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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당시 여운형의 역할==
==자유시 참변 당시 여운형의 역할==
[[자유시참변]] 당시 여운형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당 대표였고<ref>이주천, [http://mahan.wonkwang.ac.kr/jucheon/Columns/column4-2.htm 제6주제: 해방전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시작 ―러시아와 중국을 중심으로―]  1997/9/27  선택지 11월호 원고 </ref>, 참변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자유시참변]] 당시 여운형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당 대표였고<ref>이주천, [http://mahan.wonkwang.ac.kr/jucheon/Columns/column4-2.htm 제6주제: 해방전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시작 ―러시아와 중국을 중심으로―]  1997/9/27  선택지 11월호 원고 </ref>, 참변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신탁통치 반대에서 찬성으로 선회==
여운형은 신탁통치안이 처음 알려진 1945년 말에는 반탁을 주장하였으나<ref>[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29_019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탁치배격담화 발표]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ref>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1월 2일 새해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ref>[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2_008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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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aks.aks.ac.kr/dir/achieveView.aspx?secType=%EA%B8%B0%ED%83%80%EC%9E%90%EB%A3%8C&dirCate=&sType=&sWord=&fq=%ED%86%B5%ED%95%A9%EA%B3%BC%EC%A0%9CID_ext%3aAKS-2013-KFR-1230004&dataID=R108@AKS-2013-KFR-1230004_DES 여운형이 북쪽에 보내는 좌우합작 계획] 1946.12.15.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aks.aks.ac.kr/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 [http://waks.aks.ac.kr/dir/achieveView.aspx?secType=%EA%B8%B0%ED%83%80%EC%9E%90%EB%A3%8C&dirCate=&sType=&sWord=&fq=%ED%86%B5%ED%95%A9%EA%B3%BC%EC%A0%9CID_ext%3aAKS-2013-KFR-1230004&dataID=R108@AKS-2013-KFR-1230004_DES 여운형이 북쪽에 보내는 좌우합작 계획] 1946.12.15.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aks.aks.ac.kr/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 소련 측에 온갖 제안을 하며 반탁을 빌미로 이승만과 김구의 제거까지 논의하고 있다. 여운형 본인도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해 놓고서는<ref>[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29_019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탁치배격담화 발표]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ref>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 소련 측에 온갖 제안을 하며 반탁을 빌미로 이승만과 김구의 제거까지 논의하고 있다. 여운형 본인도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해 놓고서는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9/13/106694/1 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 “미군정 행정장관 수락하러 가는 길에 좌익이 사주한 테러 당해”] 신동아 2007년 9월호 2007-09-10
*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9/13/106694/1 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 “미군정 행정장관 수락하러 가는 길에 좌익이 사주한 테러 당해”] 신동아 2007년 9월호 2007-09-10

2018년 10월 2일 (화) 09:15 판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가, 언론인이었고, 해방 후 좌파 노선을 택한 정치인이다.


자유시 참변 당시 여운형의 역할

자유시참변 당시 여운형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당 대표였고[1], 참변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신탁통치 반대에서 찬성으로 선회

여운형은 신탁통치안이 처음 알려진 1945년 말에는 반탁을 주장하였으나[2]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1월 2일 새해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3]


여운형의 친소 좌파 노선

해방 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남한에서 활동하면서도 미국보다는 소련에 더 가까운 행동을 보였고, 이승만, 김구보다는 김일성을 더 신뢰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앙숙의 관계였던 것만 제외하면 거의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박헌영은 포기하고, 여운형을 소련 및 김일성과 분리시켜 김규식과의 좌우 합작을 추진했으나 여운형의 피살로 수포로 돌아갔다.[4]


소련 측에 온갖 제안을 하며 반탁을 빌미로 이승만과 김구의 제거까지 논의하고 있다. 여운형 본인도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해 놓고서는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