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髙銀, 1933년 8월 1일 ~, 90세)은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 환속한 시인으로 본명은 고은태(髙銀泰)이다. 대표적인 진보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식 이름은 다카바야시 도라스케(高林虎助)이며[1], 승려로 있을 때 법명은 일초(一超)이다. 승려로 있을 당시 스승은 조계종 초대종정을 지낸 현대의 고승 효봉 학눌(曉峰 學訥, 1888~1966) 스님인데[2], 유명했지만 이력상 그와 별 인연이 없어보이는 스님을 굳이 찾아서 스승으로 모신 것도 자신의 과시욕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구산(九山, 1909~1983)법정(法頂, 1932~2010) 스님과는 사형제(師兄弟)간이었다.

약력

수상

  • 1974년 한국문학작가상
  • 1988년 만해문학상 (시집 《만인보》)
  • 1991년 중앙문화대상
  • 2002년 대한민국의 훈장 : 은관문화훈장 (2등급)
  • 2005년 노르웨이 국제문학제 비에른손 훈장 : Bjørnson Order for Literature (2005)[3][4][5]
  • 2006년 스웨덴 시카다상 : Cikada Prize (Swedish literary prize for East Asian poets, 2006)[4][6][7][8]
  • 2007년 제5회 영랑시문학상
  • 2014년 황금화관상

시작(詩作) 활동

2000년 6월 김대중 방북에 수행한 고은이 김정일과 함께 축배를 드는 사진.[9]

고은이 1987년 간행한 시집 《백두산》에는 아기 장수 김바우가 나오는데 이는 김일성을 모델로 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10] 김일성을 찬양하는 어용문학의 정점에 있는 조기천(趙基天, 1913 ~ 1951)의 1947년작 서사시 《백두산》[11]을 흉내낸 것으로 보인다. 그도 김일성 일족의 가짜 백두혈통 신화 조작에 일조한 듯하다.

그닥 세계적 권위가 없는 노르웨이의 비외른손 상과 스웨덴의 시카다 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그나마 서구권에서는 북유럽, 특히 스웨덴 쪽에 알려져 있고 그 스웨덴이 바로 노벨문학상의 수여국이어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는 하였으나 작품의 내재적 가치가 별로여서인지 스웨덴에서 노벨문학상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어찌되었건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고은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하여 우상화하였는데, 근자에 좌파 운동권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더 이상 후보로 거론되지 않는다.

성추문 논란과 재판 진행 상황

고은의 성추문 논란은 문단 내부 사람들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밖으로 거론하지 않았고, 언론들도 외면했다. 최영미 시인의 폭로로 비로소 밖으로 불거져 나왔다. 이런 고질적 문제가 오랫동안 감춰져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문단 내부의 권력 지형 탓으로 보인다. 문인들이 양식있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은 사실과 거리가 멀고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존경받을만한 지성인도 지식인도 아니다.

[단독] 고은문학관에 6000 땅 제공 철회 … 독이 된 '셀럽 마케팅' - 중앙일보 2018. 3. 1.
페이스북 짧은 글 ‘위선을 실천하는 문학’
알고보니 기고 제목…헤럴드경제에 보내와
“고은, 재판땐 변호사, 지금은 출판사 뒤 숨어”
고은 시인 복귀에 일간지 기고로 비판 / “고은, 당사자 신문 신청도 응하지 않아”
윤한룡 실천문학 대표 <한겨레> 인터뷰 / “출간 기준에 따른 것…회수 계획 없어”
  • 과거 김지하 시인이 구속되어 감방에 있을때, 시인의 장모이신 고 박경리씨를 수차례 찾아가 " 야, 이 00년아, 네가 뻣뻣하게 하지만 않으면 청원서를 내서 김지하를 나오게 할 수 있어" 라고 하였다고 한다. 뻣뻣하단 말은 성희롱의 차원의 말이다.[12] 이 말을 들은 김지하 시인은 분노를 하였다고 한다.

