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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7%9C%EC%8B%9D 김규식]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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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미군정은 처음에는 남한에 좌우 합작 정부를 세우는 것을 선호하여 반공 우파인 [[이승만]]과 [[김구]]는 배제하고, [[여운형]]과 [[김규식]]과의 협력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면서 좌우합작은 포기하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추진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소련의 거부로 북한 지역을 포기한 채 남한만의 단독 총선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택하나, [[김규식]]은  이를 반대하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평양을 다녀오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아무 것도 없었고, 남한의 여론만 분열시켜 [[김일성]]과 소련에 이용당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처음에는 남한에 좌우 합작 정부를 세우는 것을 선호하여 반공 우파인 [[이승만]]과 [[김구]]는 배제하고, [[여운형]]과 김규식의 협력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면서 좌우합작은 포기하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추진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소련의 거부로 북한 지역을 포기한 채 남한만의 단독 총선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택하나, [[김규식]]은  이를 반대하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평양을 다녀오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아무 것도 없었고, 남한의 여론만 분열시켜 [[김일성]]과 소련에 이용당했다.


==참고 자료==
==참고 자료==

2020년 1월 15일 (수) 10:17 판

김규식(金奎植, 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정치인이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차 평양을 다녀왔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6.25 때 납북 당했다.

생애

해방 후 미군정은 처음에는 남한에 좌우 합작 정부를 세우는 것을 선호하여 반공 우파인 이승만김구는 배제하고, 여운형과 김규식의 협력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면서 좌우합작은 포기하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추진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소련의 거부로 북한 지역을 포기한 채 남한만의 단독 총선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택하나, 김규식은 이를 반대하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평양을 다녀오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아무 것도 없었고, 남한의 여론만 분열시켜 김일성과 소련에 이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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