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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신문의 보도
다른 신문들도 유사한 내용의 보도를 했으나, 신문의 좌우파 정치적 성향에 따라 논조는 차이를 보인다.<ref>[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63247085 民族統一機關을 設置, 全州서 李承晩博士講演.] 獨立新報 1946년 06월 05일 1면</ref><ref>[http://db.history.go.kr/id/npfp_1946_06_05_v0001_0030 대표적 민족통일 기관을, 李承晩 박사 井邑서 중대 강연] 자유신문 1946년 06월 05일 1면</ref><ref>[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65299029 民族分裂의 單獨政府, 李承晩博士井邑서 大衆에 絶叫.] 중앙신문, 1946.06.05</ref>
*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63247085 民族統一機關을 設置, 全州서 李承晩博士講演.] 獨立新報 1946년 06월 05일 1면
* [http://db.history.go.kr/id/npfp_1946_06_05_v0001_0030 대표적 민족통일 기관을, 李承晩 박사 井邑서 중대 강연] 자유신문 1946년 06월 05일 1면
*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65299029 民族分裂의 單獨政府, 李承晩博士井邑서 大衆에 絶叫.] 중앙신문, 1946.06.05
 





2018년 9월 3일 (월) 12:44 판

이승만이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만의 임시정부라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처음 제기한 발언이다. 당시 북한에는 사실상의 정부조직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하고, 공산화 정책인 무상몰수의 토지개혁 등을 이미 단행했으며, 서울서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는 등 분단이 이미 현실화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누구도 공개적으로 그런 발언을 하기는 꺼려할 때였고, 이승만은 그 발언 때문에 비판도 많이 받았다. 오늘날 종북화된 역사학계에서는 그 발언으로 분단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한다.

발언 당시의 상황

이승만의 발언 당시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9일 사실상의 정부조직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하고, 3월 5일에 공산화 정책인 무상몰수의 토지개혁 등을 이미 단행했다. 5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는 등 분단이 이미 현실화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소련이 북한에 단독의 공산정권을 세우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이므로, 이러한 현실에서 남한의 대응 방안을 제시했을 뿐이다. 당시 이승만은 유력 정치인 중의 한명일 뿐 김일성처럼 권력을 가진 당사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단순한 개인적 의견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미군정청도 그 발언에 반대의사를 표명했으므로 미군정의 정책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다. 후일에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것을 빌미로 좌파 역사학자들이 교묘하게 발언 당시에도 이승만이 마치 권력자였던 것으로 혼동하도록 하여, 이승만의 정읍 발언 때문에 분단이 된 것처럼 그를 분단의 주범으로 몰아가는 것은 넌센스이다.

미군정은 이승만보다는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 정권에 관심을 가지고 추진했으나,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어 수포로 돌아가고, 그 무렵 열렸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되자, 정부수립 문제를 UN으로 가져가게 되므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이후의 정국 추이에 실제로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언론에 보도된 발언의 내용

이승만, 정읍환영강연회에서 단정수립 필요성 주장 (李承晩, 井邑歡迎講演會에서 單政樹立 必要性 主張) : 1946년 06월 03일

정읍 환영 강연회(井邑歡迎講演會)에 임석한 이승만(李承晩)은 공위 재개(共委 再開)의 가망이 없는 경우의 남조선 임시정부 수립(南朝鮮臨時政府樹立)과 민족주의 통일기관 설치(民族主義統一機關設置)에 관하여 주목되는 연설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共委)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統一政府)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南方)만이라도 임시정부(臨時政府) 혹은 위원호(委員會)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蘇聯)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民族統一機關設置)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統一機關)을 귀경(歸京)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中央)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서울신문 1946년 06월 04일》

공위(共委) :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다른 신문들도 유사한 내용의 보도를 했으나, 신문의 좌우파 정치적 성향에 따라 논조는 차이를 보인다.[1][2][3]


이승만, 남조선단정설에 관해 기자회견 : 1946년 06월 04일

이승만(李承晩)은 4일 하오 3시 반 기자단과 회견하고 작일 정읍(井邑)에서 행한 연설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1문 1답을 하였다.
문(問) : 작일 정읍(井邑)에서 연설한 가운데 남조선(南朝鮮)만의 정부(政府) 운운(云云)의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南朝鮮單獨政府樹立)을 의미하는 것인가?
답(答) : 내 생각으로 말한 것인데 남방(南方)에서 만이라도 무슨 조직이 있기를 일반민중(一般民衆)이 희망하고 있다.
문(問) : 금반 귀경(歸京)하여 민족통일기관(民族統一機關)을 설치한다 하였는데 구성은 어떠한가?

답(答) : 작년 10월에는 72단체를 합동해서 통일(統一)을 형성하였던 것인데 그 후에 새 단체가 생겨서 원만한 결과를 보지 못하므로 부득이하여 다시 협의적(協議的)으로 통일전선(統一戰線)의 성취를 희망한다.
《서울신문 1946년 06월 06일》

미군정청의 대응 발언

러취, 이승만의 단정설 등 당면문제에 대해 기자회견 : 1946년 06월 11일

군정장관(軍政長官) 러취 소장(小將)과 군정청 출입기자단(軍政廳出入記者團)과의 정례회견이 있었는데 그 석상에서 기자단으로부터 (1) 이승만(李承晩)박사(博士)는 지난 3일 정읍(井邑)에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무기 휴회된 이후 재개될 기색은 보이지 않으므로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臨時政府) 혹은 위원회(委員會)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을 언명하였는데, 세칭 민주의원(民主議院)과 군정당국(軍政當局)에서 남조선 단정 수립(南朝鮮單獨政府樹立)에 관한 계획이 있다고 전하는 이때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장(議長)으로서의 이박사(李博士)의 이러한 강연은 그 계획실현에 어느 단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2) 來 7월 중에 군정청(軍政廳) 전 행정부문(全 行政部門)을 전면적으로 조선인(朝鮮人)에게 이관한다는 말이 있고, 또 현재 행정관(行政官)으로 있는 미군장교(美軍將校)는 다수 귀국한다는 말이 있는데 장관(長官)의 의견은 어떠한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나는 이박사(李博士)가 어떠한 말을 하였는지는 모른다. 만일 이박사(李博士)가 남조선(南朝鮮)에 따로 정부를 세워야 된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 군정청(軍政廳)을 위해서 한 말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직접 이박사(李博士)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 줄로 생각한다. 나는 군정장관(軍政長官)으로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南朝鮮單獨政府樹立)에 대해서는 전연 반대한다.

내가 아는 한에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계획도 없다는 것 이에는 아무 것도 근거없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착임(着任)한 이래 미군장교(美軍將校)는 늘 감원되어 왔다. 나는 조선인(朝鮮人)이 맡아볼 수 있는 일은 전부 조선인(朝鮮人)에게 맡기라는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도 미군장교(美軍將校)의 귀국(歸國)이 점차로 늘겠으나 일시에 복원(復員)될 수는 없으며 일방 미국(美國)으로부터 그리 많지는 않으나 내조(來朝)할 사람도 있겠으므로 그것은 오설(誤說)이다.
《서울신문 1946년 06월 11일》

후대의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