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사건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합수본부장이 당시 계엄하에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를 연행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하고 이와 관련하여 후속적으로 군의 충돌이 일어난 사건이다.


1997년 소위 역사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이 사건이 쿠데타라고 규정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12.12 사태는 2단계로 진행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전두환 합수부장의 명령에 따른 정승화 체포과정이며, 2단계는 정승화가 체포된 이후 장태완의 대응과 그로 인한 전두환 합수부장의 대전복 작전의 수행이다.

1단계

  1. 전두환 합수부장 – 정승화 체포조 투입
  2. 정승화 체포과정시 총격전 발생
  3. 합수부의 정승화 체포후, 총리공관에 수경사의 5분대기조 도착

2단계

  1. 장태완 수경사령관 사건 이후 전두환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대응
  2. 1공수여단의 출동 오보 발생, 육군본부 수경사로 이동, 노재현 국방부장관 미군영내로 이동
  3. 노재현 국방부 장관 미군부대에서 전부대 이동 금지 명령
  4. 장태완 수경사령관 30단에 모인 장교 및 사병 대상으로 공격(사실상 사살 명령) 및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이에 대한 대전복작전 시행
  5.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명령으로 장태완 수경사령관 행동 중단. (신윤희 중령 장태완 체포) 12.12 사태 사실상 종결




배경

10.26 사태 후 박정희 시해범 조사과정에서 정승화의 개입 정황 확인

10.26 당시 김재규를 조사과정에서 정승화가 다양하게 김재규를 도와준 것으로 확인됨.

  • 12.12 당시 안가에서 대기 후 수상한 사건(박정희 시해) 발생했음에도 전혀 조치를 취하지 않음.
  • 김재규와 육군본부로 이동하여 김재규가 육군본부를 장악한 것처럼 보이도록 함.
  • 육군본부에서 자신의 권한이 아닌 다양한 군부대 이동을 지시(당시는 계엄사령관이 아님) 특히 국방부장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진행
  • 이 모든 움직임이 모두 김재규의 사건현장이 드러나지 않고, 누군가가 이미 군대를 장악한 것 처럼 보이도록 만듦.
  • 결국 국무회의를 청와대가 아닌 육군본부에서 진행하도록 유도했으며, 결과적으로 최규하는 경호원 없이 육군본부로 이동

정승화의 월권적인 김재규 지지 정치 행보 및 정권장악 시도

  • 정승화는 전두환을 압박하여 최규하를 수사하도록 함. 이는 후에 신현확 총리가 전두환의 최규하 길들이기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정승화의 최규하 길들이기라고 봐야 함.
  • 박정희 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 김재규를 지지하는 발언

정승화의 군대 인맥 장악

11월 중순 군 인사개편시 김재규 라인은 모두 유지, 오히려 강화됨. 결과적으로 군대 내부는 모두 보안사를 제외하고는 김재규 정승화 라인이 장악한다.

  • 3군사령관 (이건영), 특수전 사령관(정병주), 수도경비사령관(장태완)을 모두 정승화 라인이 장악했으며, 이는 이들이 김재규 라인이 장악한 것으로 파악해도 됨.
  •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실병력을 통제할 수 없으며, 포병출신이라서 군 장악능력이 현저하게 낮았음. 이에 노재현 국방부장관도 사실상 정승화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판단해야 함.

정규육사 출신과 비정규육사 출신의 갈등

  • 12.12 사태 초기 부터 이건영 사령관은 합수부측이 장난질을 한다는 식으로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장태완이나 임성민도 조사할 것이 있어서 연행했다는 사실에 이를 인정하지 않음. 이는 30단에 모여있는 사람과 불신관계가 깊다는 것을 의미함.
  • 정규육사는 11기 부터 이며,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단장을 하고 있는 단계로, 빠르게 승진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선배 장군들이 불안감 내지 갈등이 조장 됨.

전두환 동해경비사령관의로 보직 변경 시도

  • 많은 보고서는 전두환이 동해경비사령관으로 보직 변경이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주장함. 하지만 이는 사건을 사사화(私事化)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보이며,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화하여 해석하는 오류임. 결국 이러한 주장은 정승화의 10.26 개입 여부임을 흐리게 하는 정승화의 의도적인 조작일 가능성이 높음. 애초에 이학봉이 정승화 연행에 대한 건의를 전두환이 최종승인한 게 노재현이랑 정승화가 골프를 치며 전두환을 동경사로 보내자는 말을 한 것보다 먼저 일어난 일임. 동경사로 보낼 것을 알고 선수를 쳤다는 게 타임라인을 보면 앞뒤가 안맞는 말임. 보안사측은 나중에 김영삼 때 역사거꾸로 세우기 재판 당시 노재현이 증인으로 나와 골프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해서 그런 사실을 나중에 90년대 가서야 알게됌
  • 정승화는 전두환 등이 정치장교라는 명목으로 숙청을 할 계획은 분명함. 만약 그렇게 되면 전체 군대를 정승화가 장악하는 것이 됨. 그리고 정승화야 말로 3김 비토발언 3김이 대통령이 되면 군은 쿠데타를 해서라도 저지하겠다 자기가 계엄사령관으로서 매우 부적절한 정치적 발언을 한 사람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혐의자로 본인부터 계엄사령관에 앉으면 안돼는 사람임.
  • 노재현은 수사가 끝나지 않았기에 정승화의 좌천성 건의를 거부했는데, 이거 자체가 빼박 매우 부적절한 수사외압임 본인을 수사하고 있는 수사관을 한직으로 좌천 보낸다? 아직 수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특검검사가 본인 수사를 하고 있는데, 수사 대상이 특검 검사를 한직으로 좌천 보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빼박 수사외압임 이거 자체로 부적절한 짓인데 좌파들은 전후사정도 반대를 곡해해서 정승화의 부적절한 수사외압 행위에 대한 비판은 안함 도리어 정당화 시켜주고 있음.

