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요약 없음
207번째 줄: 207번째 줄:
[[분류:북한]]
[[분류:북한]]
[[분류:김일성]]
[[분류:김일성]]
[[분류:전체주의]]
[[분류:통일]]

2018년 9월 2일 (일) 00:28 판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영어: Kim Il-sung)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하 북한) 출범 당시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다.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 기반이 전혀없었던 그는 운좋게 스탈린의 간택을 받아 소련군 무력의 도움으로 북한의 최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초기에는 연안파, 남로당파 등 여러 세력과 연합할 수 밖에 없었다. 6.25 남침 전쟁 실패후 책임을 박헌영 등에게 덮어씌워 남로당파를 숙청하고,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일으켜 연안파, 소련파등을 숙청하여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1967년 마지막 남은 갑산파를 숙청한 후부터 장남 김정일에로 권력 승계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김정일의 권력이 김일성을 능가하게되어 김일성은 명목상의 최고 지도자로 전락하였다. 그는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케한 전범이고, 정치적 반대 계층을 탄압하고 수십만을 수용소에 가두어 반인도적 범죄를 자행한 최악의 반인권 사범이며, 국가를 김일성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고, 인민들의 대부분 자유를 박탈하여 노예화한 총책임자이다.

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대위"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가슴에 소련군 적기훈장을 달고 있다. 김일성의 왼편은 소련군 강미하일 소좌 (소련의 고려인)이고, 뒷줄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 쪽이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출생과 가계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1]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용산면(龍山面) 하리(下里) 칠골의 외가에서 김형직(金亨稷, 1894~1926)강반석(康盤石, 1892~1932) 부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생가로 알려진 만경대(萬景臺) 고향집은 조부모 김보현(金輔鉉, 1871~1955)과 이보익(李寶益, 1876~1959)이 살던 집이며,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에 속했다. 오늘날 칠골과 만경대는 평양직할시(平壤直轄市)에 편입되어 있다.

흔히 그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라고 하나, 그의 어린 시절 학교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성주(金聖柱)가 맞을 가능성이 크고[2], 김성주(金誠柱)로 기록한 문헌도 있다.[3][4] 김일성은 3가지 모두 자신의 이름이 맞다고 했다 한다.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金膺禹, 1845~1878)는 남의 집 소작농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 1860년부터 평양에 살고 있던 지주 리평택(李平澤)의 조상 묘를 봐주는 산당지기로 만경대에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5] 북한은 김응우가 제네랄 셔먼호 격침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나, 이런 말은 1967년 갑산파 숙청후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김일성 가계를 우상화할 필요성 때문에 지어낸 것이다.

조부 김보현은 평범한 농부였고, 부친 김형직은 숭실학교를 중퇴하고 만경대와 평안남도 강동군 봉화리에서 서당 교사를 하다, 장일환(張日煥, 1886 ~ 1918) 등이 주도한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무렵 중강진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압록강 대안(對岸)인 만주 임강현(臨江縣)으로 피신한다. 만주에서는 가짜 세브란스 의전 졸업장을 내걸고 무면허 한의원을 개업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수학기

김일성은 임강현에 살 때인 1920년 봄에 중국인 학교인 임강 소학교(臨江小學校, 즉 모아산현립소학교)에 입학하고,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모아산현립소학교(帽兒山縣立小學校)는 1927년 당시 한인을 박해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반동 소학교였다.[6] 이어 1921년 여름 부모가 장백현(長白縣) 팔도구(八道溝)로 이주하자 장백현 소학교에 다니게 된다. 장백현 소학교의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으나 중국 당국이 공개를 금하고 있다.[7]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

