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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사건에 대한 논란==
==암살 사건에 대한 논란==
그가 암살당한 정확한 일자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28일 등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고, 북한의 묘소앞 비석에는 9월 3일로 적혀있다. 9월말이 아니라 9월초인 것은 대체로 분명해진 것같으나 북한이 주장하는 9월 3일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해방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관료로 일본인들의 철수를 돕던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 종전의기록[朝鮮終戦の記録]』<ref>森田芳夫(모리타 요시오), 『朝鮮終戰の記錄 :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東京 : 巖南堂書店, 昭和39 [1964]</ref>에는 9월 4일로 나온다.  
그가 암살당한 정확한 일자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28일 등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고, 북한의 묘소앞 비석에는 9월 3일로 적혀있다. 9월말이 아니라 9월초인 것은 대체로 분명해진 것같으나 북한이 주장하는 9월 3일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해방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관료로 일본인들의 철수를 돕던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 종전의 기록[朝鮮終戦の記録]』<ref>森田芳夫(모리타 요시오), 『朝鮮終戰の記錄 :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東京 : 巖南堂書店, 昭和39 [1964]</ref>에는 9월 4일로 나온다.  


남한에서는 암살 배후가 [[김일성]]이라는 주장이 있어왔으나 9월초에 암살 당했다면 [[김일성]]이 귀국하기 이전이므로 사실이 아닌 것이 된다. 배후가 소련군정이라는 설, 다른 국내 공산주의자라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남한에서는 암살 배후가 [[김일성]]이라는 주장이 있어왔으나 9월초에 암살 당했다면 [[김일성]]이 귀국하기 이전이므로 사실이 아닌 것이 된다. 배후가 소련군정이라는 설, 다른 국내 공산주의자라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2020년 6월 8일 (월) 14:44 판

현준혁(玄俊赫, 1906.05.13 ~ 1945.09.03)은 일제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직후 평양에서 정치활동을 개시했으나 곧바로 암살당했다.[1] 대구사범학교 교사로 재직시 박정희 전대통령의 은사였다고 한다.[2]

생애

암살 사건에 대한 논란

그가 암살당한 정확한 일자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28일 등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고, 북한의 묘소앞 비석에는 9월 3일로 적혀있다. 9월말이 아니라 9월초인 것은 대체로 분명해진 것같으나 북한이 주장하는 9월 3일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해방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관료로 일본인들의 철수를 돕던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조선 종전의 기록[朝鮮終戦の記録]』[3]에는 9월 4일로 나온다.

남한에서는 암살 배후가 김일성이라는 주장이 있어왔으나 9월초에 암살 당했다면 김일성이 귀국하기 이전이므로 사실이 아닌 것이 된다. 배후가 소련군정이라는 설, 다른 국내 공산주의자라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는 공산주의자이면서도 온건파로서 북한 주민들의 신망이 높던 조만식에 협력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암살 당한 배경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피살 당시 그는 조만식과 같은 차에 동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만식이 아닌 그를 겨냥한 암살이 일어난 이유로 보기는 어렵다. 북한 지역의 공산주의자 중에 가장 신망이 높던 그를 다른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암살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소련군 측은 굳이 그를 그렇게 일찍 암살할 이유는 없어보인다. 사태를 좀 더 지켜보다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그를 무력화시킬 수단은 많이 있었을 것이다.

참고 자료

◎고당과 함께 가다 암살당한 현준혁/적위대복장 청년이 총격/대낮 평양시내서 타고가던 트럭 습격/“민족계열과 친하다” 소 군정에 밉보여

함께 보기

각주

  1. 국내파 공산주의자 현준혁 암살사건 2018-06-12
  2. 조갑제, 박정희 전기 : 사회주의자 현준혁교사
  3. 森田芳夫(모리타 요시오), 『朝鮮終戰の記錄 :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東京 : 巖南堂書店, 昭和39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