M. Balasanov has employed Japanese servants in his home at Pyongyang. (Parenthetically one might wonder at the uproar if Dr. Arthur Bunce of the American Delegation hired a Japanese servant.) The truth is that all the Communist agitation about pro-Japanese is so much eye-wash. Under the Soviet system both Japanese and pro-Japanese Koreans can be used if they benefit to party. Thus many Japanese technicians have been retained and evidently treated well in North Korea for a dual purpose : (1) to profit from their skill until satisfactory Korean replacements can be obtained; and (2) to be indoctrinated with Communism for possible employment as Soviet agents upon repatriation to Japan.


북한의 항일운동가 청산

북한이 실제로 철저히 청산한 것은 친일파가 아니라 항일운동가들이다. 처음부터 북으로 간 사람들은 대부분 좌파들이지만 엄혹한 일제시대에도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김일성 치하에서는 김일성 직계 만주 빨치산 출신만 제외하고 거의 모두 숙청 당했다. 박헌영 등 남로당파와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모두 다 숙청으로 처형 당하거나 아니면 투옥 또는 오지 추방을 당했다. 최근 남한에서 미화에 열 올리고 있는 의열단(義烈團)의 김원봉(金元鳳, 1898~1958)도 숙청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다.

조만식 선생 등 북한의 민족 진영 독립운동가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김규식, 정인보 등 6.25 때 남한에서 납치해간 독립운동가들도 많은데, 납치되어 가던 도중에 작고한 분들도 많고, 대부분 비참한 만년을 보냈다.


친일파 타령 유감

친일파 후손은 떵떵거리며 사는 반면에 독립운동가 후손은 가난에 찌들리고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다고 좌파들이 흔히 하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떵떵거리며 잘 사는 친일파 후손이 없지는 않지만 밤낮 친일파 타령하는 좌파들 중에 더 많다는 것도 밝혀져 있다. 친일파 타령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조상은 일제시대에 무슨 독립운동을 했는지 먼저 밝히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북한으로 간 이름있는 항일운동가 대부분은 숙청 당하고, 후손들도 비참해진 반면에, 남한에서는 독립운동가를 발굴 서훈하고 직계 자손들을 지원하는 일을 건국 이래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다. 물론 전국민이 가난하던 시절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상당한 수준이 될 것이다.


일제시대 조선인 탄압의 주범은 일본인 들이고, 그에 비하면 조선인 친일파들에 의한 피해는 조족지혈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주범인 일본인들은 고히 본국으로 보내주고, 남은 조선인들끼리 소모적인 친일파 논쟁을 끝없이 벌인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나라의 기틀도 제대로 잡히지 않고 해야 할 일은 많은 건국 초기에 조금이라도 친일 의심이 가는 사람은 다 잡아들여 조사하고 재판하다 보면 부족한 검찰, 경찰, 법조 인력들이 수년간 거기에만 매달릴 수 밖에 없어 다른 치안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김구신익희 같은 분들은 "일제시대에 국내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라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는데 전국민을 모두 조사하고 처벌했으면 만족했을 것인가?[10][11]


참고 자료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숙청 북한에서는 어떻게 진행되었나 《북한(北韓)》 2002년 4월호(통권 제364호) , 24~30쪽, 전체 7쪽 (북한연구소)


각주

  1. 反民族行爲處罰法 / 反民族行爲特別調査機關組織法 / 反民族行爲特別裁判部附屬機關組織法 국사편찬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2. 반민특위 조사 기록 국사편찬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3. 3.0 3.1 류석춘․김광동, 북한 친일(親日)청산론의 허구와 진실 시대정신 2013년 봄호
  4. 김창순(金昌順, 1920~2007), 북연칼럼 : 친일파 청산,북한에서는 어떻게 되었나 《북한(北韓)》 1995년 5월호(통권 제281호) , 40~46쪽, 전체 7쪽 (북한연구소)
  5. <북한관련자료1>남조선에서 인테리를 데려올때 대하여(김일성전집4)
  6. '김사량은 ... 친일작가이기도 했다'-가와무라 미나토, 문학평론가
  7. B. R. 마이어스,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 -Part 1 북한의 문화사 : 소련 점령, 1945~1948년
  8. (저자 인터뷰) “북한은 인종론에 기초한 극우정권 친일파 우대,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했다”/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 저자 B.R. 마이어스 [주간조선 2186호] 2011.12.19
    <김관후의 4·3칼럼> (51) 계엄선포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역임한 이범석 제주의 소리 2015년 08월 31일
  9. 오원철, 1999. ‘한국형 경제건설 제7권’Pp. 303-4
  10. Mark Gayn,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 [November 7, 1946 SEOUL] With characteristic bluntness, Kim Koo said: "Practically everyone in Korea is a collaborator. They all ought to be in jail."
  11.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서울, 東亞日報社, 1981) p.329 : 이 해(1945년) 12월 중순의 일이다.... 술기운 탓도 있겠지만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