군내부에서 정승화 조사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 증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정승화 수사 비협조

사건의 진행과정

정승화 체포과정


정승화 체포 후 합수부와 육군본부의 대응


1공수여단의 출동 오보 발생


육군본부의 대응


합수부의 대전복작전 수행


사건의 종결


주요 쟁점들

1) 정승화의 연행은 정당했는가?

12.12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반드시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10.26이 터졌기에 12.12 사건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 10.26 때 정승화의 행적이 어떠했는지 제대로 설명도 안하면서 12.12를 묘사하는 서울의 봄 같은 영화가 황당한 영화인 이유.(의도적인 생략일 것이다.)

10.26 당시 시해범인 김재규는 시해장소인 궁정동안가에서 불과 5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본가에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승화를 대기 시켜 놓았다.

10.26일날 당일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에게 중정의 구역이 안가에서 오늘 대통령의 연회가 있을 것이라는 전화를 받고, 그 즉후 정승화에게 연락을 했다. 김재규의 계획하에 이미 오래전부터 거사. 중정의 관할인 안가에 연회일정이 잡히면 정승화를 끌어 들일 것이라는 계획이 잡혀 있었다는 강한 확증이 드는 대목이다. 안가에서 연회가 있을 것이라는 전화를 받자 마자 정승화에게 연락을 했기 때문이다.

김재규 입장에서는 혁명 소위 박정희를 제거하는 반란 거사를 일으키는 데 거사 장소 바로 옆에 군내 핵심 4성장군인 육군참모총장을 거사 장소 바로 옆에 대기를 시켜 놓았다. 그리고 시해 직후에 같은 차를 타고 육군 벙커로 향했다.

이미 이 시점에서 정승화는 시해 사건에 빼박 조사 대상자다.

예를 들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치자.

그 살인 사건에 살인범이 살해장소가 정해지자 마자 바로 전화해서 살해 직전에 살해 장소 바로 옆에 대기 시켜 놓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과 살인범이 범행 직후 같은 차를 타고 범행장소를 떠났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빼박 살인사건에 조사 대상자이며 유력한 공범 혹은 조력자 대상에 오를 것이다.

도리어 그 사람을 조사를 안한다면 그 조사책임자는 직무유기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누구는 이 사건을 2성장군 소장인 전두환이 4성장군인 대장 정승화를 체포했기에 하극상이라고 하는데, 2성장군, 4성장군 계급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전두환은 당시 10.26 사건에 수사를 책임지는 합동수사 본부장의 위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4성장군 대장계급은 군에서 10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군에서 많지 않은 자리다. 합창의장, 육군, 해군 공군 각군 참모총장, 당시에는 지상군사령관으로 통합되기 전 1군 3군이 있었으니 1,2,3군 사령관, 한미연합부사령관 정도가 대장계급을 가진 장군들이다. 끽해야 8명 정도 인원이다. 수사에서 군의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대통령에 대한 특검을 하는데 일개 검사가 대통령을 수사하는 건 하극상인가?

군에서 수사를 맡는 헌병(군사경찰)의 제일 높은 헌병감이나 당시 보안사 기무사령관도 4성장군이 아니다. 이것을 하극상이라고 한다면 헌병이나 보안사는 4성장군 누구도 수사 할 수가 없다. 애초에 헌병이나 기무사는 계급을 따지지 않고 수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물며 초유의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를 책임지는 합수본부장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전두환정승화 뿐만 아니라 총리이자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인 최규하 또한 조사를 하였다. 이 사건은 계급을 볼 것이 아니라 전두환의 당시 위치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를 책임지는 합수본부장에 직책에서 봐야 한다.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시해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수사 할 권한이 있는게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의 법으로 명시된 직무였다.

정승화는 위에서 서술 했듯 시해범인 김재규가 차지철에서 중정 바운드리 안에서 연회가 정해졌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정승화에게 전화했고 시해장소 바로 옆에 대기 시켜 놓고 자기는 대통령 각하 만찬에 참석 할 테니 중앙정보부 차장과 같이 여기에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고 시해직후에 김재규 운전기사와 중정의 박흥식 대령과 동석해서 김재규의 차를 타고 육군벙커로 이동했다.

전두환이 정승화를 조사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전두환이 수사책임자로서 직무유기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대통령 시해범인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같이 육군벙커에 간 정승화는 자신의 주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육군벙커에서 여러가지 월권과 의심스러운 명령을 내린다.

10.26 당시 정승화의 의심스런 언행들

1. 자신에게 지휘권이 없는 경호실 병력을 동결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경호실은 대통령과 경호실장 차지철의 명령만을 받는 병력이다.

육군참모총장이 지휘권이 전혀 없는 병력이다. 대통령 경호실은 말그대로 대통령을 경호하는 병력이기에 대통령의 최측근 경호 호위부대이고 당연히 박대통령의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들이다.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났다면 가장 먼저 현장에 가서 사건을 파악하고 시신을 확보해야 될 병력이 경호실 병력이다.

정승화는 경호실 병력을 동결시켜서 경호실 병력이 사건 현장에 가지 못하게 했다. 왜 그랬을까? 시해사건의 진실을 일단 은폐하고 호위세력인 경호실이 대통령 시해사건에 대해 반발해서 김재규의 반역 행위에 훼방을 놓을 것을 염려 해서 였을까?

