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p.79의 한영애(韓英愛, 1915~1951) 사진.

한영애(韓英愛, 1915[1]~1951.08.24[2])는 1930년 무렵 북한 김일성(1912~1994)의 첫 애인이었다.


김일성의 첫 애인 한영애(韓英愛)

  • 1930년 무렵에 김일성의 첫 애인으로 한영애(韓英愛, 1915~1951)가 있었다.[3][4][5]
주목받는 북 형제 영화인 (사진) 연합뉴스 2004.11.18. 오전 8:33
    18일 입수된 북한 예술잡지 '조선예술' 9월호에 따르면 이들 형제는 지난해 말 제작된 영화 '고귀한 이름'(2부작)의 시나리오와 감독을 맡았다.

    이 영화는 1920년대 말 고(故) 김일성 주석과 함께 반일지하투쟁을 했던 한영애(여)라는 실제 인물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한영애는 김 주석과 함께 반일투쟁을 했던 일부 사람들이 김 주석을 배신하고 일제의 귀순공작에 참여했지만 끝까지 지조를 지켰으며 광복 이후에도 김 주석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을 찾을 수 없었던 한영애는 서울에서 결혼하였는데 남조선 노동당 당원이었던 그의 남편이 김일성이 일으킨 6.25남침 전쟁에서 희생되었고 한영애도 평양에 왔다가 1951년 8월 14일 밤에 폭격으로 두 아이와 함께 희생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한영애가 남편이 피살된 후에는 나를 찾아간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왔으나 나를 만나지 못하고 1951년 8월 14일 밤 적들의 폭격에 두 아이와 함께 애석하게도 희생되었다”고 한 내용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김일성은 한영애를 회고하면서 “그가 평양까지 들어왔다가 나를 만나보지 못하고 폭격에 희생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청춘 시절에 큰 자국을 남긴 한영애의 아름다운 넋을 사진에서 찾으며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리곤 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김일성 회고록의 한영애 기록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장의 "7절 1930년 여름"에 한영애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내용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구분은 어렵다.

1932년 한영애와 홍태식의 체포 및 석방 기사

1932년 5월 7일 만주 하얼빈(哈爾濱, 哈尔滨)에서 중국공산당원 임무심(林筮心, 22세), 오춘성(吳春成, 20세), 홍태식(洪台植, 33세), 조철구(趙喆九, 24세), 이대우(李大雨, 24세), 한영극(韓永極, 25세)과 여자 한영애(韓英愛, 18세) 등 7명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6월 27일 안동현(安東縣)[6]을 경유하여 신의주서에 인도되었다. 이들은 이(李) 사법주임의 엄중한 취조를 받아오다 조철구, 이대우, 한영극 및 한영애등 4명은 7월 4일 석방되었고, 임무심, 오춘성 및 홍태식 등 3명은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모리우라(森浦) 사상검사의 심문을 받았으나 이들도 7월 12일까지 전후하여 모두 석방되었다. 이들 7명은 모두 징역등 형사처벌은 면했으나 만주에서 이미 재류금지(在留禁止)의 선고를 받았으므로[7] 갈데가 없어 관서여관(關西旅館)에 유숙(留宿) 중이라 하였다.

홍태식과 홍명희 및 홍기문과의 관계

설명

참고 자료


각주

  1. 1932년 체포될 당시 18세였다.
  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4장 "7절 1930년 여름"
  3. 김일성과 하얼빈의 인연(종합) 연합뉴스 2010-08-29 23:32
  4. 김일성과 하얼빈의 인연 : 첫 애인 한영애와 함께 도피..코민테른 접촉 연합뉴스 2010-08-29 23:03
  5. 하얼빈은 김일성이 첫 애인과 도주한 곳 조선일보 2010.08.30
  6. 1965년에 지금의 명칭 단동시(丹東市)로 개칭하였다 : 단동(丹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일본 ‘재류금지’로 독립운동 탄압 : 간도지역 거주 조선인 사상과 행동 통제 수단으로 사용 2010.10.19 위클리경향 89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