김일성은 1923년 1월 만주 8도구에서 걸어서 외가인 칠골로 와 외조부 강돈욱(康敦煜, 1871~1943)이 운영에 간여하던 창덕학교(彰德學校)를 2년간 다니다가 부친이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25년 1월 왔던 길을 다시 걸어서 만주로 갔다고 한다. 이때 그가 창덕학교를 다녔다는 것은 월남한 당시 급우들의 증언으로 사실 확인이 된다. 그러나 당시 어린 아이였던 그가 수백 km 의 먼길을 한겨울에 혼자 걸어서 왕복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눈덮히고 얼어붙은 산골 길을 어린 아이 혼자 걷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고 도중에 숙식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을 때이다. 올 때는 부친이 동행했고, 돌아갈 때도 누군가가 동행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왕복 모두 김일성 혼자 걸은 것으로 주장하며, 칠골로 걸어 왔다는 경로를 배움의 천리길, 1925년 1월 칠골 외가를 떠나 같은 길을 거꾸로 걸어 만주로 돌아간 길을 광복의 천리길이라 명명하고, 매년 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걷도록 하는 행군을 시키고 있다.[8] 당시 김일성이 만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느면서 맹세했다고 하는 말이 각종 김일성 전기에 판박이처럼 나온다.[9]

『나는 14살 때에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 때 나는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어린 가슴에도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말은 해방 직후 김일성 수행기자를 하다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이 지어낸 것으로, 1945년 10월 19일자 평양민보(平壤民報)에 처음 실렸다.[10][11][12]

부친 김형직의 사망

만주로 돌아온 김일성은 부모를 따라 무송현(撫松縣)으로 이주하여 소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봄에 정의부(正義府)에서 운영하고, 최동오(崔東旿, 1892∼1963)가 숙장(塾長)으로 있던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의 화성의숙(華成義塾)에 들어갔으나 그해 6월에 부친이 사망하면서 그만두게 된다.[13]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경향의 사람으로 만주에서도 찾아온 환자들이 공산주의자인 경우 치료를 거부하고 돌려보내 이들의 분노를 사서 테러를 당해 죽었다고 한다.[14][15]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pp.96~97] 당시(當時) 무송(撫松)에 살았던 이도일(李道日)씨(79세, 釜山 거주)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형직(亨稷)이랑 같이 독립운동단체(獨立運動團體)인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에 관계(關係)했었다. 단장(團長)은 김호(金虎)란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두 순수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였다. 그런데 그때 공산당운동(共產黨運動)이 벌어지면서부터독립운동진영(獨立運動陣營)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의(漢醫)였던 김형직(金亨稷)은 독립군(獨立軍)한테는 약도 주고 치료(治療)도 해주었으나 공산당(共產黨)은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아 공산당한데 원한을 사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공산당(共產黨)들이 와서 분풀이로 형직(亨稷)이를 살해(殺害)하고 말았다. 김성주(金聖柱)는 자기 아버지를 누가 죽인지도 모르고 지금 공산당(共產黨)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형직은 한의원을 하면서 아편 밀거래에도 간여했다는 증언이 많은데, 이 때문인지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직후부터 남은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지는데, 당시 무송지방에 횡행하던 마적떼에게 재산을 약탈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16][17]

중학교 과정

부친이 사망한 후 김일성은 한 동안 방황하다 마골단(馬骨團) 이라는 부유한 사람들을 골라 죽이고 재물을 강탈하는 극좌 폭력집단에 들어가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이때 정의부(正義府)에서는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파견하여 이들을 제압하는데, 이종락은 김일성을 불쌍히 여겨 데려와 봉천(奉天)의 평단중학교(平旦中學校)에 입학시켜주었다고 한다.[18] (평단중학 재학은 그 학교 출신자의 증언에 의한 것으로 북한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도 얼마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나 몇몇 사람의 후원을 얻어 길림의 육문중학교(毓文中學校)에 들어가게 된다. 김학규(金學奎, 1900~1967)의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이 생전에 정의부 사람들과 상당한 친분이 있었으므로 정의부에서 김일성에게 장학금을 대어주었다고 한다.[19] 그러나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 조직 사건으로[2] 경찰의 단속을 받아 육문중학교를 중퇴하게 된다. 이것이 북한에서 인정하는 김일성의 최종학력이다.

