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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보도에는 침입한 병력의 수는 300여명이라 하였고, 두목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 당시 신문보도에는 침입한 병력의 수는 300여명이라 하였고, 두목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 ||
왕전양(王殿陽)은 1934년 11월말 귀순했다고 당시 신문에 | 1933년 12월 중순 임강현(臨江縣) 서방에 왕전양의 부대 400여명이 있다고 하였다.<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121300209202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12-13&officeId=00020&pageNo=2&printNo=4672&publishType=00020 臨江縣西方(임강현서방) 反滿軍員數(반만군원수)] 1933.12.13 동아일보 2면</ref><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121300209202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12-13&officeId=00020&pageNo=2&printNo=4672&publishType=00020 反滿軍(반만군)과提携(제휴)하야 朝鮮(조선)○○團活動(단활동)] 1933.12.13 동아일보 2면</ref> | ||
왕전양(王殿陽)은 1934년 11월말 귀순했다고 당시 신문에 보도되었으나 사살 당했다.<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4120500209202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4-12-05&officeId=00020&pageNo=2&printNo=5029&publishType=00020 反滿軍巨頭(반만군거두) 王殿陽射殺(왕전양사살) 石棚子附近(석붕자부근)서] 1934.12.05 동아일보 2면</ref><ref>[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id=CNTS-00109075092 又も散る桐一葉, 匪賊討伐着着進み王殿陽遂に歸順, 王道樂土の理想鄕建設近き滿洲國]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11월 17일 3면 1단</ref><ref>[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id=CNTS-00109078841 秘中の秘, 匪首“王殿陽”歸順顚末を語る, 高橋守備隊長と會見約二千の歸順を見ん]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11월 30일 3면 3단</ref><ref>[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id=CNTS-00093567354 ◈滿軍의 頭目 王殿陽被捉說]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34년 11월 29일 2면 4단</ref> | |||
==당시의 신문 보도== | ==당시의 신문 보도== |
2020년 7월 3일 (금) 16:06 판
토성습격사건(土城襲擊事件)은 1934년 1월 22일 밤 11시 30분 (또는 1월 23일 새벽 0시 5분이라고도 함.) 만주의 공산군 300여명이 평북 자성군 장토면 토성동(平北 慈城郡 長土面 土城洞)[1][2]을 습격한 사건을 말한다.
북한은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습격 사건을 김일성의 엄청나게 중요한 항일전공으로 선전하고, 남한의 좌파 학자들도 항일무장투쟁이 끊어진 줄 알던 시기에 일어난 보천보 사건으로 조선인들이 독립에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둥 하면서 부풀려 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규모였던 1935년 2월 13일의 동흥습격사건도 있었고, 1934년 1월 23일의 토성습격사건도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큰 규모였다. 하지만 이런 두 사건이 보천보 사건의 명성(?)을 가릴까보아 남북한 어디에서도 거론조차 하지 않아 잊혀져 있다.
동흥습격사건과 토성습격사건을 보면 보천보 사건을 남북한 모두에서 얼마나 터무니 없이 과장하여 선전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남한의 좌파들은 흔히 보천보 사건 당시 동아일보가 호외를 발행한 때문에 이 사건과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토성습격사건은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매일신보도 같은 날 호외를 발행하여 보도했음에도[3][4] 완전히 잊혀져 있으므로 이런 주장이 거짓말이라는 것도 밝혀진다.
개요
이 사건의 대체적인 경과는 아래와 같다.[5]
(同書, 25面 以下).
당시 신문보도에는 침입한 병력의 수는 300여명이라 하였고, 두목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1933년 12월 중순 임강현(臨江縣) 서방에 왕전양의 부대 400여명이 있다고 하였다.[7][8] 왕전양(王殿陽)은 1934년 11월말 귀순했다고 당시 신문에 보도되었으나 사살 당했다.[9][10][11][12]
당시의 신문 보도
- 三百餘의 大匪賊團 昨夜中江鎭에 侵入 放火와 掠奪의 警急을 듯고 警官과 守備隊가 出動擊退 매일신보[每日申報] 1934년 01월 24일 석간 7면
- 中江鎭管內匪賊侵入後報 賊團은 大刀會匪 住民六名이 被殺 돈도 三백五十원을 앗겻다 沍寒의 國境極度로 緊張 매일신보[每日申報] 1934년 01월 25일 7면 8단
- 平北慈城郡土城(평북자성군토성)을 共軍三百名(공군삼백명)이 襲擊(습격) 1934.01.23 동아일보 호외 1면
- 共產軍三百餘名(공산군삼백여명)이 慈城土城村(자성토성촌)을襲擊(습격) 1934.01.24 동아일보 (23일)석간 2면
- 民家六戶燒却(민가육호소각) 共軍一名(공군일명)은 射殺(사살) / 鴨綠江岸一帶(압록강안일대)를 嚴重(엄중)히警戒中(경계중)
- 兩方(양방)의死者七名(사자칠명) 1934-01-24 동아일보 조간 2면
- 馬賊二百名(마적이백명)이 또慈城襲擊說(자성습격설) 1934.02.06 동아일보 2면
- 馬賊團!鮮內侵入, 土城駐在所を襲擊, 一部は部落に放火掠奪を開始, 一時間の交戰で擊退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01월 24일
- 土城襲來の匪賊を發見して急襲す, 福崎大尉以下の追擊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01월 27일
- 平安北道, 土城事件以來匪賊の跳梁甚だし, 渭原署で嚴重に警戒對岸の避難民新川へ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02월 02일
- 近寄る匪賊共には手榴彈が欲しいもの, 土城事件の實例に鑑みて痛切と丹下平北警察部長語る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02월 17일
- 대안의 비적, 토성[土城]에 침입 부산일보[釜山日報] 1934년 01월 25일
주요 기사 원문 이미지
참고 자료
-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연구소, 1987) pp.427~428.
- 九一八事變之後讓日軍近似瘋狂的傳奇人物 : 王殿陽 每日頭條 2017-12-06
- 抗日英雄王殿阳 —— 阳岔故事之七 通化日报 2019.4.10
함께 보기
각주
- ↑ 자성군(慈城郡)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현재의 자강도 중강군 토성리이다 : 토성동 - 북한지역정보넷
- ↑ 만주 공산군의 토성습격사건을 보도한 1934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 호외
- ↑ 토성습격사건을 보도한 1934년 1월 24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 : 기사 말미에 호외의 내용을 재록한다고 하였다.
- ↑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연구소, 1987) pp.427~428.
- ↑ 抗日英雄王殿阳 —— 阳岔故事之七 通化日报 2019.4.10
- ↑ 臨江縣西方(임강현서방) 反滿軍員數(반만군원수) 1933.12.13 동아일보 2면
- ↑ 反滿軍(반만군)과提携(제휴)하야 朝鮮(조선)○○團活動(단활동) 1933.12.13 동아일보 2면
- ↑ 反滿軍巨頭(반만군거두) 王殿陽射殺(왕전양사살) 石棚子附近(석붕자부근)서 1934.12.05 동아일보 2면
- ↑ 又も散る桐一葉, 匪賊討伐着着進み王殿陽遂に歸順, 王道樂土の理想鄕建設近き滿洲國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11월 17일 3면 1단
- ↑ 秘中の秘, 匪首“王殿陽”歸順顚末を語る, 高橋守備隊長と會見約二千の歸順を見ん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11월 30일 3면 3단
- ↑ ◈滿軍의 頭目 王殿陽被捉說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34년 11월 29일 2면 4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