일단 자기 권한 전혀 밖인 경호실 병력에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그 명령은 사건의 진실보다는 은폐에 용이한 명령이다. 정승화는 이 시해사건이 차지철의 범해일 것이었다고 생각 했다고 하는데.

경호실장인 차지철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는 반란을 일으켰다면 자기 수하들인 경호실 병력은 당연히 자기 휘하였을 것이고 권한도 없는 정승화의 명령보다 차지철의 명령을 들을 테니 반란을 일으킨 차지철 대신 정승화가 경호실 병력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이 내린다고 차지철 대신 정승화의 명령을 듣겠는가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굳이 명령을 내려야 했다면 김재규의 차에서 대통령의 유고를 알았을 때 경호실의 병력을 동결 할 것이 아니라 경호차장이던 이재전에 당장 경호실 병력을 데리고 현장에 보내 시신과 현장을 확보하게 해야 한다.

가장 올바른 처신이라면 자신의 권한도 없는 경호실 병력에 명령을 내릴 게 아니라 먼저 직속상관인 국방부장관에게 보고를 하고, 지시를 기다렸어야 했다.


2. 자신에게 지휘권 권한이 없는 수경사 병력을 동원해서 청와대를 포위하게 했다.

수경사 병력 또한 대통령과 경호실장인 차지철의 지휘만을 받고 육군참모총장의 통제와 권한이 없는 부대이다. 차지철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경호실 병력과 수경사는 대통령이 유고 상태인 상태에서 차지철 지휘를 받게 된다. 이미 이 상태에서 차지철 또한 죽었다는 걸 정승화는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정승화는 수경사 병력으로 청와대를 포위하게 하고 자기의 지시가 없이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또 경호실 병력이 만약 움직이려고 하면 이걸 제압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경호차장이 이재전에게는 움직이지 말라고 하고, 수경사로 청와대를 포위하고 경호실 병력이 움직이면 제압하라고 한 것은 경호실 병력을 무력화 시키려는 조치로 보인다.


3. 자기에게 권한이 없는 수도권 부대들을 출동준비 시켰다.

육군참모총장은 여단급 이상 병력을 국방부장관의 허락없이 출동 시킬 권한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승화는 육군벙커에서 20사단은 육사쪽으로, 9공수여단 육군본부로, 당시 수색에 있던 30사단, 부평쪽에서 33사단도 출동준비를 시켰다. 자기쪽 사람이던 수도권 병력을 총괄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을 시켜 부엉이 둘을 발령하게 했다. 국방부장관이 육군 벙커로 왔지만 정승화는 별 이야기 없이 도리어 김재규에게 현재 출동할 수 있는 병력 등등에 대한 사항을 알려 준다.

4. 이런 의심스러운 행동을 전혀 보고하지 않고, 침묵 함으로서 계엄하에 계엄사령관 자리에 임명된다.

위에서 이야기 한 행적만으로도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대상이지, 계엄사령관에 임명해서는 안돼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정승화는 이러한 자신의 의심을 살만한 시해범과의 행적에 대해서 보고도 그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제대로 대응 했다면 스스로 사건 현장에 가 보던지 월권으로 부대를 출동 시키고 경호실을 동결하거나 할 게 아니라, 직속상관인 국방장관에게 제대로 된 보고를 했어야 하는데 이를 하지 않았고 월권 까지 하면서 사건을 도리어 은폐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5, 정승화는 거짓말을 많이 했다.

정승화가 대기하고 있던 장소는 안가에서 불과 몇십m 떨어진 장소였다. 거기서 불과 총 수십발. 권총 뿐만 아니라 m16 소총으로 경호원들이 거의 학살을 당했는데 정승화는 6.25도 경험한 4성장군이다. 본인이 이 총소리를 듣지 못했거나, 다른 곳에서 난 소리인줄 알았다고 한다. 말이 안돼는 소리다.

김재규가 대기 시켜 놓고, 헬레벌떡 양말 차림으로 몸에는 화약냄새가 진동하고 피가 묻은 상태로 왔을 때 이미 이때는 적어도 정승화는 김재규가 범인인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증언이 진실인지는 모르나 같은 차를 타고 육군벙커에 갈 때 김재규는 박정희가 죽었다는 것을 정승화에게 통보하는데 정승화에 물음이 누가 죽였습니까가 아니라 내부소행입니까 외부소행입니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노재현은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전두환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했지만, 정승화는 '총장님을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했다' 김영삼 때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총장님을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는 것을, 김재규가 총을 가지고 있기에 조심히 체포하라는 뜻으로 했다고 하는데 물론 말도 안돼는 소리다.

정승화는 그때 안가를 처음 가봤다고 이야기 했는데 물론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전에도 이 안가에 온 적이 있었다. 김재규랑 잘 모르는 사이였다는 것 그것도 거짓말이다. 나중에 12.12이후 실토를 하는데 김재규랑 호형호제 하는 사이로 출세를 위해 정승화 측에서 도리어 김재규에 접근 했다고 한다. 명절 때 선물도 주고 받았고, 애초에 정승화를 사실상 박정희에게 육군참모총장으로 추천한 자가 김재규다.