반국민부 활동기 (1929~1932)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당시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민족 진영 독립운동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의 계략에 빠져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민족진영과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은 서로 공존하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유시 참변을 모면한 민족진영 사람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1920년대 중반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 등 소위 3부가 정립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만주의 젊은 층들에는 공산주의 열풍이 불어 3부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조직의 존립기반 자체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3부 통합운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서로간의 의견차가 커서 완전한 통합은 이루지 못하고, 두 갈래로 부분 통합을 하게된다. 정의부의 주류 세력들과 신민부, 참의부 일부 인사가 참여하여 1929년 4월 국민부(國民府)가 만들어졌고, 산하에 군사조직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두게 된다. 그러나 국민부 내에도 이미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와 있어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원래 정의부 소속이었던 이종락은 그대로 국민부에 소속되는데, 육문중학을 중퇴하고 갈 곳없는 김일성을 데려다 국민부 산하 간부 양성기관인 남만주학원(南滿洲學院 (약칭 南滿學院))에 입학시킨다. 남만학원은 국민부 본부가 있던 요녕성(遼寧省)의 신빈현(新賓縣) 왕청문(旺淸門)에 있었는데, 김일성의 남만학원 재학사실은 당시 왕청문에서 학교를 다녔던 사람의 증언에 의한 것으로 북한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20]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

당시 김일성은 국민부 산하 청년조직인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에 가입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부 지도부에는 1929년 10월 중순 이 단체에 침투해 들어와 접수하려는 극렬 ML파 공산주의자들 6명을 체포하여 사살하였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이 사건을 거론하며 국민부 지도부를 비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이종락과 김일성도 국민부 지도부 편에 서서 이 사건의 사후 수습에 협조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도 분파간에 알력이 심해. ML파 공산주의자들은 이종락등도 적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1930년 3월 14일 국민부 산하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 등 3개 단체를 통합시켜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한다. 이 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북한 김일성(金成柱)이 선출되었다.[21]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1929년 가을부터 1930년 5월 초까지 길림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나, 1930년 3월 14일에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 간부로 선출되고 있으므로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아마도 당시 '반동단체' 국민부 산하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런 조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와 세화군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9대장이었던 이종락(李鐘洛, 1907~1940)국민부(國民府) 내의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 8월 국민부를 탈퇴하고 나와 김광렬의 동아혁명군과 연합하여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라는 군사조직을 만든다.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에서 이탈해 나온 조직인데다, 국민부 타도를 목적으로 하면서도 같은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은 혼란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가 내세운 강령을 보면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 타도, 국민부 타도,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공산혁명 완수 등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하고 있고, 조선독립이나 항일투쟁이라는 말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22] 순수한 조선인들만의 조직인데도 중국인 공산당원처럼 사고하며 행동하고 있다.

1931년 1월말 이종락 등 지도부가 구속된 후 잔존세력이 세화군(世火軍), 동방혁명군(東方革命軍)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가며 조금 더 존속하나 1931년 말에 완전히 소멸한다.

1931년 3월 24일에 김일성(金成柱)이 세화군(世火軍)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委員)으로 선임되었다는 일제의 기록이 있다.[23] 그러나 동아일보 1931년 3월 26일자 기사에 "이종락(李鐘洛) 부하 김일성(金一成) 등 3명이 체포"되었다고 하였고[24], 이어 같은 신문 5월 4 일자 기사에는 조사를 받은 이 3명이 길림성 정부로 호송된다고 하였다.[25] 당시 감옥 생활을 얼마나 했는지는 알려지 있지 않다.

