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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aks.aks.ac.kr/dir/achieveView.aspx?secType=%EA%B8%B0%ED%83%80%EC%9E%90%EB%A3%8C&dirCate=&sType=&sWord=&fq=%ED%86%B5%ED%95%A9%EA%B3%BC%EC%A0%9CID_ext%3aAKS-2013-KFR-1230004&dataID=R108@AKS-2013-KFR-1230004_DES 여운형이 북쪽에 보내는 좌우합작 계획] 1946.12.15.
* [http://waks.aks.ac.kr/dir/achieveView.aspx?secType=%EA%B8%B0%ED%83%80%EC%9E%90%EB%A3%8C&dirCate=&sType=&sWord=&fq=%ED%86%B5%ED%95%A9%EA%B3%BC%EC%A0%9CID_ext%3aAKS-2013-KFR-1230004&dataID=R108@AKS-2013-KFR-1230004_DES 여운형이 북쪽에 보내는 좌우합작 계획] 1946.12.15.
: 소련 측에 온갖 제안을 하며 반탁을 빌미로 이승만과 김구의 제거까지 논의하고 있다. 여운형 본인도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해 놓고서는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 소련 측에 온갖 제안을 하며 반탁을 빌미로 이승만과 김구의 제거까지 논의하고 있다. 여운형 본인도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해 놓고서는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각주==
<references/>

2018년 10월 1일 (월) 21:46 판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가, 언론인이었고, 해방 후 좌파 노선을 택한 정치인이다.

여운형의 친소 좌파 노선

해방 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남한에서 활동하면서도 미국보다는 소련에 더 가까운 행동을 보였고, 이승만, 김구보다는 김일성을 더 신뢰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앙숙의 관계였던 것만 제외하면 거의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박헌영은 포기하고, 여운형을 소련 및 김일성과 분리시켜 김규식과의 좌우 합작을 추진했으나 여운형의 피살로 수포로 돌아갔다. [1]


소련 측에 온갖 제안을 하며 반탁을 빌미로 이승만과 김구의 제거까지 논의하고 있다. 여운형 본인도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해 놓고서는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