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길봉에서 넘어옴)
임해(任海, 1910[1] ~ ?)의 본명은 임길봉(任吉鳳)이며,[2] 일본서 노조 활동을 하다 검거된 이력이 있다. 해방 직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정치활동을 하다 곧 월북했다.[3] 북조선 노동당 중앙당 농민부장을 지냈고,[4]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 기획부장으로 좌천되었는데[5], 그 후의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제주도 구좌면 행원리(舊左面 杏源里) 출신으로[1] 동향인 고준석(高峻石, 1910~1994)의 가까운 친구였고, 1946년 초에는 함께 서울에서 민전(民戰)[6] 산하 경제대책연구위원회(經濟對策 硏究委員會) 위원으로 있었다. 고준석이 1948년 4월 남북협상 취재차 평양에 갔을 때 그를 만나 북한 요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4]
《전협(全協)》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労働組合全国協議会)》의 약칭이며, 1928년 창립되었다.[7]
(4) 임길봉
- 본적 : 제주도 구좌면 행원리 737
- 주소 : 일본 대판
- 임길봉(任吉鳳) 23세
※ 재일본 한국인 활동일지
- 1933. 6. 12 대판부(大阪府)에서 전협화학분자 임길봉(任吉鳳)을 검거 송치함.
-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3 <국가보훈처>, p. 438)
한편 재일(在日)조선인으로 해방 직후 귀국한 임해(任海, 본명 任吉鳳)도 장안파와 거의 동일한 주장을 편 바 있다. 고준석(高峻石)은 임해(任海)가 해방 직후 박헌영의 「8월테제」에 맞서는 「조선(朝鮮)의 독립(獨立)과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의 긴급임무(緊急任務)」라는 팜플렛을 썼다고 증언했다.註 010 「8월테제」에는 임해의 팜플렛을 「일본에서 나온 몇개 동지들」의 극좌적 경향으로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임해는 ‘독립으로 조선혁명의 현단계인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과업이 거의 완수되고 있기 때문에 이중과업의 수행, 즉 사회주의 혁명의 과업을 내세우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 [註 010] 高峻石, 『朝鮮革命テゼ:歷史的文獻と解說』(柘植書房, 1979), p.302. 그러나 고준석은 다른 책에서 임해가 쓴 글이 「朝鮮革命의 프롤레타리아트獨裁的 性格에 對하여」였다고 기록했다(高峻石, 『朝鮮 1945~1950:革命史への證言』, 三一書房, 1972, p.69).
37) 당시 간행된 팜플렛을 중심으로 현단계논쟁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나 이는 원본 그대로의 자료구득이 용이하지 못하므로 한계가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간행한 중요 테제는 다음 6가지가 있다.
- 첫째 장안파인 최익한(崔益翰)·이청원(李淸源) 공동집필의 “현계단의 정세와 우리들의 임무”(9월 15일에 나온 것으로 추정됨).
- 둘째 박헌영(朴憲永)이 집필하여 1945년 8월 20일 “일반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이란 제목으로 간행된 후 9월 25일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잠정적)”이란 제목으로 다시 출판된 속칭 8월 테제.
- 셋째 1925년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에서 지냈던 임해(任海: 본명 임길봉)가 귀국하여 1945년 9월에 집필한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자의 긴급임무.”
- 넷째 전기한 임해가 소장이었던 조선공산당 중앙직속의 조사연구기관인 조선산업노동조사소(朝鮮産業勞動調査所)가 편집한 『옳은 路線을 爲하야』 (서울: 우리文化社, 1945).[14][15][16] (이는 해방일보에 발표되었던 성명을 중심으로 남한의 박헌영의 것만이 아니라 북한의 김일성의 것도 수록하였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 다섯째 역시 산로의 임해가 집필한 “朝鮮革命의 段階方向 及 展望: 프롤레타리아트의 窮極的 勝利를 위하여,” 『産業勞動時報』 第一卷 第一號(1946年 1月). (속칭 산로테제; 이 글의 제목을 고준석은 “조선혁명의 프롤레타리아독재적 성격에 대하여”라고 기록했다. 高峻石, 『南朝鮮勞働黨史』 [東京: 勁草書房,1978], 44頁; 하성수 [편], 『남로당사』 [서울: 세계, 1986], p. 54)
- 여섯째 조공 서울위원회 선전부에서 편집한 『民主主義 朝鮮의 現段階』 (서울:朝共 서울委員會 宣傳部, 1946年 1月)등이 있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동한 인물 중에 “임해" 라는 이름을 쓴 사람은 2명이다. 한명은 일본 출신 임해(任海)로, 본명은 임길봉이다. 그는 북조선로동당에서 농민부 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또 한명은 조선의용군 출신 임해(任海, 1900~1962)로, 본명은 주춘길(朱春吉)이다. 그는 조선독립동맹 제1진으로 귀국해 조선신민당에서 중앙집행위원 겸 간부부장을 역임했다. 그는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와 1948년 3월 제2차 전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의용군 출신 임해는 조선신민당 간부부장 시절과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 때까지 한자명을 임해(任海)로 표기했다. 그러나 그후에는 한글명과 한자명을 림해(林海)로 표기했다.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서울: 선인 2005, 1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