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백(成始伯, 1905 ~ 1950.06.27)은 해방 직후 남파되었던 거물 간첩으로, 1948년 남북협상 당시 김구, 김규식이 방북하도록 공작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50년 2월 체포되어, 북한이 남침을 개시한 직후 6월 27일 처형되었다. 아들 성자립(成自立)[1]은 북한의 김일성대학 총장 등을 지냈다.

생애

성시백의 해방전후 행적에 대한 증언

고준석 설

고준석(高峻石, 1910~ ?)[2]은 일제시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해방 전후 한국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의 방북 당시 북행에 동행했다. 북한으로 가지 않고 6.25 이후 일본으로 밀항하여 거기서 살았으며, 해방전후 남북 문제에 관한 다수의 일본어 저술이 있다.

성시백(본명 정향명(鄭向明))은 평안남도 출신(황해도 출신이라는 기록도 있다)으로 25세 때 상해로 망명했고, 1932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서안, 무한, 중경 등지에서 활동한 고참 공산주의자이다. 그는 1945년 8월 15일에 조선이 해방되자 중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아 1946년 12월에 상해에서 뱃길로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곧 서울로 상경해 아지트를 설치하고 중국과의 연락선 설치를 위해 평양으로 가 김두봉, 김일성을 만났다. 이때 김두봉, 김일성으로부터 ‘남한의 정세가 대단히 긴박합니다. 우리 일에도 협력해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고 5일간에 걸친 김일성, 김두봉과 성시백의 3자 회담이 진행되어, 성시백선과 북한측의 연락을 북로당 중앙조직부장인 허가이(소련파)와 부부장인 김호(연안파)가 맡게 되었다. 조직상으로는 이렇게 됐지만 실제로는 김일성 직속의 선이었다.
후에 김일성은 자신이 성시백을 남한에 파견한 것을 박헌영에게 알렸다. 성시백은 1947년 3월에 남하하면서 서울시 서소문동에 아지트를 두고 활동을 개시했다.

고준석 저, 유영구 역,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도서출판 글), pp. 231-232.

박병엽 설

박병엽(朴炳燁, 1922년 ~ 1998년)은 북한 노동당 고위 간부 출신으로 제3국에서 검거되어 한국에 와서 살며 저술활동을 한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서용규(徐容奎), 신경완(申敬完), 신평길 등의 가명 또는 필명을 사용했으며, 본명은 그의 사후에 공개되었다. 아래는 성시백에 대한 그의 증언이다.

성시백은 원래 황해도 해주 출신이고 50년에 사형당할 때 46세쯤 됐던 걸로 기억 된다. 해주의 그의 집안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중학을 서울에서 다녔으며 3․1운동을 중학시절에 맞았다. 3․1운동에 참가했던 성시백은 그 뒤에 공산주의 사상에 접해 1925-26년간에는 초기 공청(共靑) 활동에도 참가 했던 것으로 안다.

그 뒤 20년대 말에 중국 상해로 가서 고학을 하며 학교를 다니다가 30년대 초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에서 그가 맡아 수행한 임무는 미해방 지구, 즉 국민당 통치지구에서의 지하공작이었다. 그가 주로 활동하던 곳은 서안이었는데 활동 당시에 국공합작 문제로 주은래가 그곳에 와있을 때였고, 그런 인연으 로 성시백은 주은래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다. 그 뒤 성시백은 중경, 무한 등지를 옮겨 다니며 국공합작에 필요한 지하공작을 전개한다.
그가 중국에 건너간 뒤 처음에 상해에서 활동하고 나중에는 중경에서도 활동한 인연으로 임시정부 관계자들, 광복군 계통과 폭넓은 교유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이런 경력이 나중에 그를 대남공작의 최적임자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유영구, 『남북을 오고간 사람들』 (도서출판 글, 1993), pp. 17-18.

성시백의 대남 비밀조직 운영 스타일 (박병엽 증언)

성시백은 유형의 조직을 가지거나 조직적 체계를 세운 일이 없다. 이것이 원칙이었다. 만일 그의 활동팀이 이름을 갖추고 체계를 갖춘 조직이었다면 박헌영으로부터 시비 거리가 됐을 것이다. 박헌영도 성시백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성시백은 무형의 조직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정보조직적, 정치중계적인 성격을 갖고 활동하게 된 것이다. 만일 조직적 체계를 갖추고 명칭을 가졌더라 면 박헌영이 시비를 걸었을 가능성이 컸다. 또 원칙적으로 보더라도 남쪽에 남로당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별도로 북로당이 남쪽에 조직을 꾸려놓는 일은 곤란한 문제였다.

따라서 ‘남조선정치공작위원회’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나중에 지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북로당에서 내부적으로 ‘서울공작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는 했으나 이것 또한 명시적으로 붙인 이름은 아니었다. 그냥 그런 이름으로 통했을 뿐이다. 남로당 쪽과 구별하기 위해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성시백의 조직은 조직체계를 갖추지 않은 무형의, 무명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성시백이 추진한 사업과 사람관계는 엄청난 것이었다. 북쪽에서는 뒷날 두고두고 남로당은 남한 혁명사업을 다 말아먹었지만 성시백은 많은 일을 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정치적으로 남한의 정치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역할한 것이 높게 평가됐기 때문이다.

유영구, 『남북을 오고간 사람들』(도서출판 글, 1993), pp. 15-16.

참고 자료

김구의 방북을 설득한 거물 남파간첩 성시백(成始伯, 1905 ~ 1950) 관련 특집기사임.
  • 유영구, “거물간첩 성시백 프로젝트” 상, 『월간중앙』 1992년 6월호, pp.634-667.
유영구, “거물간첩 성시백 프로젝트” 하, 『월간중앙』 1992년 7월호, pp.?~?.

각주

  1. 성자립 위키백과
  2. 고준석(高峻石, 1910 ~ ?) : 동경형사지방재판소 수형인명부 - 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