동아일보 기사로 보아 당시 김성주는 김일성(金一成)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30년 말 이종락 부대의 세금 징수원이 되어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에 가 있던 시기에 삼성학교(三成學校) 교사였던 최형우(崔衡宇, 1905~1950)가 일성(一星)이란 별호를 지어 주었다는 증언이 있고[26], 북한은 김혁이라는 시인이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동지들이 한자로 一星이라 적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던 당시 한때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것은 사실로 보이나, 본명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쓰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변성명이 필요할 때 김일성이라고 둘러댄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혁명군 고동뢰 소대 참살

믿고 따랐던 상관 이종락이 체포 구금되고, 속했던 군사조직도 흐지부지 와해되자 의지할 데를 잃은 김일성은 무송(撫松)으로 돌아가 장아청(張亞靑, 1913~1937) 등 또래들을 모아 불량배 짓을 하고 다녔다. 이런 일로 중국인들 사이에 조선인들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측에 제압을 요청하자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1896~1934)은 이 패거리들을 제압하러 1932년 2월 중순 고동뢰(高東雷) 소대장이하 10명을 무송(撫松)으로 파견한다. 무송에 당도한 일행이 장거리 행군에 지쳐 피곤해서 잠든 사이에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은 이들 10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도망친다.[27] 이것이 김일성의 최초의 무장투쟁이다.

김일성은 또한 조선혁명군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중대의 무기를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28]

모친 강반석의 사망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참살하고 도망갔던 김일성은 1932년 초여름 조선혁명군 양세봉 총사령을 다시 찾아와서 지난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고 조선혁명군에 자신을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세봉은 그를 용서하고 받아주기는 했지만, 못 미더워하여 그가 원하는 직책은 맡겨주지 않았다. 이에 김일성은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만다.[29] 김학규에 의하면 1932년 여름 김일성(金聖柱)이 양세봉을 찾은 것은 사실이다.[19]

이해 7월 31일에 안도현(安圖縣)에서 살던 모친 강반석이 병으로 사망한다.

중공당 산하 유격대 활동기 (1932~1940)

소련이 공산혁명에 성공하면서, 만주에는 1920년대부터 공산주의 사조가 몰려온다. 1930년 5월 30일에 간도폭동이 있었고,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 1932년 3월 만주국이 수립되자 만주 도처에서 소규모의 항일 유격대(抗日遊擊隊)가 조직되기 시작한다. 북한은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安圖縣) 유격대를 창건했다고 주장하며 이날을 인민군 창건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중국 기록에는 당시 안도현 유격대 대장은 이영배(李英培)로 나오며, 김일성의 이름은 없다. 다른 정황을 보아도 이때 김일성이 유격대를 창건했다고 보기 힘든 점이 많다. 1932년 여름 조선혁명군 양세봉 총사령을 찾아 자신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고, 7월 31일에 모친이 사망하므로, 그가 유격대에 투신한 것은 적어도 모친 사망 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주 빨치산 출신으로 북한의 최고재판소장을 지낸 이국진(李國鎭, 1905~1980)은 김일성이 1932년 초겨울 안도 유격대를 찾아와 가담했다고 증언한다.[30]

李國鎭(이국진)(前 국가최고검찰장)의 증언.
"1932년에 들어와서야 中國(중국) 공산당이 직접 이끄는 反日(반일)유격대가 조직되기 시작했소. 항일홍군유격대라고 불린 이 유격대는 처음에는 인원이 많아야 10명 내외였으며 총도 몇 자루 없었소. 1932년 초겨울 安圖(안도) 유격대에 金成柱(김성주)라는 학생 옷차림의 청년이 참가했는데 그는 원래 3년제 소학교에서 글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소. 이 사람이 바로 金日成(김일성) 동지요. 그 당시 유격대를 지휘한 이들은 중국인 周保中(주보중) 楊靖宇(양정우) 李廷祿(이정록) 董章榮(동장영) 등과 조선인인 李紅光(이홍광) 李東光(이동광) 崔庸健(최용건) 金策(김책) 李光(이광) 등이었소. 부대 명칭은 처음에 반일홍군유격대였고 33년1월 중국 공산당이「만주의 각급 당조직과 전체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으로, 다시 36년 2월 중국공산당 공산국제주재대표단의「동북항일연군통일군대건제선언」이 발표된 뒤 해방될 때까지「동북항일연군」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소"