※ 전두환은 단순한 2스타 아닌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를 총괄하는 합동 수사본부장 위치에서 시해범인 김재규와 시해사건 직전 직후에 행동을 함께하고 의심스러운 행동을 한 정승화를 조사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도리어 정승화를 조사하지 않는 것이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정승화는 12.12로 연행되기 전에 수사관들이 도리어 계엄사령관 사무실에 가서 조사를 하는데 황당하게도 조사서를 줄로 긋고 3번씩 빡꾸를 먹이고 조사서를 낭독하게 시키고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수정 삭제를 요구하는등 . 위압적으로 자기의 권한과 권력을 이용해서 피의자가 도리어 수사관에게 갑질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행적을 은폐하려고 했다. 오죽하면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이 3번째 빡꾸를 먹이자 정승화에게 피의자가 진술서를 줄을 긋는 등에 행위를 하면 법적효력이 없어진다고 수사에 협조 해 달라고 이야기 할 정도 였다. 참고로 정승화 또한 보안사령관 직을 맡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10.26일날 시해 직전 직후 시해범과 동행한 조사대상인 정승화가 그날 직후에 계엄하에 절대권력을 가진 계엄사령관에 임명 되면서 사건이 복잡해 지고 12.12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으로 육군군법회의 관할관으로 정승화를 구속하려면 정승화 스스로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니 더더욱

2) 12.12는 쿠데타인가?

5.16은 명백하게 쿠데타이다. 하지만 12.12는 정승화를 연행하는 과정에서 정승화 군벌이 반발해서 먼저 병력을 동원해서 일어난 우발적 군대 충돌이지. 정승화 군벌이 반발하지 않았다면 정승화 개인만 연행되고 끝났을 사건이다. 전혀 쿠데타가 아니다.

김영삼이나 좌파들 조차 쿠데타라고 하기 뭐하니 쿠데타적 사건 혹은 인류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 진행된 쿠데타라는 말 장난을 한다.

12,12 이후 전두환이 모든 것을 장악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근거없는 음모론이다. 12.12이후 전두환이 모든 것을 장악해서 최규하는 바지사장이되고 518을 진압을 다 지휘했다는 게 통설처럼 퍼져 있는 데 전혀 근거없는 음모론이다. 애초에 최규하는 노재현이 오기까지 사인은 물론 아무 것도 안하고 버텼다. 국군통수권자로 군내 충돌을 중재하는 사람이 부적절한 행동이지만, 최규하가 바지사장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고, 도리어 전두환 등은 대통령을 찾아가서 연행의 필요성을 수도권 주요 지휘관과 함께 군내 여론을 이야기 하면서 공손하게 읍소를 한다.

근데 장태완 측은 어떤가 국방부장관이 절대 병력 동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걸 무시하고 병력을 먼저 동원했다. 국방부장관 노재현이 총소리를 듣자마자 도망가는 바람에 국방부장관의 지휘계통이 무너지고, 육군참모차장은 정승화 군벌로 육군본부를 비우고 수경사쪽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장태완 측은 정식 지휘계통인 대통령에게 보고는 커녕, 도리어 정승화를 구출하기 위해 대통령을 납치할 계획까지 짜고, 김포에 있는 포병 부대로 대통령이 있는 총리공관 인근을 지키는 친위부대 30경비단을 야포로 쏘라는 정신 나간 명령을 내린다. 장태완에 황당한 명령들을 그래도 이성적이었던 장교들이 단체로 항명을 해서 그렇지 실제 장태완 명령 대로 했다면 서울 중심이 불바다가 됐을 것이다.

수경사라는 게 수도를 지키는 대통령 친위부대인데 야포로 30경비단을 쏘라는 건. 포병의 특성상 포는 초탄명중이 극히 힘들고, 광범위한 범위에 떨어지는 데 살상반경도 넓기 때문에 대통령을 포함한 서울 중심 광화문 인근에 민간인이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썼다는 것이다. 그것도 수도와 대통령을 지켜야 하는 수경사령관이 말이다.

애초에 수경사령관은 대통령 친위부대로 오직 경호실에서 대통령과 협의하에 임명하는 자리인데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가 월권으로 장태완을 임명한 것이니 장태완은 취임사에서 대통령이 아닌 정승화에게 충성을 바칠 거라는 발언까지 한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을 찾아가서 읍소한 전두환과 국방부장관 명령 무시하고 먼저 병력 동원하고 대통령에게 재가는 커녕 대통령을 납치할 계획을 짜고, 대통령이 죽든 말든 대통령이 있는 총리 공관 인근에 청와대를 지키는 30경비단을 야포로 쏘라고 한 장태완 측 어디가 반란세력인가? 전두환은 지금으로 말하면 기무사령관으로 병력도 없다. 끽해야 권총 찬 수사관들이 있고, 장태완은 수도 서울을 지키는 수경사령관으로 병력이 당연히 많다. 일단 야포로 30경비단을 쏘라고 했고, 탱크로 30경비단을 밀라고 했다. 권총을 가진 수사관이나 있던 전두환이랑 야포, 탱크등 수도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지휘하는 수경사령관이랑 동원 할 수 있는 병력차이를 보라. 병력동원도 장태완이 먼저 했고, 30경비단에 모인 수도권의 지휘관들은 권총도 안찬 상태로 모여서 거의 장태완 측에 대응식으로 병력을 동원 한 것이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쿠데타라는 것도 말이 안됀다.

전두환도 군에서 김재규 정승화 군벌이 엄청나고 정승화가 계엄하에 계엄사령관으로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었으니 아무래도 신중 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 언론에 시해사건에 대해 브리핑을 할 때는 그래서 정승화에 수상한 행적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정승화에 의심스러운 행적으로 인해 군내에서 정승화를 조사해야 된다는 여론이 크게 일고 있었고,

차기현이나 황영시 같은 주요 수도권 지휘관들은 전두환을 찾아와서 왜 정승화를 조사하지 않느냐고 계속 나름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전두환이 정승화를 조사하지 않으니 전두환과 정승화가 한패가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으니 말이다.

전두환 12.12 사건 당일에 이런 차기현이나 황영시 같은 군대 선배들 수도권 지휘관들을 정승화 연행에 대한 설명을 하기위해 30경비단에 부른다.

