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당시 임시정부 주석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 한독당(한국독립당) 당수로, 신탁통치 반대 운동, 남북협상 등 정치활동을 했으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1949년 6월 26일 암살 당했다. 초명은 김창수(金昌洙)이다.

생애

1896년 치하포(䲭河浦) 사건

1896년 3월 9일 백범 김구(金昌洙)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䲭河浦)에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타살한 사건이다. 김구는 무역상인 또는 약장사[賣藥商人]로도 언급되는 스치다를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 육군중위로 판단했다고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 《고종시대사 4집 > 建陽 元年 3月 31日 (1896년 3월 31일)》에도 스치다가 일본인 육군중위로 나오는데 김구(김창수)의 주장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 3月 9日에 김창수(金昌洙, 金九)가 대동강(大洞江) 하류(下流) 치하포(治下浦, 䲭河浦)에서 일본인(日本人) 육군중위(陸軍中尉)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을 살해(殺害)하였었던 바 이 날 일본판리공사(日本辨理公使)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1855~1911)가 외부대신(外部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조회(照會)하여 즉시 가해자(加害者)를 나포(拿捕)하여 처벌(處罰)할 것을 요구(要求)하다. 이완용(李完用)이 조복(照覆)하여 해범(該犯)을 각기형포(刻期 詗捕)하여 안율 징판(按律 懲辦)할 것임을 회답(回答)하다.
출전 外記 建陽 元年 4月 1日·4日
舊韓國外交文書 第3卷 日案 3988號 建陽 元年 3月 31日
舊韓國外交文書 第3卷 日案 3996號 建陽 元年 4月 4日
白凡逸志 78面∼87面

그러나 1896년 05월 30일일자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 의하면 피살된 스치다는 일개 매약상(賣藥商)에 불과하다.

당시 주한 일본 외교공관이 작성한 다른 기록을 보아도 스치다는 상인으로 나오며, 일본군 중위가 아니므로, 김구는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것이다.

도진순 교수는 피살된 스치다가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1] 소속 상인이라고 주장했으나[2], 계림장업단은 사건이 일어난 몇달 뒤에 결성되었으므로[3][4][5]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6]

치하포 사건 관련 원자료

各司謄錄 6 > 京畿道篇 6 : 忠淸道篇 1 > 仁川指訓 > 建陽元年七月九日 (1896년 07월 09일)
各司謄錄 근대편 > 內部來去文 09 > 안악군 치하포에서 김창수(김구) 외 2인의 일본인 살해에 관한 조회 : 建陽元年七月十二日 ( 1896년 07월12일(음) )
各司謄錄 6 > 京畿道篇 6 : 忠淸道篇 1 > 仁川報牒·謄本·來報 1 > 建陽元年九月十二日(1896년 09월 12일)

조선 주재 일본 공관의 보고서

7. 雞林獎業團의 성황 및 행상 단속상의 편의

雞林獎業團은 창립 이래 점차 단원을 증가시켜 현재원 303명에 달하고 그 밖에 京城에서 입단 신청을 했으나 아직 입단 수속을 마치지 않은 자가 수십 명 있다. 이 총인원의 내역은 平壤 행상 중인 자 63명, 開城 동 15명, 釜山에 현재 거주하는 자 5명, 當港 동 220명이다. 또 同團은 지난날 이래 그 主意와 목적을 발표하고 團 자금을 갹출하여 집중시켰는 바, 當港에서만 모집한 금액이 1,000圓이 되어 드디어 규약 수행의 단계에 이른 것 같다. 또 지난날 군함 愛宕에 편승하여 평양 지방으로 출장시킨 當館 소속 순사의 보고에 의하면, 행상인의 단속이 매우 빈틈이 없고 공무상 편의가 적지 않다고 한다. 기타 행상 지방의 정황과 商況 등에 대하여 同 단원이 본부에 전한 통신은 직접적으로 당관에 참고가 되는 것이 적지 않아 당관은 크게 편의를 얻을 수 있는 형편이다.
8. 평양 출장한 순사의 서신 요지