김일성이 1932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기록이 다수 있으나, 가입 시기가 확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정확한 시점은 중공당 당원 명부에 적혀 있을 것이나 이를 확인했다는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

1930년대 초 만주에는 잡다한 성격의 무장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만주를 지배하던 마적 출신 군벌 장작림이 1928년 폭사한 후 그의 잔존 세력이었던 군대, 각종 마적 집단,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홍군 유격대 등이다. 항일 투쟁을 위해 이런 집단들이 통합하거나 연대를 모색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성립하지만, 통일된 지휘체계를 가진 조직이 아니라 1군부터 11군까지 나뉘어져 각 군의 군장이 지휘하는 체제였다. 좀더 많은 무장단체를 규합하고, 지휘체계를 단순화하기 위해 명칭에서 공산주의 색채를 드러내는 "인민혁명"을 떼어내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무색무취한 항일군인 것처럼 보이도록 바꾼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산주의자들의 지배력이 더 강화되었고, 이들은 중공당 만주성위와 코민테른의 지휘 감독하에 있었다. 중공당원들이 주축이었지만, 연안의 중공당 중앙과는 거리가 멀어 연락이 두절되어 있었다.

11개 군을 활동 지역에 따라 3그룹으로 묶어 1, 2, 3로군(路軍)으로 편성한다. 이 중에서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1군과 2군을 묶은 것이 1로군이며, 총사령은 양정우(楊靖宇, 1905~1940)였다. 동만주의 2로군 총사령은 주보중(周保中, 1902-1964), 북만주의 3로군 총사령은 조상지(趙尙志)[나중에 이조린(李兆麟)으로 교체]였으며, 3개 로군을 총괄하는 지휘체계를 만드는데는 실패했다. 부대가 각지에 분산되어 유격전을 벌이며 수시로 이동해 다녀야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단일 지휘체계를 갖춘다 해도 실효성을 발휘할 수 없었다.

김일성이 유격대에 투신한 초기에 어디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엄청난 전과들은 믿을만한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유격대 투신 초기인 1932년에서 1936년까지 관련 기록을 가장 많이 찾아내어 검토한 사람은 허동찬(許東粲, 1932 ~ )이다.[31] 그가 찾아낸 기록들을 보면 유격대 내에 약간의 지위를 가진 인물로 김일성(金日成),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등의 이름이 어지럽게 나오는데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판별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이런 이름의 사람이 둘 이상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김일선은 김일성과 관계없는 이름처럼 보이지만, 김일성의 이칭으로 명기된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같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북한 김일성이 유격대 시절 초기에 어떤 이름을 썼는지도 명확하지 않으므로 이런 기록들 중에 실제 북한 김일성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중에 동북항일연군에서 두드러진 직책에 있었던 김일성(金日成)은 처음의 1로군 2군 6사장, 나중의 제2방면군장 두 경우가 있다.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6월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데, 그는 그해 11월 13일 전사한 것이 확실하다. 나중의 제2방면 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수의 사람들이 보천보 주역 김일성은 전사했고, 그 이후부터 북한 김일성이 김일성(金日成)이라고 증언했다. 물론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6사장 김일성도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하며, 그가 전사했다는 기록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며 전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북한도 보천보 사건 주역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고, 김일성 회고록에도 그렇게 써 놓았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6년 7월 ~ 1938년 6월)
총사령부(總司令部)군장(軍長)사장(師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부사령 왕덕태(王德泰, 1907~1936)
1군 군장 양정우1사장 정빈(程斌, 1911~1951)
1938년 6월말 투항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1937)
1937년 가을 전사
3사장 왕인재(王仁齋, 1906~1937)
1937년 가을 전사
2군 군장 왕덕태
1936년 10월 말 전사
4사장 안봉학(安鳳學, 1909~1937)
1936.09.30 투항
5사장 사충항(史忠恒, 1906~1936)
1936년 10월 전사
6사장 김일성(金日成, 1901~1937)
1937.11.13 전사
동북항일연군 1로군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8년 7월 ~ 1941년 3월)
총사령부(總司令部)방면군장(方面軍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1940.02.23 전사

