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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소 좌파 노선의 정치 활동==
==친소 좌파 노선의 정치 활동==
해방 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남한에서 활동하면서도 미국보다는 소련에 더 가까운 행동을 보였고, [[이승만]], 김구보다는 [[김일성]]을 더 신뢰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앙숙의 관계였던 것만 제외하면 거의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남한에서 활동하면서도 미국보다는 소련에 더 가까운 행동을 보였고, [[이승만]], 김구보다는 [[김일성]]을 더 신뢰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앙숙의 관계였던 것만 제외하면 해방 후에도 거의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박헌영은 포기하고, 여운형을 소련 및 김일성과 분리시켜 김규식과의 좌우 합작을 추진했으나 여운형의 피살로 수포로 돌아갔다.<ref>[http://db.history.go.kr/id/npfp_1946_08_28_v0001_0030 金·呂 양씨에 서한, 하지중장 좌우합작에 기대] <자유신문> 8월 28일자<br>  [http://db.history.go.kr/id/npda_1946_08_28_x0001_0050 合作努力에 큰 關心 「하」將軍, 金, 呂兩氏에 親書<nowiki>[肖]</nowiki> ] <동아일보>  1946년 08월 28일 석간 01면<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608280020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6-08-28&officeId=00020&pageNo=1&printNo=7066&publishType=00020 合作努力(합작노력)에큰關心(관심) 하將軍(장군)·金呂両氏(김려양씨)에親書(친서)<nowiki>[肖]</nowiki> ]" <동아일보>  1946년 08월 28일 석간 01면</ref>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박헌영은 포기하고, 여운형을 소련 및 김일성과 분리시켜 김규식과의 좌우 합작을 추진했으나 여운형의 피살로 수포로 돌아갔다.<ref>[http://db.history.go.kr/id/npfp_1946_08_28_v0001_0030 金·呂 양씨에 서한, 하지중장 좌우합작에 기대] <자유신문> 8월 28일자<br>  [http://db.history.go.kr/id/npda_1946_08_28_x0001_0050 合作努力에 큰 關心 「하」將軍, 金, 呂兩氏에 親書<nowiki>[肖]</nowiki> ] <동아일보>  1946년 08월 28일 석간 01면<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60828002092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6-08-28&officeId=00020&pageNo=1&printNo=7066&publishType=00020 合作努力(합작노력)에큰關心(관심) 하將軍(장군)·金呂両氏(김려양씨)에親書(친서)<nowiki>[肖]</nowiki> ]" <동아일보>  1946년 08월 28일 석간 01면</ref>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에는 버취(Leonard M. Bertsch) 중위가 깊이 관여하였다.<ref>[http://archive.history.go.kr/id/AUS005_06_03V0000_771 American Members of the Political Advisory Group of the US-USSR Joint Commission Attending the Commission Meeting at the Duk Soo Palace<nowiki>[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정치고문단의 미국측 인사들 : 1947.06.15]</nowiki>] 사진의 오른 쪽에서 두번째가 Bertsch 중위</ref>





2018년 10월 2일 (화) 09:53 판

여운형(呂運亨, 1886년 5월 25일 ~ 1947년 7월 19일)은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가, 언론인이었고, 해방 후 좌파 노선을 택한 정치인이다.


자유시 참변 당시 여운형의 역할

자유시참변 당시 여운형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당 대표였고[1], 참변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신탁통치 반대에서 찬성으로 선회

여운형은 신탁통치안이 처음 알려진 1945년 말에는 반탁을 주장하였으나[2]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1월 2일 새해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3]

1월 14일에는 탁치문제로 대중이 분열한 죄과는 자신에게 많다며 지도자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4]


친소 좌파 노선의 정치 활동

해방 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남한에서 활동하면서도 미국보다는 소련에 더 가까운 행동을 보였고, 이승만, 김구보다는 김일성을 더 신뢰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앙숙의 관계였던 것만 제외하면 해방 후에도 거의 공산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박헌영은 포기하고, 여운형을 소련 및 김일성과 분리시켜 김규식과의 좌우 합작을 추진했으나 여운형의 피살로 수포로 돌아갔다.[5]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에는 버취(Leonard M. Bertsch) 중위가 깊이 관여하였다.[6]


소련 측에 온갖 제안을 하며 반탁을 빌미로 이승만과 김구의 제거까지 논의하고 있다. 여운형 본인도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해 놓고서는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