평양 출장을 위하여 군함 愛宕에 편승한 당관 순사 3명은 지난 7일 黃海道 安浦에 상륙하였고 그곳에서 水路로 평양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8일이었다. 愛宕艦은 그곳에 도착한 전후 乘組 軍醫長이 자살을 기도하여 앞서 희망했던 평양 시찰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바로 닻을 올려 佐世保로 향하여 回航하였다(이달 21일 동 함장으로부터 무사히 吳軍港으로 들어가 4, 5일간 선체 수리를 마치겠다는 뜻으로 본관에게 報知가 있었음). 이 일행은 평양에 들어온 다음날 府廳에 가서 土田讓亮의 가해자 수색 유무를 물었더니, 10일 전 이 건에 관하여 외부로부터 통첩이 있어 바로 관할 관청인 海州府에 이첩했다고 답하였다 한다. 그렇다면 이 건은 지난 4월 4일 외부대신이 당국 정부가 수사를 담당하여 상당한 명령을 이곳 지방관에게 통첩할 것을 승인한 이래 만 2개월이 헛되이 지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정부가 중요사건의 처분을 지체시킨 것을 놀랍게 참고 견딘 것이다. 또한 이 일행은 재류 행상자 시찰을 마치고 14일에 이르러 평양부 순검 5명을 이끌고 해주부로 향해 출발했다고 했다. 그 후의 상황은 後報를 기다려 보고하겠다.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8090172500、韓国暴徒ノ為本邦人被害関係雑件(5-3-2-0-14)(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2.仁川領事館/(4)長崎県民土田譲亮治下浦ニ於テ暴民ノタメ遭難ノ件 (1896년 6월 29일)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8090172600、韓国暴徒ノ為本邦人被害関係雑件(5-3-2-0-14)(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2.仁川領事館/(5)山口県民蛭子音三郎踪跡不明ノ件 (1896년 7월)
p.2 인천항 정황보고에 土田讓亮 건이 나옴.
7. (5行 불명) 청구해두었던 건은 이미 보고한 바 있었는데, 위 金昌洙 및 관계자 李化濟는 이달 13일 仁川에 도착했다. 감리가 왔다 간 후 날짜를 정하여 立會 재판을 개시하도록 기약이 되어 있으므로 재판의 결과는 후일 보고하겠다.

해방전 활동

  • 김구(Kim Koo)가 서명한 임시정부의 대독선전포고문 : 1945.02.28
The Declaration of War on Germany by Korean provisional Govt : 1945.02.28 인도 국립공문서관 소장 한국독립 및 정부수립 관련 자료

일본 아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좀 이상해 보인다.


남북협상

김구는 1947년 12월 1일에 소련이 UN의 남북동시총선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야하고, 이를 두고 남한 단독의 정부수립이라고 부르면 안 되며, 북한 지역은 추후에 조건이 되면 선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南北을 通한 選擧아니라도, 政府는 統一政府, 金九氏·聲明發表 婦女日報 1947.12.02


그러나 12월 2일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 1894 ~ 1947.12.02)가 암살되고, 이후 그가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7] 법정에 나가 증언도 해야하는 등의 일을 겪으며[8], 이승만과 사이가 나빠지게 되고, 남한 단독의 5.10 총선 반대로 선회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을 추진한다.

남북협상은 1948년 5.10 총선거 직전인 4월 하순 ~ 5월 초순 남한 인사 200~300명이 방북하여 평양에서 열렸다.


양김씨(김구, 김규식)가 평양으로 출발도 하기 전에 북한 방송은 그들이 이미 항복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김구는 4월 19일 청년학생들이 경교장 앞에서 그의 방북을 가로막자[9] 담을 넘어 북행을 결행하였고[10], 5월 5일에 돌아왔다.[11]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1면
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 기자들에게『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5월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레베데프 비망록의 내용으로 보아 김구가 김일성에게 북한에서 노후를 보낼 과수원을 달라고 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일 수도 있는 것 같다.[14]

서울 귀환 후

방북했던 김구, 김규식은 5월 5일 저녁 서울에 귀환하여 성명을 발표했다.




  • 김구(金九) - 유어만(劉馭萬, Liu Yuwan) 대화 비망록 전문(全文) : 1948년 7월 11일. 원문은 영문임.
유어만(劉馭萬, Liu Yuwan)은 서울주재 중국(장개석 정부) 총영사
Record of Conversation between Kim Gu and Liu Yuwan : July 11, 1948 Wilson Center : 영문 원문
조갑제(趙甲濟), 이화장에 있는 ‘金九-류위완 대화 비망록’ 全文 공개 : 金九, “공산군 곧 남침, 공화국 세울 것”이라면서 주한미군 철수 주장 월간조선 2009년 9월호
조갑제(趙甲濟), 金九가 유어만 중국 공사와 나눈 대화록: 金九는 북한이 남침할 것을 알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였나? 조선 pub 2014-10-27
류근일, 김구 선생이 단독정권(대한민국)수립 반대한 것은 사실 - 이인호 이사장은 역사적 사실을 말했을 뿐 조선 pub 2014-10-24
미군정 사령관 하지 장군(CG, Commanding General)이 1947년 12월 13일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JCS, Joint Chief of Staff)에 보낸 전문. "경찰청장 장택상(Police Chief Chang)의 정보에 의하면 장덕수 암살범의 자백이 김구를 암살을 사주한 사람으로 지목하고 있다. 만일 이 사실이 증거로 뒷받침된다면 김구를 살인죄로 미국 법정에 기소하는 것이 사령관(CG, 하지 장군)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암살 사건 연루 혐의

해방 직후 송진우(宋鎭禹, 1890~1945.12.30), 여운형(呂運亨, 1886~1947.07.19), 장덕수(張德秀, 1894~1947.12.02) 등 주요 정치인에 대한 3건의 암살 사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주장과 혐의가 있으나 사실로 분명히 확인되지는 않았다.