부사령 위증민(魏拯民, 1909~1941)
1941.03.08 전사

제1방면군장 조아범(曹亞範, 1911~1940)
1940.04.08 내분으로 피살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1912~1994.07.08)

1940.10.23 소련으로 월경 도주[32][33]

제3방면군장 진한장(陳翰章, 1913~1940)
1940.12.08 전사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 박득범(朴得範, 1908~?)
1940.09.30 투항[34]

1939년~1941년 3월간 일본 관동군 노조에 토벌대의 항일연군 1로군에 대한 집중토벌로 1940년 2월말 총사령 양정우가 전사하고, 불리한 전세에서 살아날 길이 없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상관인 총사령 대행 위증민의 허락도 없이 부하 몇명을 데리고 소련으로 도주한다.[32][33] 이듬해 3월 위증민이 전사하면서 항일연군 1로군은 완전히 궤멸된다.

전투중의 지휘관이 도주한 김일성과 같은 행위는 정상적인 군율에 따르면 사형을 면할 길이 없으나, 처벌 권한을 가진 직속 상관들이 모두 전사하여 운좋게 처벌을 면한다. 소련군 88여단에서는 1로군 상관들이 모두 전사한 덕에 1로군을 대표하는 인사가 되어 비겁한 도망자가 오히려 더 대접을 받는 희극적인 일이 벌어진다.

김일성 귀순 공작

노조에 쇼도쿠(野副昌德) 소장이 이끈 노조에(野副) 토벌대가 항일연군 1로군을 상대로 집중적인 토벌을 벌이던 때와 같은 시기에 경찰 쪽은 항일연군 요인들 귀순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당시 귀군공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김창영(金昌永, 1890-1967)의 1949년 반민특위 증언과[35] 1940년 4월 만선일보(滿鮮日報) 에 5회에 걸쳐 연재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에[36] 의하면 귀순공작의 마지막 대상은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의 왕년의 상관으로 체포되어 6년여 옥고를 치른 이종락(李鐘洛, 1907~1940)과,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金亨權, 1905~1936)과 함께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체포되어 역시 옥고를 치른 박차석(朴且石)은 석방되자 변절하여 일본 측에 협력하게 되는데, 김창영은 이들을 김일성 귀순 공작에 투입한다. 김일성으로서는 자신이 믿을만한 사람들로 생각하던 터라 부대로 찾아온 이들의 설득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종내에는 귀순을 결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귀순 후의 안전보장을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내거는 바람에 협상이 지연되면서 이러한 상황이 1로군 총사령 양정우에게 보고가 들어간다. 1940년 1월말 부하를 이끌고 김일성 부대에 들이닥친 양정우는 협상차 들어와 있던 이종락을 체포하여 끌고 가서 사살한다. 이때문에 김일성 귀순공작은 막을 내리지만, 양정우 본인도 한달여 뒤 전사하고 만다.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의 성격

김일성이 말년에 작가들을 동원하여 꾸며낸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빛나는 항일 무용담들로 가득차 있으나, 주요 줄거리들이 모두 조작된 것이다.

