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글편집 요약 없음
잔글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1번째 줄:
해방 후 북한의 토지개혁은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직후인 3월 5일 단행되었다.
해방 후 북한의 토지개혁은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직후인 3월 5일 단행되었다.


 
==북한 토지개혁의 시행 과정==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20208&tabId=01&levelId=hm_157_0010 1946년 북조선 토지 개혁에 대한 법령(北朝鮮土地改革에 대한 法令) : 1946년 3월 5일]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20208&tabId=01&levelId=hm_157_0010 1946년 북조선 토지 개혁에 대한 법령(北朝鮮土地改革에 대한 法令) : 1946년 3월 5일]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 토지개혁으로 김일성의 권력기반이 장악된 이후에야 비로소 〈북조선현물세령(北朝鮮現物稅令)〉(1946.6.27)을 공포<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303100060&page=21 孫世一의 비교 評傳 (10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李博士 덕분에 쌀밥 먹게 되었다”] 월간조선 2013년 3월호</ref>
* 토지개혁으로 김일성의 권력기반이 장악된 이후에야 비로소 〈북조선현물세령(北朝鮮現物稅令)〉(1946.6.27)을 공포




현물세는 수확량의 25% 였다. 여기에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6301 애국미헌납운동(愛國米獻納運動)] 등의 구실로 울며 겨자먹기로 추가로 납부해야 하는 부담까지 고려하면 지주에게 내던 소작료보다 나을게 없었다.
현물세는 수확량의 25% 였다. 여기에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6301 애국미헌납운동(愛國米獻納運動)] 등의 구실로 울며 겨자먹기로 추가로 납부해야 하는 부담까지 고려하면 지주에게 내던 소작료보다 나을게 없었다.


남한 좌파들은 소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완벽한 개혁이라며 찬양해 마지 않지만 내막은 참담하다. 무상분배라지만 토지의 매매나 소작등 소유권 행사가 금지되어 있어 사실상 경작권만 받은데다 조세부담도 커서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 주민이 매년 내는 현물세에 준하는 연간 소출의 30%씩을 5년간만 내면 토지의 소유권까지 완벽하게 가질 수 있었던 남한의 개혁과는 비할 바도 못된다.  
남한 좌파들은 소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완벽한 개혁이라며 찬양해 마지 않지만 내막은 참담하다. 무상분배라지만 토지의 매매나 소작등 소유권 행사가 금지되어 있어 사실상 경작권만 받은데다 조세부담도 커서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 주민이 매년 내는 현물세에 준하는 연간 소출의 30%씩을 5년간만 내면 토지의 소유권까지 완벽하게 가질 수 있었던 남한의 개혁과는 비할 바도 못된다.<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303100060&page=21 孫世一의 비교 評傳 (10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李博士 덕분에 쌀밥 먹게 되었다”] 월간조선 2013년 3월호</ref>


무상분배라던 토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몰수 당하고, 농민들은 개인 땅은 한 평도 없이 집단농장의 고용원으로 전락하였다.
무상분배라던 토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몰수 당하고, 농민들은 개인 땅은 한 평도 없이 집단농장의 고용원으로 전락하였다.
==토지개혁은 소련이 입안==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토는 경작하는 농민에게"라는 슬로선 아래 김일성이 단행한 것으로 선전되었지만, 처음부터 철저히 소련이 계획한 것이었다.
* [http://waks.aks.ac.kr/dir/searchView.aspx?qType=0&secType=%EA%B8%B0%ED%83%80%EC%9E%90%EB%A3%8C&sType=&sWord=%ED%86%A0%EC%A7%80%EA%B0%9C%ED%98%81&dataID=R222@AKS-2013-KFR-1230004_DES 북조선 토지개혁 시행 제안] 발신자 로마넨코 / 발신일: 1945.11./ 수신일: 1945.11.
* 토지개혁을 제안하는 [[쉬킨 보고서]] : 1945년 12월 25일
* [http://waks.aks.ac.kr/dir/achieveView.aspx?secType=%EA%B8%B0%ED%83%80%EC%9E%90%EB%A3%8C&dirCate=&sType=&sWord=&fq=%ED%86%B5%ED%95%A9%EA%B3%BC%EC%A0%9CID_ext%3aAKS-2013-KFR-1230004&dataID=R166@AKS-2013-KFR-1230004_DES 1946년 2월 메레쯔코프, 시티코프가 몰로토프, 불가닌에게 보낸 북조선 토지개혁에 대한 보고서] [https://en.wikipedia.org/wiki/Vyacheslav_Molotov Vyacheslav Molotov(1890~1986)] [https://en.wikipedia.org/wiki/Nikolai_Bulganin Nikolai Bulganin(1895~1975)]
* [http://waks.aks.ac.kr/dir/achieveView.aspx?secType=%EA%B8%B0%ED%83%80%EC%9E%90%EB%A3%8C&dirCate=&sType=&sWord=&fq=%ED%86%B5%ED%95%A9%EA%B3%BC%EC%A0%9CID_ext%3aAKS-2013-KFR-1230004&dataID=R085@AKS-2013-KFR-1230004_DES 메레쯔코프, 시티코프에게 보낸 북조선 토지개혁 관련 보고 전문] 1946.03.09.  발신자 레베데프


==각주==
==각주==

2018년 10월 2일 (화) 13:02 판

해방 후 북한의 토지개혁은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직후인 3월 5일 단행되었다.

북한 토지개혁의 시행 과정


현물세는 수확량의 25% 였다. 여기에다 애국미헌납운동(愛國米獻納運動) 등의 구실로 울며 겨자먹기로 추가로 납부해야 하는 부담까지 고려하면 지주에게 내던 소작료보다 나을게 없었다.

남한 좌파들은 소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완벽한 개혁이라며 찬양해 마지 않지만 내막은 참담하다. 무상분배라지만 토지의 매매나 소작등 소유권 행사가 금지되어 있어 사실상 경작권만 받은데다 조세부담도 커서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 주민이 매년 내는 현물세에 준하는 연간 소출의 30%씩을 5년간만 내면 토지의 소유권까지 완벽하게 가질 수 있었던 남한의 개혁과는 비할 바도 못된다.[1]

무상분배라던 토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몰수 당하고, 농민들은 개인 땅은 한 평도 없이 집단농장의 고용원으로 전락하였다.


토지개혁은 소련이 입안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토는 경작하는 농민에게"라는 슬로선 아래 김일성이 단행한 것으로 선전되었지만, 처음부터 철저히 소련이 계획한 것이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