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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09010023920202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3-09-01&officeId=00023&pageNo=2&printNo=4396&publishType=00020 十九道溝(십구도구) 馬賊襲擊詳報(마적습격상보)] 1933.09.01 조선일보 2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09010023920202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3-09-01&officeId=00023&pageNo=2&printNo=4396&publishType=00020 十九道溝(십구도구) 馬賊襲擊詳報(마적습격상보)] 1933.09.01 조선일보 2면
:마적이 조선인 지주 김정부(金鼎富)에게 아편 열개와 현급 백원을 요구하고 그외 동리 여러 집에서 아편 이십개와 현금 백원을 오는 구월 사일 이내로 납부하라고 명령.
:마적이 조선인 지주 김정부(金鼎富)에게 아편 열개와 현급 백원을 요구하고 그외 동리 여러 집에서 아편 이십개와 현금 백원을 오는 구월 사일 이내로 납부하라고 명령.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10050023910402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3-10-05&officeId=00023&pageNo=4&printNo=4430&publishType=00010 個人(개인)의 出金(출금)으로 陸上競技會開催(육상경기회개최)] 1933.10.05 조선일보 4면
:김정부(金鼎富, 69세, 평북 의주 출생)씨가 20여년전 장백으로 와서 땅을 개간하며 큰 재산을 일구어 마을 사람들의 경조사에 큰 도움을 주고 있음. 사재 100원을 출연하여 장백현내 각 조선인 학교 학생들을 초청하여 육상경기대회 개최.


==김일성 회견==
==김일성 회견==

2020년 10월 16일 (금) 15:52 판

김정부(金鼎富)는 1920년대에 만주 장백현(長白縣) 19도구(十九道溝)에서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1][2] 제5지단 지단장 등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했고, 이후 같은 지역에서 종산학교(宗山學校)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1936년 8월 31일 동북항일연군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어 갔다가 이듬해 1937년 3월 3일 구출되었다. 장백현 19도구 마을은 김일성 부대에 자주 약탈을 당했고, 그가 운영하던 종산학교도 그가 납치되어 있던 기간인 1937년 1월 김일성 부대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그를 납치하고 괴롭히던 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김일성 회고록 5권의 "애국지주 김정부"에는 자신은 김정부와 별 관계가 없었음에도 그가 마치 자신의 일에 우호적이어서 많은 도움을 자원해서 준 것으로 조작해 놓았다. 동북항일연군의 수많은 양민 약탈행위들을 양민들이 자원해서 자신들을 도운 것으로 둔갑시켜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약력

  • 1913년 11월~12월 : 이동휘(李東輝, 1873~1935)가 주도하는 일종의 자치조직인 장백현 내(長白縣 內) 한교동사회(韓僑董事會) 설립(設立)에 참여.[3][4]
여기의 김정부(金正富)는 한자가 다르나 동일인인 듯함.
이 때는 청나라가 망한 직후이고, 러시아 공산혁명 이전이므로 공산주의와는 무관한 조직으로 보임.
  • 1921년 11월 30일 : 장백현 19도구 소제양동(長白縣 十九道溝 小濟陽洞) 소재 군비단(軍備團) 장백부(長白府) 구역구장 및 모집원(區域區長及募集員)으로 활동.[5]
김정보(金正甫) : 평남, 51세 - 이름이 약간 다르나 동일인으로 보임.
  • 1922년 01월 16일 : 장백현 19도구 소암리(巢岩里) 소재 군비단(軍備團) 제5지단의 지단장.[6]
김정부(金鼎富, 50세)
  • 1925년 04월 15일 : 대한독립광정단 남부 부장(大韓獨立光正團 南部 部長)[7]
김정부(金鼎富) : 평북출신, 52세, 19도구 계양동(桂陽洞)
  • 1926년 9월 : 중국이주동포 조선시찰단의 일원으로 조선 각지를 시찰.[8]


이후 김정부(金鼎富)는 고령으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중국정부로부터 수백 정보의 땅을 얻어 일구는 지주가 되고, 종산학교(宗山學校)를 설립하고 운영하지만, 잦은 마적단의 침입으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약탈과 납치를 당하는 등 수난을 겪는다.

작년(1927년)에도 김정부의 아들과 손자가 마적에 납치당했다고 함.
同胞四名生還(동포사명생환) 1933.06.13 동아일보 2면
김정부의 아들 김만두(金萬斗) 등이 마적에 납치당했다가 생환함.
마적이 조선인 지주 김정부(金鼎富)에게 아편 열개와 현급 백원을 요구하고 그외 동리 여러 집에서 아편 이십개와 현금 백원을 오는 구월 사일 이내로 납부하라고 명령.
김정부(金鼎富, 69세, 평북 의주 출생)씨가 20여년전 장백으로 와서 땅을 개간하며 큰 재산을 일구어 마을 사람들의 경조사에 큰 도움을 주고 있음. 사재 100원을 출연하여 장백현내 각 조선인 학교 학생들을 초청하여 육상경기대회 개최.

김일성 회견

양일천 기자가 작성한 잡지 《삼천리(三千里)》에 실린 아래 2건의 기사에는 납치당한 김정부가 김일성을 회견하며 나누었던 대화가 나온다. 김일성 회고록 5권의 "애국지주 김정부"에 나오는 김일성이 부하가 납치해왔다는 김정부와 나눈 대화와는 전혀 다르며, 김일성 회고록이 조작되었다는 증거이다. 보통 《삼천리(三千里)》 1937년 10월호의 기사만 알려져 있고, 1938년 11월호에 나오는 후속편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김일성 회고록 편집자가 이를 보지 못하고 엉터리로 조작한 것같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