김일성이 소련군에 있을 당시인 1942년 주보중의 지시를 받고 자필로 쓴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에는[37][38][39][40][41]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게 쓰고 있는데, 조선독립이란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으며, 자신들의 투쟁이 최종적으로 실패했다고 자인하고 있다. 김일성 자신도 그냥 중국인의 한 사람으로 그들 틈에 섞여 만주적화를 위해 투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김일성 부대 뿐만 아니라 많은 항일연군 부대들이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일삼았다는 기록도 엄청나게 많다. 그들이 생업에 종사한 것도 아니고, 몰래 후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봐야 턱없이 부족한데다 보급품을 조달할 마땅한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나올 것이 많은 돈많은 부잣집을 털고는 적당히 친일파를 응징했다고 구실을 붙여주면 되는 것이다. 납치된 사람들 중 나이든 사람은 인질대금을 받고 풀어주고, 젊은 사람은 손실된 병력과 인력을 충당하게 했다. 일본 군부대나 관공서를 쳐서 물자를 빼앗기에는 치러야할 희생이 너무 크고, 만만한 대상이 양민일 수 밖에 없다. 공산주의의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도 정당하다는 그들만의 논리야 있겠지만 사실상 마적단이나 다를바가 별로 없었다.

소련 도피 시기 (1940~1945)

만주서 항일 빨치산(게릴라) 활동을 하던 김일성은 일본군에 쫓겨 상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대행 위증민(魏拯民, 1909~1941.03.08)의 허락도 없이, 전투 중인 상관과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1940년 10월 23일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였다.[32][33] 월경 직후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포시예트(Posyet) 항으로 끌려갔다가 얼마간 감옥에 갇혔는데, 2로군 총사령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남야영(南野營)

소련으로 도피한 동북항일연군 대원들은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 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 Вя́тское, Vyatskoye)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 캠프)과 보로실로프(지금의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 쪽으로 약간 떨어진 하마탄(Хаматан, Hamatan, 虾蟆塘), 즉 지금의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 Razdolnoye) 마을의 남야영(南野營, B 캠프)에 분산 수용되는데, 김일성은 남야영에 수용된다.

소련은 1937년 가을에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 지도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17만 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다. 기차에 짐짝처럼 실려가서 한겨울에 허허벌판에 내팽개쳐진 한인들은 첫 해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1/3 정도가 사망했다.[42] 이런 만행으로 연해주에서의 한인독립운동은 완전히 맥이 끊기지만, 소련이 만주서 넘어온 조선인 빨치산들을 수용하여 교육과 훈련을 시킨 것은 나름대로 이용할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라즈돌노예의 기차역이 바로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실어나르던 출발지인데, 불과 3년 뒤 남야영이 들어서고, 김일성 등이 거기에 수용된 것이다. 남야영에서 1941년 2월 16일 김일성의 장남 김정일이 태어났다.

제88독립저격여단

1942년 7월 만주 빨치산들을 수용한 극동전선군 산하 제88독립저격여단(第88獨立狙撃旅團,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88th Separate Rifle Brigade), 통칭 88여단이 북야영이 있는 뱌츠코예 마을에 창설되면서 김일성 일가는 이때 하마탄(라즈돌노예)에서 뱌츠코예로 이주한다. 88여단의 여단장은 주보중(周保中)이었으며, 김일성은 부하 100 여명을 통솔하는 제1대대 영장(대대장)이 되었고, 대위(Капитан, Captain)의 계급을 받았다. 소련군에서 그의 이름은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이었는데, 이는 한자 이름 金日成을 중국식 발음으로 적은 것이다.(표준 중국어 보통화 발음은 아닌 듯함.)

빨치산 동료들을 감시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로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다.