물론 정승화 연행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하지 않고 30경비단에 모인 상태에서 이야기를 했다. 평소에도 정승화 연행에 대해서 도리어 전두환에게 왜 연행 안하냐고 계속 물어보던 지휘관들이니. 당연히 정승화 연행에 대해서 이제 하느냐 같은 반응 이었고,

같이 총리공관에 가서 수도권 주요 지휘관으로서 정승화 연행 필요성 정승화 연행에 대한 군내 여론 등을 최규하에게 설명 했다.

신현확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수도권 지휘관들 공손하게 재가를 해달라고 읍소를 했고, 최규하가 국방부장관 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하자.

신현확이 달래면서 서로 시국에 대해 논했다고 한다. 치밀한 쿠데타라는 게 말이 안됀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쿠데타라면 수도권 지휘관들은 총도 안 가진 상태에서 30경비단에 모일 게 아니라, 각자 자기네 부대 사령부에서 군 병력 출동을 대기하고 있는 편이 백배는 낫다.

30경비단에서 한가하게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총리 공관에서 재가 해달라면서 읍소하고 신현확이 국방부장관 오면 해줄게 라고 하자 새벽에 시국에 대해 논하고 이런 짓을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사실 이 당시 장태완 측은 30경비단을 야포로 쏘라고 명령 내리고 전차를 깔아 뭉개네 이러고 있었으니 더더욱.

쿠데타라면 대통령 재가 없이 걍 군 병력으로 총리 공관을 점거하면 된다.

애초에 정승화 연행 때도 허삼수와 우대령이 총장님 수사할 게 있으니 같이 가시죠 이렇게 읍소하고 정승화가 무모한 저항을 하자. 그때서야 총을 꺼냈고 우대령은 총장공관에서 누군가의 총을 맞아 반신 불구가 됐다.

쿠데타라면 읍소 할 것 없이 병력을 동원해서 일거에 점거하면 되는 거지. 정승화 연행부터 공손하게 총장에게 같이 가자고 읍소하고 대통령을 찾아가서 읍소를 하고 앉았다. 대통령이 국방부장관 데려 오라고 새벽까지 버텨도 읍소만 한다.

장관을 명령을 무시하고 먼저 병력을 동원한 것도 장태완 측이지. 도리어 전두환 같은 경우는 정보부대이기에 권총 정도로만 무장했지 무장한 병력이 없는 상태다. 뭐 이런 쿠데타가 다 있나?

12.12는 전혀 쿠데타가 아니다. 정승화 김재규 군벌이 반발하지 않았다면 그냥 정승화 연행하고 끝났을 일이다.

쿠데타라면 대통령 생까고 도리어 대통령을 납치하려고 하고, 장관 명령없이 먼저 병력을 동원하고 30경비단을 야포로 쏘라는 둥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미친 명령들을 내린 장태완 측이 도리어 쿠데타 짓을 한 것이다. 이것은 진압한 게 도리어 12.12 사건이다

3) 하나회가 주동했는가?

12.12나 518진압을 하나회가 주도한 사건이라고 하는데 물론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518진압은 정웅 윤흥정 이희성 쪽이고 진압자체가 5공이랑 상관이 없으니 말할 가치가 없고,

12.12도 하나회가 다 주도한 게 아니다. 하나회란 정식 4년제 육사, 경상도 출신 장교들의 친목단체다. 이게 김영삼 때 무슨 하나회가 다 장악하고 했다고 해서 지나치게 과대 평가 하는데

황영시 차규현 같은 장교들은 정식 4년제 육사가 아니니 당연히 하나회가 아니다. 전두환이 첫 정식 4년제 육사이니 전두환보다 선배는 일단 하나회가 다 아니다.

12.12 직후에 단체 사진에서 장교들도 상당수가 하나회가 아니다. 아예 육사 출신이 아닌 일반장교들도 12.12때 장태완측과 반대되는 행동을 했다.

장태완이 무슨 야포로 서울 중심을 쏘라는 둥 수경사 전우인 30경비단을 전차로 뭉개고 보안사 장교들과 30경비단의 장태완들은 보이는 대로 사살하라는 둥. 정신나간 명령을 내렸기에 수경사의 다수 장교들이 장태완의 명령에 항명을 했는데 물론 이 장교들이 죄다 하나회가 아니다. 정식 육사 4년제 기수부터 영남 출신 장교들의 일개 친목단체가 수경사 장교를 다수를 점유할 수도 없다.

장태완을 연행한 수경사의 장교들도 하나회가 아니다.

10.26 때 의심스러운 행적으로 정승화를 연행해서 조사 해야 된다는 여론이 당시 군에 팽배해 있었다. 장태완이 내리는 명령은 수행을 할 수 없고 전우나 상관을 사살하라는 정신나간 명령이었기 이성을 가진 장교라면 따를래야 따를 수가 없는 명령들이었고,

12.12는 육사 4년제 기수의 영남 친목단체가 주도할만한 성격이 아니다. 전두환, 노태우, 호남 출신임에도 하나회였던 장세동 등이 하나회였지만 그외에도 하나회 이외 아예 정식4년제 육사가 아닌 전두환보다 선배장교들 육사가 아닌 일반장교들도 장태완 측에 반하게 행동한 게 12.12다.

장태완을 체포한 신윤희도 하나회가 아니고, 정병주를 체포한 박종규도 하나회가 아니다. 수경사에서는 절대다수가 장태완에게 항명했는데 수경사에서 처장급 여단장급 지휘관 중 하나회는 장세동과 김진영 정도 밖에 없었다.