〈사로잡힌 악령〉 논란

이문열이 1994년 간행한 《아우와의 만남 (李文烈 중단편전집; 5)》 (서울: 둥지, 1994)에 실린 단편소설 〈사로잡힌 악령〉의 주인공이 고은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많다. 이문열은 단편집 초판에 이를 수록하여 간행했다가, 후속판에서는 이것만 삭제했는데, 이유는 분명치 않다. 고은의 행적이 문제가 된 후 월간조선이 인터넷판에 〈사로잡힌 악령〉의 전문을 올렸다가 이문열 본인의 요청으로 삭제했다고 한다.[13]

‘환속승려’ 고은 연상케 하는 작품... 고은 “뉘우친다”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밝힌 충격적 회고...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간첩 논란

조우석대표는 이봉규TV와의 인터뷰에서 고은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던 인물이다. 그는 성추문문제를 일으켜 논란이 되었었다.그것에 가려져서 더 중요한 사실이 숨겨져있는데 그것이 간첩혐의이다. 조우석은 간첩의 거물중의 거물 간첩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전직 국정원 요원의 폭로인데 미 CIA가 고은은 간첩이란 판단을 했고 국정원 요원에게 제보하였다. 2000년초반 파키스탄 대사관에 수시로 출입했다. 당시 북한과 파키스탄은 특수관계였으며, 그는 북한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임무를 받고 이를 보고하였다는것이다. 그에 따른 반대급부로 공작금을 받았다고 전했다.

2000년 6월 북방북 당시 김대중과 정치거물들과 같이 갔다. 김대중과는 밀접한 관계였다. 북한방문시 한겨레 최양례, 고대 교수 강만길, 이해찬 이종석 문종인 등 김대중 북한방북 2000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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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논란

고은의 시에 곡을 붙인 대중가요 제목 "세노야"는 일본말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 다산 정약용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괴담을 퍼뜨린 사람도 고은이라고 한다.

일본어 "세-노(せえの)"는 여럿이 힘을 맞추기 위한 구령인데, 일본 어부들이 여럿이서 그물을 당길 때 등의 경우에 많이 쓴다고 한다. 고은은 1960년대 말 우리나라 어부들이 이 말을 쓰는 것을 듣고 일본말인 줄 모르고 시를 썼는데, 나중에 일본말 시비가 일었다.

위 [박종인의 땅의 역사] 154편을 텍스트로 각색 편집
위 강재형의 글에 대한 고은의 반박문

호치민의 목민심서 애독 괴담 유포 논란

널리 퍼져 있는 괴담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 다산 정약용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말을 처음 퍼뜨린 사람도 고은으로 지목되고 있다. 아래 그의 1988년 한겨레신문 칼럼이 최초 출처인 듯하다.

2003년 여행작가로 첫 명함을 내밀었다. 14개월 취재하고 12개월 집필한 끝에 인도 여행 가이드북을 펴냈다. 오랜 노동으로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도망치듯 여행을 떠난 곳은 베트남이었다. 분명히 쉬러 갔는데 나는 어느새 하노이 공항 곳곳을 취재하고 시내로 나가는 교통편을 체크하고 있었다. 쉬기는 글렀고, 오랜 궁금증이나 풀어보기로 했다.

나는 베트남과 관련해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베트남 건국 영웅 호찌민 주석이 정말로 〈목민심서〉를 애독했는지 궁금했다. 1988년 고은 시인이 한 신문에 실은 ‘손문(쑨원)과 호지명(호찌민)과 김구’라는 글은 꽤 흥미로웠다. 호찌민 주석이 〈목민심서〉를 지은 정약용의 기일까지 알아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언론은 호찌민 주석 무덤에 부장품으로 〈목민심서〉가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호찌민 주석의 유품 중 〈목민심서〉는 없었다’ 공식 발표
묘한 일이었다. 우리만 아는 진실이라도 있는 걸까? 나는 아무런 수확도 없이 26개월 만에 얻은 한 달의 휴식 여행 중 열흘을 허공에 날려야 했다. 그리고 의문은 2006년에야 풀렸다. ‘호찌민 주석 옆에는 〈목민심서〉 없었다’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베트남 호찌민 박물관 측이 호 주석이 남긴 유품 12만 점 가운데 〈목민심서〉는 없었다는 공식 답변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위치한 호찌민박물관의 응웬 티 띵 관장은 9일 오전 박석무(朴錫武) 단국대 이사장 겸 다산연구소 이사장 등 한국방문단과 만난 자리에서 "호찌민박물관에는 고인과 관련된 유품 12만여 점이 소장돼 있지만 목민심서가 유품 목록에 포함돼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다"고 목민심서 소장 사실을 사실상 부인했다고 배석했던 한 인사가 밝혔다.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