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6일날 단행된 전국비상 계엄 조치를 말한다.


10.26 이후에 계엄은 제주도를 뺀 계엄인데 이 날 이후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계엄이 되었다.

전국계엄이 되면 내각이 무력화 된다. 원래 김재규는 전국계엄을 선포하려고 했지만, 내각에서 반대해서 제주도만을 뺀 계엄이 되었다.

만약 10.26 직후 때 김재규의 의도대로 전국계엄이 되었으면, 김재규의 반란이 성공했을 수도 있다.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에 들어선 과도정부인 최규하는 1년 과도기를 갖고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다.

그리고 박정희 때 시국사범들 긴급조치 등으로 구속되거나 정치활동이 금지당한 인사들은 사면 복권 해 준다.


이게 좌파들이 말하는 서울의 봄이다. 직선제로 개헌할 경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중 한명이 거의 유력하게 대통령이 되는 상황이었다. 1년 정도만 기다리면 되는데


김대중김영삼최규하 정부를 유신잔당이라고 규정. 최규하를 물로 보고 즉각 퇴진을 요구하며 학생 소요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극한 투쟁에 들어간다.


권력 공백기에 북한의 남침 위협이 공존하는 가운데 학생 소요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과격화 되어, 남대문 앞에서 전경을 버스로 깔아 뭉개고 청와대로 돌진 까지 하려고 하는 등(서울역 회군사태) 가면 갈수록 소요 사태는 격화 된다.


특히 김대중은 신민당내에서는 김영삼에게 밀리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대통령이 되기 힘들다고 봤다. 그래서 특유의 길바닥 정치를 가동하는데, 5월 특정 시기 까지 최규하 내각이 사태를 하지 않으면 전국에 민란을 일으키겠다고 최후 통첩까지 하게 된다.


국가위기 상황에서 도저히 경찰만으로는 치안유지가 힘들다 보고 비상각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전국계엄이 선포 되고, 민란을 일으키겠다고 한 김대중을 잡아 들이게 된다.


이게 5.17 전국 비상 계엄 조치다.


김영삼에 역사 거꾸로 세우기 재판에서는 도리어 정부 상대로 민란을 일으키겠다고 한 김대중이 아닌 그런 김대중을 잡아들인 5.17 조치를 내란으로 규정했다.


5.18에 배경이 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은 아예 정부 내각까지 짜놓은 상태였는데, 민란을 일으키겠다는 사전준비와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요구로 터진 게 5.18이다.

김영삼 김대중 이 세 사람이 최규하를 물로 보고 극한으로 몰고 가지만 않았다면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두환은 군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대통령이 시해 되고 국가위기 상황에서 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은 자기 대통령 될 욕심만 부리고, 학생 소요나 극한으로 부추기는 짓을 한 것이다. 특히 김대중은 아예 정부 상대로 민란을 일으키겠다고 협박 최후통첩까지 했으니


참고 영상: [깨진 링크][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