4) 전두환이 동해 경비사령부로 전출가는 것을 알고 먼저 선수를 쳐서 12.12를 일으켰나?

역사 바로세우기 재판에서 재판문이나 노무현 정부 당시 mbc에서 만든 제5공화국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전두환이 정승화가 동해경비사령관으로 보내려는 걸 미리알고 선수를 쳤다는 데.

정승화가 노재현과 골프를 치면서 이런 건의를 한 건 이학봉이 정승화 연행을 12.12일날로 전두환에게 승인을 받은 날인 12월 6일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노재현은 이 건에 대해 일단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가 끝나면 생각 해 보자 했는데 정승화는 왜 시해 사건 수사를 맡고 있는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부로 보내려고 했을까? 자신이 10.26 때 의심스러운 행적에 대해 수사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5) 김재규의 혁명 3단계 계획과 정승화

김재규가 이학봉에게 털어 놓은 혁명 3단계 계획

1단계 : 국내에서 소요사태의 확산(부마사태 등). 민심이 박대통령을 떠났다고 생각할 때. 박대통령 시해. 혁명을 성공위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끌어들인다.

2단계: 정승화에게 비상계엄을 선포하도록 하고, 계엄군 서울에 진주시켜 국가 주요 기관을 점거하여 통치기능과 권력을 장악한다.

3단계 : 계엄군이 전 국가기관과 국가기능을 완전 장악하면 혁명을 선언하고 계엄사를 혁명위원회로 발족. 혁명위원회 의장은 김재규. 부의장은 최규하. 위원장에는 정승화.

김재규의 쿠데타 집권 시나리오에서 그의 사람이었던 정승화의 핵심 인물이었다.

6) 정승화와 김재규의 관계

정승화는 김재규를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정승화는 거짓말을 많이 했다. 좌천된 것도 방첩부대장 때 허위보고를 한 것이 걸려서 박정희의 눈밖에 나서 그랬던 것이다.

12.12사건 이후 연행 된 정승화는 박정희와 친한 김재규에게 일부러 정승화 쪽이 접근했다고 실토했다.

애초에 정승화를 육참총장으로 추천한 게 김재규나 마찬가지다. 둘이 서로 거의 동향으로 명절 때 선물도 주고받는 사이였다.

김재규가 괜히 거사장소가 정해지자 마자 정승화에게 전화해서 살해장소 바로옆에 스탠바이 시켜놓고, 살해직후 같은 차를 타고 살해장소를 이탈한 게 아니다. 김재규 입장에서 혁명 쿠데타를 하는데 군내 자기사람인 정승화를 통해 군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

김재규가 실토한 혁명 3단계에서 정승화가 계엄하에 계엄사령관이 되는 것도 아주 중요한 계획중 하나였다. 군은 김재규 청와대는 김계원에 의해 장악되는 시나리오였다.

7) 이성을 잃고 수행 할 수 없는 미친명령을 남발한 장태완

장태완은 원래 교육장교를 하다가 예편할 수순의 장교였다. 이런사람을 파격적으로 수경사령관에 추천한 게 정승화다.

이런 게 문재인 식 인사인데 아웃사이더로 한직에서 돌다 옷 벗을 사람을 몇개급 특진으로 요직에 파격적으로 승진 시킨다. 그럼 대개 이렇게 승진된 사람은 그렇게 승진 시킨 사람에게만 충성한다.

문재인은 한직에 물러났던 윤석열검사를 파격적으로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김명수도 마찬가지. 이런 인사를 한 게 부지부수였다.

장태완도 마찬가지. 장태완은 수경사령관에 취임 파티에서 일성으로 대통령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나같은 촌놈을 수경사령관에 추천한 정승화에게 충성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굉장히 이례적인 발언이다. 그것도 취임파티에서 말이다.

12.12 당시에 장태완은 대통령이나 국가에 충성한 게 아니라 자기 추천한 정승화 개인에게 충성한 것이다. 정승화 연행에 반발해서 이성을 잃고 술에 취해 권총을 빼들고 수행할 수 없는 미친명령을 남발한다.


한 예로 이미 총장 공관에서 연행이 완료 되서 허삼수와 우대령등이 다 떠나고 상황종료 된 상황에서 다짜고자 상황이 이러이러하니 이렇게 하라 브리핑도 없이. 저기 반란군이 있으니 가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거의 12.12 때 장태완이 명령 내리는 걸 보면 이런식이다. 그리고 어제까지 자기 상관이나 부하를 적이니까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리지를 않나

서울 중앙 대통령 지키는 친위부대인 30경비단을 야포로 쏘라고 하지를 않나? 탱크로 밀라고 하지를 않나

만약 장태완 명령대로 했다면 수도 서울 중앙은 불바다가 되고 민간인이 죽어나가고, 군내 엄청난 충돌이 났을 것이다.

이성을 잃은 장태완의 말도 안돼는 명령을 그래도 이성적인 판단을 한 수경사 장교 대다수가 명령을 거부했다. 그래서 12.12는 그나마 더 큰 국군간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미친명령을 장교들이 듣지 않자 더 광분해서 권총을 빼들고 왜 말 안들어 라고 더 광분한 모습을 보인 게 장태완이다.

그날 장태완은 대통령과 수도 서울을 지켜야 하는 친위부대장이 자기 임명해준 정승화 개인에게 충성한다고 미친 망나니 마냥 폭주한것이다. 이걸 정당했다며 참군인이다 미화하는 게 좌파와 서울의봄 같은 좌파 영화인 것이다.



8) 김영삼에 의한 정치보복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 의한 쿠데타 규정.

