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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의 친소 좌파 노선==
==친소 좌파 노선의 정치 활동==
해방 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남한에서 활동하면서도 미국보다는 소련에 더 가까운 행동을 보였고, [[이승만]], 김구보다는 [[김일성]]을 더 신뢰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앙숙의 관계였던 것만 제외하면 거의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남한에서 활동하면서도 미국보다는 소련에 더 가까운 행동을 보였고, [[이승만]], 김구보다는 [[김일성]]을 더 신뢰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앙숙의 관계였던 것만 제외하면 거의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8년 10월 2일 (화) 09:24 판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가, 언론인이었고, 해방 후 좌파 노선을 택한 정치인이다.


자유시 참변 당시 여운형의 역할

자유시참변 당시 여운형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당 대표였고[1], 참변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신탁통치 반대에서 찬성으로 선회

여운형은 신탁통치안이 처음 알려진 1945년 말에는 반탁을 주장하였으나[2]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1월 2일 새해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3]

1월 14일에는 탁치문제로 대중이 분열한 죄과는 자신에게 많다며 지도자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4]


친소 좌파 노선의 정치 활동

해방 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남한에서 활동하면서도 미국보다는 소련에 더 가까운 행동을 보였고, 이승만, 김구보다는 김일성을 더 신뢰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앙숙의 관계였던 것만 제외하면 거의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박헌영은 포기하고, 여운형을 소련 및 김일성과 분리시켜 김규식과의 좌우 합작을 추진했으나 여운형의 피살로 수포로 돌아갔다.[5]


소련 측에 온갖 제안을 하며 반탁을 빌미로 이승만과 김구의 제거까지 논의하고 있다. 여운형 본인도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해 놓고서는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