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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휘보(思想彙報)≫ 1939년 9월호에 나오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
- 출처 :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 第一. 所謂 惠山事件の 槪要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朝鮮總督府 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1939.09.01) pp.8~9.
咸南國境地帶鴨綠江對岸に蟠踞する所謂金日成一派と稱する匪團は同軍第一路第二軍第六師であって、金日成を師長とし魏民生を政治委員とする鮮滿人混合の武裝匪團である (金日成の身許に付ては種々の說があるが本名金成柱當二十九年平安南道大同郡古坪面南里の出身で幼時實父母に伴はれ間島方面に移住し同地方に於て成人し匪團に投じた鮮人であると云ふのが最も確實であつて現にその實母は生存してゐる由である。)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 pp.8~9.
사상휘보의 이 기록을 근거로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 동일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혜산사건(惠山事件) 설명에는[1]
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은 1937년 11월 13일 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2년여 뒤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이 활동할 시기의 것이다. 총독부 검사국 사람들이 서울에 앉아서 더 이상 활동이 없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시기이므로, 이는 당시 알려진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의 신원을 이름이 같은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 착각하여 쓴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고 했으니, 전사했다는 설, 제2방면군장과 같은 사람이라는 설 등 여러가지가 있었을테고, 정확히 어느 것이 맞는지 서울에서 확인하기도 어려우니 동일인이라는 설을 채택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실제의 6사장이 아닌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기록이라는 것은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는 말에서 드러난다. 간단한 신원기록에 부친도 아닌 모친의 생존여부가 언급된 것은 특이하며, 북한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은 이미 7년전인 1932년 7월에 사망하여, 실제와 맞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말이 들어간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1939년 당시 일제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에 대한 귀순공작을 벌이고 있었는데, 김일성의 조모 이보익(李寶益, 1876~1959)을 만주로 데려가서 귀순을 설득하도록 시도했다. 이런 특별한 일이 있었으니, 조모를 모친으로 착각했다면 위와 같은 기록이 나올 수 있다. 물론 조모를 데려갈 정도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은 상당히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일까지 감안하면 위의 기록은 당시 파악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을 동일인으로 잘못 알고 6사장 김일성의 신원으로 적은 것에 불과하다.
6사장 김일성의 활동기간에 작성된 문헌에 나오는 신원기록들과 전혀 다른 신원정보를 그의 활동이 끊어진 2년 뒤에 새로이 알아낸다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다.
- ↑ 혜산사건(惠山事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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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 2022년 2월 27일 (일) 11:14 | 5,387 × 4,114, 2쪽 (1.79 MB) | JohnDoe (토론 | 기여) | 1939-09 사상휘보 6사장 김일성 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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