노태우 다음에 김영삼이 집권하자 정승화나 장태완 측은 12.12를 쿠데타로 처벌해야 한다는 식으로 김영삼에게 요구를한다.

3당합당 민정당 세력에 지원을 받아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집권초기 이런 요구에 대해.

통치행위를 처벌 할 수 없다. 성공한 쿠데타(12.12는 물론 쿠데타가 아니다)는 처벌 할 수 없다 라며 거절한다.

사법부에서도 소급법 원칙

( 행위를 처벌 할 때는 법이 만들어진 이후에 행위를 처벌 해야지 법을 나중에 만들고 그 법이 있기도 전에 했던 행위를 소급적용해서 처벌하면 안됀다는 헌법원칙. 예를 들어 과자를 먹으면 처벌한다라는 법을 만들었다고 치면. 그 법을 만든 이후에 과자를 먹은 행위에 대해서는 처벌 할 수 있지만, 그 법이 있기 전에 과자를 먹으면 처벌 당하지 않던 시절의 행위를 나중에 과자를 먹으면 처벌한다는 법을 만들어서 처벌하면 안됀다는 것.)

에 어긋난다고 각하시켰다.


김영삼이 집권 초창기에는 거의 93%정도의 지지율을 기록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지만 집권 중후반기에는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등등으로 인기가 매우 하락하고, 당시 누가 사석에서 노태우의 차명계좌에 대한 이야기를 누가 해서 이게 언론에 나오고,

결정적으로 베이징에서 김대중이 나도 노태우한테 몇십억 돈을 받았다고 양심고백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대중 입장에서 김영삼을 궁지로 몰려고 한 행동인데, 세간에서는 가뜩이나 인기가 떨어지던 김영삼에게 김대중 조차 노태우에게 돈을 받았는데, 3당합당으로 대통령된 김영삼 도대체 얼마를 쳐 먹은거야 이런 여론이 팽배 해 있었다.


김영삼은 이런 위기를 타개하고 김대중과 야합해서 518특별법을 만들고 일단 전두환과 노태우를 일단 먼저 잡아 가두고 죄를 만들었는데, 사회에 분노여론을

전두환 노태우 저거 쿠데타로 집권해서 비자금 조성하고 광주에서 학살한 놈들이야 이런 식으로 전두환 노태우에게 몰아갔다. 노태우에게 돈을 얼마나 받은 거야 라며 화살이 김영삼에게 쏠렸는데 이것 여론을 일시에 전두환 노태우에게 돌린 것이다.

이게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다. 이것 자체는 역사학자도 아닌 정치권력이 역사를 거꾸로 뒤집은 정치재판으로 소급법 원칙 일사부재리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그것 자체로 위헌적 재판이다.

재판문도 거의 코메디다.

역사바로 세우기 재판의 논리는 법조문에 있지 않고 자연법에 있다고 한다. 자연법은 곧 여론법이라고 한다. 여론으로 재판 스스로 인민재판했다고 자임하는 꼴이다. 얼마나 법조문에 있지도 않은 논리로 유죄를 만들었으면 이런 소리까지 하겠는가

전두환의 마음을 관심법으로 보니 대통령이 되려는 야망이 있었다고 한다. 전두환이 기무사령관으로 여러 시국수습 방한에 대해 최규하에게 보고나 의견을 올린 것은 마음속에 대통령이 되려는 생각이 있어서 한 행위이기에 그런 행위는 내란이다.

광주사건 때 최규하가 물러나라고 시위한 소위 시민군은 헌법을 수호하려고 한 준헌법기관(?)이다,

이 준헌법기관을 진압하고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지 못하게 한 것은 내란(?)이다.

12.12 때 최규하가 재가를 한 것은 최규하가 총리공관을 지키는 경비병력에 공포를 느껴서(?) 재가 한것으로 무효이다.

등등

광주쪽 사람이나 좌파들이 이 재판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대법원에서 조차 쿠데타고 광주를 민주화 유공자라고 했다. 하는데 철저하게 편파적으로 재판이 진행 되었다.


5공쪽 사람들은 증언을 신청해도 거의다 기각하고 반대쪽 검사들은 증언 신청하면 거의 다 받아 줬다.

정치권력이 역사를 거꾸로 세운 것이다. 이 희대의 정치재판으로 12.12는 황당하게 군사반란 쿠데타로 정의되고, 518은 성역화 되었다.

당시 행적으로 보는 개인 평가

-최규하 대통령: 국군통수권자는 10.26이후 총리였던 최규하였다. 이 당시는 권한대행도 아니라 정식 대통령이었다. 10.26이후 급작 스럽게 국군통수권자가 되었어도, 군내 충돌이 나는 상황이라면 군통수권자인 최규하가 나서서 군내 충돌을 중재해야 하는 게 맞다.

국군통수권자인 최규하는 군내 충돌 상황에서 국방부 장관불러 오라는 소리만 하고 아무 것도 안했다.

최규하가 적극적으로 중재하고 명령을 내렸다면 12.12 양상은 달랐을 것이다. 10.26 밤도 그렇고 12.12 때도 그렇고 국가위기 상황에서 최규하의 대응은 거의 0점에 가깝다.

애초에 10.26일 날 기회주의적으로 행동을 했고, 정승화가 10.26사건의 준공범자니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에 해임 시켰어야 한다. 밑에 있는 노재현과 함께 12,12 사건에 크나큰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죽을 때까지 침묵을 지켰기에 정치보복을 당하지 않았지만, 전두환이 억울하게 비판을 받는 데 크게 일조를 했다.




-노재현 국방부장관: 공관에서 총소리가 나자 국방부장관이라는 사람이 9시간 동안 도망을 다녔다. 그리고 대통령이 계속 호출하는데도 이에 불응하고 잠수를 타면서 도망만 다녔다.

