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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습격사건(土城襲擊事件)은 1934년 1월 23일 밤 0시 5분 만주의 공산군 300여명이 평북 자성군 토성(平北 慈城郡 土城)을 습격한 사건을 말한다.
토성습격사건(土城襲擊事件)은 1934년 1월 23일 밤 0시 5분 만주의 공산군 300여명이 평북 자성군 토성(平北 慈城郡 土城)을 습격한 사건을 말한다.
북한은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보천보 습격 사건]]을 [[김일성]]의 엄청나게 중요한 항일전공으로 선전하고, 남한의 좌파 학자들도 항일무장투쟁이 끊어진 줄 알던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조선인들이 독립에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둥 하면서 부풀려 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규모였던 1935년 2월 13일의 [[동흥습격사건]]도 있었고, 1934년 1월 23일의 토성습격사건도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큰 규모였다. 하지만 이런 두 사건이 [[보천보 사건]]의 명성(?)을 가릴까보아 남북한 어디에서도 거론조차 하지 않아 잊혀져 있다.
[[동흥습격사건]]과 토성습격사건을 보면 [[보천보 사건]]이 남북한 모두에서 얼마나 터무니 없이 과장되어 선전되는지 알 수 있다.


==당시의 신문 보도==
==당시의 신문 보도==

2020년 7월 3일 (금) 12:11 판

토성습격사건(土城襲擊事件)은 1934년 1월 23일 밤 0시 5분 만주의 공산군 300여명이 평북 자성군 토성(平北 慈城郡 土城)을 습격한 사건을 말한다.

북한은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습격 사건김일성의 엄청나게 중요한 항일전공으로 선전하고, 남한의 좌파 학자들도 항일무장투쟁이 끊어진 줄 알던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조선인들이 독립에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둥 하면서 부풀려 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규모였던 1935년 2월 13일의 동흥습격사건도 있었고, 1934년 1월 23일의 토성습격사건도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큰 규모였다. 하지만 이런 두 사건이 보천보 사건의 명성(?)을 가릴까보아 남북한 어디에서도 거론조차 하지 않아 잊혀져 있다.

동흥습격사건과 토성습격사건을 보면 보천보 사건이 남북한 모두에서 얼마나 터무니 없이 과장되어 선전되는지 알 수 있다.

당시의 신문 보도

共產軍三百餘名(공산군삼백여명)이 慈城土城村(자성토성촌)을襲擊(습격) 1934.01.24 동아일보 (23일)석간 2면
民家六戶燒却(민가육호소각) 共軍一名(공군일명)은射殺(사살) / 鴨綠江岸一帶(압록강안일대)를 嚴重(엄중)히警戒中(경계중)
兩方(양방)의死者七名(사자칠명) 1934-01-24 동아일보 조간 2면
馬賊二百名(마적이백명)이 또慈城襲擊說(자성습격설) 1934.02.06 동아일보 2면
土城襲來の匪賊を發見して急襲す, 福崎大尉以下の追擊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01월 27일
近寄る匪賊共には手榴彈が欲しいもの, 土城事件の實例に鑑みて痛切と丹下平北警察部長語る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02월 17일
대안의 비적, 토성[土城]에 침입 부산일보[釜山日報] 1934년 01월 25일

주요 기사 원문 이미지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