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일제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당시 임시정부 주석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 한독당(한국독립당) 당수로, 신탁통치 반대 운동, 남북협상 등 정치활동을 했으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1949년 6월 26일 암살 당했다.
생애
해방전 활동
- 김구(Kim Koo)가 서명한 임시정부의 대독선전포고문 : 1945.02.28
- The Declaration of War on Germany by Korean provisional Govt : 1945.02.28 인도 국립공문서관 소장 한국독립 및 정부수립 관련 자료
일본 아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좀 이상해 보인다.
남북협상
남북협상은 1948년 5.10 총선거 직전인 4월 하순 ~ 5월 초순 평양에서 열렸다.
김구는 1947년 12월 1일에 소련이 UN의 남북동시총선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야하고, 이를 두고 남한 단독의 정부수립이라고 부르면 안 되며, 북한 지역은 추후에 조건이 되면 선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 자료대한민국사 제5권 > 1947년 12월 1일 > 한독당 김구, 정부수립과 민족단결 문제에 관해 담화 발표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7년 12월 02일
- 南北을 通한 選擧아니라도, 政府는 統一政府, 金九氏·聲明發表 婦女日報 1947.12.02
그러나 12월 2일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 1894 ~ 1947.12.02)가 암살되고, 이후 그가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법정에 나가 증언도 해야하는 등의 일을 겪으며, 이승만과 사이가 나빠지게 되고, 남한 단독의 5.10 총선 반대로 선회한다.
- 『양김씨(兩金氏) 이미 항복(降服)』 북조선(北朝鮮)의 모략선전(謀略宣傳) 현대일보 [現代日報] 1948년 04월 15일 2면
양김씨(김구, 김규식)가 평양으로 출발도 하기 전에 북한 방송은 그들이 이미 항복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김구는 4월 19일 청년학생들이 경교장 앞에서 그의 방북을 가로막자[1] 담을 넘어 북행을 결행하였고[2], 5월 5일에 돌아왔다.[3]
-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년 11월 15일 종합 1면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5월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레베데프 비망록의 내용으로 보아 김구가 김일성에게 북한에서 노후를 보낼 과수원을 달라고 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사실일 수도 있는 것 같다.[6]
서울 귀환 후
방북했던 김구, 김규식은 5월 5일 저녁 서울에 귀환하여 성명을 발표했다.
- 兩金氏(양김씨) 共同聲明發表(공동성명발표) 1948.05.07 동아일보 1면
- 單政 不遠 無用化, 金九氏 記者團과 一問一答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 1948년 06월 25일
- 김구(金九) - 유어만(劉馭萬, Liu Yuwan) 대화 비망록 전문(全文) : 1948년 7월 11일. 원문은 영문임.
- 유어만(劉馭萬, Liu Yuwan)은 서울주재 중국(장개석 정부) 총영사
- Record of Conversation between Kim Gu and Liu Yuwan : July 11, 1948 Wilson Center : 영문 원문
- 조갑제(趙甲濟), 이화장에 있는 ‘金九-류위완 대화 비망록’ 全文 공개 : 金九, “공산군 곧 남침, 공화국 세울 것”이라면서 주한미군 철수 주장 월간조선 2009년 9월호
- 조갑제(趙甲濟), 金九가 유어만 중국 공사와 나눈 대화록: 金九는 북한이 남침할 것을 알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였나? 조선 pub 2014-10-27
- 류근일, 김구 선생이 단독정권(대한민국)수립 반대한 것은 사실 - 이인호 이사장은 역사적 사실을 말했을 뿐 조선 pub 2014-10-24
각주
- ↑ 자료대한민국사 제6권 > 1948년 4월 19일 > 김구, 청년 학생들의 북행만류에 비장한 결의 표명 동아일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4월 20일
- ↑ 자료대한민국사 제6권 > 1948년 4월 19일 > 김구 38선을 넘어 북행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4월 21일
- ↑ 자료대한민국사 제7권 > 1948년 5월 5일 > 남북협상 참석차 북행했던 김구, 김규식 입경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05월 06일, 07일
- ↑ 전현수 역, 『레베제프일기(1947~1948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2006.
- ↑ 김영중(金英仲) 편, ≪레베데프 비망록 : 대구, 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 1947.5.14~1948.12.26 기록≫ (제주, 해동인쇄사, 2016) / (Naver 책 : ISBN 480B170805082)
- ↑ 신복룡,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주간조선 2371호] 2015.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