미군정 기록에 의하면 경기도 경찰부장 장택상(張澤相, 1893~1969)이 1945년 12월 중순 임정 요인들이 참석한 저녁 모임에서 들었다는 말이 나온다. 대화의 내용은 좌파들은 미군정 당국이 축출할 것이고, 김구에 대적할만한 사람은 송진우 뿐이므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듣고 송진우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으나 송진우는 그럴 리가 없다며 별로 조심을 하지 않아 당했다고 하였다.[15]


역시 미군정 기록에 의하면 여운형 암살범 한지근이 자기는 송진우 암살에 연루된 한현우가 이끄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고 실토했고 한다.[16]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의 배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장덕수 암살범은 한독당원이었기 때문에 미군정은 김구가 배후라는 혐의를 두고 있었고[7], 이 때문에 김구는 법정에 나가 증언도 해야 했다.[8] 김구는 이승만에게 하지 장군에게 이야기하여 법정에 나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승만이 들어주지 않아 이 때문에 이승만과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하지 사령관과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고, 장덕수나 유가족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어 김구의 청을 선뜻 들어줄 상황도 아니었던 것 같다. 장덕수 암살을 김구가 직접 지시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한독당 인물들이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17]

김구 어록

김구나 신익희 같은 분들은 "일제시대에 국내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라는 발언을 하였다.[18][19]

Mark Gayn (1909~1981),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

[November 7, 1946 SEOUL] With characteristic bluntness, Kim Koo said: "Practically everyone in Korea is a collaborator. They all ought to be in jail."

[1946년 11월 7일, 서울] 김구는 특유의 퉁명스러운 어조로 "한국 내에 있은 사람은 사실상 모두 일제 협력자다. 그들은 모조리 감옥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서울, 東亞日報社, 1981) p.329

이 해(1945년) 12월 중순의 일이다.... 술기운 탓도 있겠지만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20]
  • Mark Gayn은 Chicago Sun 지의 일본 동경 지국장으로 1946년 가을 취재차 한국에 와서 김구, 이승만 등도 만났었다. 당시 일들이 나오는 《Japan Diary》는 김구 생전에 출판되었다.


해방 후 김구의 거처 경교장(京橋莊)은 금광업자 친일파 최창학(崔昌學, 1891~1959)이 자신의 별장을 제공해 준 것이다. 친일파를 감옥에 보내는 대신 별장을 제공받은 것인가?

해방 후 귀국한 임시정부 인사들의 안하무인식 언행에 불만을 토로한 사람들이 많았다.

관련 자료

각주

  1.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주해본 펴낸 도진순 교수 "국민 애독서'백범일지'참모습 찾았죠" 경향신문 1997년 8월 13일자, 19면
  3. 1896-04 : 의병운동으로 인천에 철수한 일본인 상인, 무장행상단체인 鷄林奬業團 조직 (회원 219명). 시대별연표 > 근대사연표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 1896-05-22 : 일본상인 무장행상단체 鷄林奬業團, 평양에 第1大區 설치. 시대별연표 > 근대사연표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 한철호(韓哲昊), 鷄林奬業團(1896-1898)의 조직과 활동 사학연구 제55.56호 1998.09 pp.629-650
  6. 김구考...치하포사건과 계림장업단 - 眞明行 - 티스토리
  7. 7.0 7.1 유어만(류위완, 劉馭萬) 중국 총영사의 代電 제119호 : 1948년 4월 20일 - 김구가 장덕수 암살에 연루된 혐의가 적지 않다고 했다.
  8. 8.0 8.1 Kimm Koo refuses to identify Kim Suk Whang, reputed leader of the ten who conspired to assassinate Chang Dok Soo[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된 10명의 용의자에 대한 군사 재판에 출석하여, 김석황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진술하는 김구 1948.03.15 법정 사진
  9. 자료대한민국사 제6권 > 1948년 4월 19일 > 김구, 청년 학생들의 북행만류에 비장한 결의 표명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4월 20일
  10. 자료대한민국사 제6권 > 1948년 4월 19일 > 김구 38선을 넘어 북행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4월 21일
  11. 자료대한민국사 제7권 > 1948년 5월 5일 > 남북협상 참석차 북행했던 김구, 김규식 입경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5월 06일, 07일
  12. 전현수 역, 『레베제프일기(1947~1948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2006.
  13. 김영중(金英仲) 편, ≪레베데프 비망록 : 대구, 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 1947.5.14~1948.12.26 기록≫ (제주, 해동인쇄사, 2016) / (Naver 책 : ISBN 480B170805082)
  14. 신복룡,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주간조선 2371호] 2015.08.24
  15. Police Corruption, South Korea p.91 : ◦ Robinson, 8-16, 1946, Interview with Leonard Bertsch, Political Advisor for Gen. Hodge
  16. US-USSR Joint Commission 2nd Year, 1 of 2:p.3 G-2 Weekly Summary 98 (pp.21~23) 여운형 암살, 송진우 암살과 연결되어 있다.
  17. 조소앙#장덕수 암살과 정계 은퇴 위키백과
  18. Mark Gayn,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19.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서울, 東亞日報社, 1981) p.329
  20. 《독립을 향한 집념(執念) : 고하 송진우 전기(古下宋鎭禹 傳記)》 (東亞日報 社, 1990년 5월) p.238 에는 당시 이런 발언이 오간 상황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