전두환 회고록을 보면 전두환이 정승화 연행에 대해서 건의하자 계속 건의를 묵살 했다고 한다. 절대 권력을 가진 정승화 거의 한패 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전두환 회고록에서는 총소리를 듣자 정승화가 날라가면 같은 배를 탔던 노재현 본인 운명도 날라갈 것을 예감하고 도망을 간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그런 걸 떠나서, 국방부장관이라는 사람이 군내 충돌 상황에서 도망만 다니고 대통령 호출해도 불응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초급장교 소위 중위도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됀다.

12.12사건을 보면 총리도 그렇고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 중앙정보부장, 경호실장 등등 박정희 정권 말기의 인사 실패를 확인 할 수 있다.

그나마 전두환을 파격적으로 중장이 임명되는 게 관례인 보안사령관을 전방사단장이었던 소장 전두환을 임명해서 박정희를 배신한 김재규와 정승화 군벌의 반란을 진압했으니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으로 임명한 건 유일하게 신의 한수가 되는 인사였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 아니었으면 김재규가 집권 했을지도 모른다. 10.26 상황에서 전두환이 기회주의적으로 놀지 않고 이렇게 행동했기에 그것을 기반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이 사람은 10.26 부터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12.12때도 순순히 허삼수와 우대령 둘이 총장님 같이 가시죠 할 때 연행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반발했고, 우대령 공관에 있는 누군가에 총에 맞아 하반신 마비까지 되게 했다.

- 장태완 수경사령관: 수경사령관은 대통령과 수도 서울을 지키는 친위부대장이다. 그럼에도 이날 수경사령관이라는 장태완은 정승화 개인에 대한 충성심만 있었고, 수도 서울 대통령 있는 총리 공관 인근 부대 30경비단을 야포로 쏘라는 둥 수도서울 중앙이 불바다가 되서 민간인과 대통령이 죽든말든 신경도 안쓴, 술에 취한 상태로 이성을 잃은 미친명령을 남발한 사실상 망나니였다.

병력을 동원하지 말라는 국방부장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먼저 병력을 동원했고, 정승화를 구하기 위해 국군통수권자이자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헬기로 납치할 계획까지 짰다. 정승화 개인에 대한 사적 고마움 이거 하나에 집착해서 완전히 이성을 잃고 폭주했다.

그나마 이성적인 수경사 장교들이 명령을 거부해서 수도 서울 중앙이 불바다가 되고, 국가위기 상황에서 국군내 대규모 유혈충돌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을 전두환의 반대급부로 정당하고 참군인인냥 띄우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1:1로 보고하는 직보하는 체계가 관례였다는 것을 최규하에게 이야기하면서, 사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의 전권을 위임받은 사람이기에 대통령에게 재가를 구할 필요가 없음에도 대통령에게 찾아가 정승화 연행에 대한 정당성과 재가를 읍소했다.

장태완은 대통령 국방부장관에게 보고는 커녕 명령을 거부하고 완전히 생까서 먼저 병력을 무단으로 동원했고, 대통령을 납치할 계획까지 짰다.

반란 쿠데타를 한건 전두환이 아니라 도리어 장태완 김재규 정승화다. 미친명령을 남발해서 부하들이 단체로 명령거부했고, 결국 수경사 헌병단 부하에 의해 체포 되어서 상황이 종료 되었다. 장태완이야 말로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기를 파격적으로 임명한 정승화 개인에 대한 생각만 하고 이성을 잃은 미친명령을 남발하다가 그나마 이성적인 판단을 한 부하들에게 제압당한 그야 말로 추태를 부린 똥별이다. 도망만 다닌 노재현도 웃기지만, 장태완 이것도 이런 자리에 있어서는 안돼는 사람이다. 이런 장태완을 수경사령관으로 임명한 정승화라는 사람도 알만하지 않나

- 전두환 보안사령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의 전권을 위임받은 합수본부장으로서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 계엄하에 계엄사령관으로서 절대 권력을 누리는 정승화와 김재규 군벌이 막강함에도 10.26 이후 많은 인물들이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했지만, 전두환은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걸었다. 국가위기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정당한 임무수행을 했음에도 얼토당토 하게 뭔 쿠데타를 했다는 둥 황당한 누명을 쓰고 있다. 전두환이 그 당시 기회주의적으로 좋은게 좋은 거다 하고 타협했다면 그 다음에는 김재규의 혁명3단계 계획에 의해 김재규가 대통령이 되어서 김재규의 쿠데타가 성공하고 김재규와 정승화가 지배하는 세상 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김재규를 체포한 것도 전두환이며, 김재규 정승화 군벌의 반란(12.12)을 제압한 것도 전두환이다 10.26 이후 상황에서 이를 수습하는데 2스타에 불과한 그의 공이 가장 컸기에 그가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에 총애를 입은 사람은 많다. 위에서 열거한 최규하, 김재규, 노재현, 정승화, 전두환 등은 모두 박정희에 총애를 받고 또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다. 모두 박정희가 고위직에 임명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박정희가 죽어서 권력이 무주공산 상태가 되었을때 눈치를 보고 권력이 어디로 가나 그런 것만 살핀 사람들이었다. 아예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와 거기에 가담한 정승화는 아예 박정희를 배신한 사람이고. 전두환만이 이런 상황에서 좌고우고 하지 않고 김재규와 그의 군벌의 반란을 진압하여 박정희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좌파들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에 대한 전권을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전두환의 정당한 임무수행을 무슨 쿠데타나 하극상인냥 왜곡 호도하고 있다.

참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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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