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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848&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2043&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판결문 : 박금철(朴金喆) /박시성(朴時星)신정금철(新井金喆)]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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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도 창씨 개명한 이름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런 사람들도 창씨 개명한 이름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해방 직후 감옥에서 풀려난 박달과 박금철은 평양에 나타난 북한 김일성의 사진을 보여주니,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ref>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서당, 1991년) : 137~138쪽</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2012700209204004&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2-01-27&officeId=00020&pageNo=4&printNo=15480&publishType=00020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7)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6)] 동아일보 1972.01.27. 4면 ;<br/>조규하(曺圭河), 이경문(李庚文), 강성재(姜聲才),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고려원 1987) : 해방 직후 [https://ko.wikipedia.org/wiki/여운형 여운형]의 비서였던 [http://db.history.go.kr/id/im_108_30733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은 1945년 10월 김일성에게 여운형의 밀서를 전하러 평양으로 가던 길에 해방 후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되어 역시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가던 [https://ko.wikipedia.org/wiki/박금철 박금철(朴金喆)]과 우연히 동행하게 되어 박금철이 김일성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현장에서 보게되는데,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서 둘 중 한 사람은 가짜로 보였다고 하였다.</ref>
 


==재만한인조국광복회와 북한의 역사 날조==
==재만한인조국광복회와 북한의 역사 날조==

2018년 10월 22일 (월) 16:23 판

혜산사건(惠山事件)은 1937년 6월 4일 김일성(金日成) 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부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 마을을 습격한 소위 보천보 사건(普天堡 事件) 직후, 관련된 지하조직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 등이 적발되어 1937~8년간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된 사건을 말한다.

사건의 경과

사건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1]

검거자

제1차 1937년 10월 10일 수회
제2차 1938년 7월 수회
검거인원 합계 739명
제1차 송국자 130명 중 103명 기소

제2차 송국자 156명중 85명 기소


당시 일본인들이 붙인 혜산사건(惠山事件)의 공식 명칭은 "중국 공산당의 조선내 항일인민전선 결성 및 지나사변 후방교란 사건(中國 共産黨の 鮮內 抗日人民戰線 結成 竝 支那事變 後方攪亂 事件)"이다.

지나사변(支那事變)은 일지사변(日支事變)이라고도 하며, 1937년 7월 7일 발발한 중일 전쟁(中日戰爭)을 말한다.

재판 기록

1심 판결은 1941.08.28, 2심 판결은 1943.12.28, 3심 판결은 1944.10.23 에 있었다. 마동희 (馬東熙, 1912-1938)는 수사 도중에 죽었으며, 권영벽(權永壁, 1909∼1945), 이제순(李悌淳, 1908~1945) 등은 사형 당하고, 박달(朴達, 1910~1960)은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고, 박금철(朴金喆, 1911~1967 ?)은 무기형을 받았다. 박달과 박금철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해방과 함께 석방된 후 북한으로 갔다. 박달은 고문 후유증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별다른 활동을 못 했으나, 박금철은 북한의 고위직에 올랐다가 1967년 갑산파 숙청 때 쫓겨났는데,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사람들도 창씨 개명한 이름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해방 직후 감옥에서 풀려난 박달과 박금철은 평양에 나타난 북한 김일성의 사진을 보여주니,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2][3]

재만한인조국광복회와 북한의 역사 날조

당시 일본 기록에 나오는 혜산사건에 연루된 조국광복회의 정식명칭은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이며, 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주요 간부인 오성륜(吳成崙)·이상준(李相俊)·엄수명(嚴洙明) 등이 주도한 단체이다.[4] 그러나 오늘날 북한은 이름을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라고 하면서, 김동명, 이동백, 여운형이 주도했는데, 김동명은 김일성(金日成)의 가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한이 말하는 이런 단체는 어느 기록에도 나오지 않으며, 실존한 적이 없다.

북한의 영화 중에는 해방 후 김일성이 여운형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김일성이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고 한다. 스스로 날조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갑산파(甲山派)

혜산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살아남아 해방 후 북한의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을 갑산파(甲山派)라 부른다. 이들은 김정일 후계체제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1967년 모두 숙청 당했다. 갑산파 요인 이효순(李孝淳, 1907~?)은 사형당한 이제순(李悌淳, 1908~1945)의 형이다.

"중국, 1967년 김일성 갑산파 숙청때 불쾌감" : 美윌슨센터 공개 외교문서…`장성택 처형'과 유사점 연합뉴스 2013/12/17
북한 부수상 박금철의 숙청(2) RFA 2018-07-24


참고 문헌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 (東京 みすず書房, 1976) pp.257-306 수록.


각주

  1.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8/31
  2. 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서당, 1991년) : 137~138쪽
  3.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7)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6) 동아일보 1972.01.27. 4면 ;
    조규하(曺圭河), 이경문(李庚文), 강성재(姜聲才),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고려원 1987) : 해방 직후 여운형의 비서였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은 1945년 10월 김일성에게 여운형의 밀서를 전하러 평양으로 가던 길에 해방 후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되어 역시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가던 박금철(朴金喆)과 우연히 동행하게 되어 박금철이 김일성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현장에서 보게되는데,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서 둘 중 한 사람은 가짜로 보였다고 하였다.
  4. 「昭和十二年度に於ける鮮內思想運動の狀況」 사상휘보 제14호 1938-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