당시 그는 88여단을 관장하던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의 비밀 정보원(KGB 전신인 NKVD 요원)이 되어[43][44][45]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과 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Maxim Alekseevich Purkayev, 1894~1953) 대장에게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을 하였다.[30][46]

이 일로 상관들의 신임을 얻어 그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은 것이 그가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된 배경이다. 스탈린은 1945년 9월초 그를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시험을 본 후 북한지도자로 낙점하였다.[47][48] 당시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는 하바로프스크 군용 비행장에 수송기를 대기시키고, KGB 극동본부 요원 2명에게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안내하도록 했다고 한다.[47]

해방과 입북 - 소련군정기

소련군의 북한 침공은 1945년 8월 9일 웅기 지역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전의를 상실해 있던 일본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소련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평양에 도착한 날은 8월 26일이다. 북한 점령은 많은 일본군 사상자를 낸채 소련군은 최소한의 피해만 입고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평양에 처음 도착한 치스차코프는 상부로부터 아무 지침이 없어 당시 북한주민들의 지지가 높던 조만식을 조선인 대표로 인정하고, 여러가지 일을 진행한다. 그러나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스티코프 - 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 라인으로 소련 군정 지휘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조만식에게도 많은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한다.

원산항으로 비밀리에 입북

김일성을 비롯한 88여단 조선인들은 1945년 9월 중순 육로로 입북을 위해 하바로프스크를 떠나 만주 무단장(牡丹江) 역에 도착했으나 일제가 기차 터널을 파괴하여 북한으로 가는 철길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역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이기건(李奇建, 1919~ ?)이 그때의 대화에 대해 증언했다.[49][50]

다음은 蘇聯軍(소련군)의 포로취급을 받다 탈출, 歸還途中(귀환도중) 滿州(만주) 목단江驛(강역) 構內(구내)에서 金日成(김일성) 일당의 入北(입북)을 우연히 목격하게된 李奇建(이기건)씨(五三(오삼)·현內外問題研究所長(내외문제연구소장)·예비역준장)의 얘기.
......「하루빈」가는 기차를 타려고 목단江驛前(강역전)을 서성거릴 때입니다. 그때가 아마八月(팔월) 하순경이 아닐까요. 驛構內(역구내)에 소련군장교 三(삼), 四十(사십)명 가량이 몰려있어요. 가까이갔더니 中國(중국)말로 얘기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 어투로 봐서 韓國人(한국인)임이 틀림없었읍니다. 나는 中國語(중국어)에 능했지요. 그래서 그중 인상이 좋아보이는 자에게 다가가 우리말로 "당신 朝鮮(조선) 사람 아니요" 하고 반갑게 말을 붙였더니 그 말엔 대꾸를 않고 "당신은 누구요" 하고 우리말로 되물어요. 그래서 "나도 조선사람이요"했더니" 우리가 급히 조선으로 들어가려는데 왜놈들이 기차터널을 폭파해서 못 가고 있소"라고 대답합디다. 당시 목단江(강)에서 韓國(한국)의 청진 회령으로 들어가는 철도가 있었지만 咸鏡道(함경도)에서 가까운 老松嶺(노송령) 터널을 日軍(일군)이 폭파해서 막히는바람에 교통이 두절됐었지요. 그리고는 이어 "지금 朝鮮內部事情(조선내부사정)이 어떻게 됐느냐"고 캐물어요. 그래서 목단江市(강시)에서 "朝鮮(조선)에 東震共和國(동진공화국)이 탄생됐다"【注(주) : 해방직후인 八(팔)월하순 東震共和國(동진공화국)이라는 벽보내각이 나붙었으나 그 출처는 모른다】는 放送(방송)을 들은 기억이 떠올라 그 말을 전했더니 그 소련軍上尉(군상위) 복장을 한 韓國人(한국인)은 "金九(김구)요, 李承晩(이승만)이요" 하고 물읍디다. 모른다고 했읍니다. 한참있다 그 소련군 장교는 "우리는「블라디보스독」으로 일단 가서 거기서 배타고 朝鮮(조선)으로 들어가겠소"라고 말한 일이 있읍니다. 그런데 그 일당이 누구인지 모르고 헤어졌다가 내가 四七(사칠)년 북한에가서 소위 人民軍(인민군) 창설에 관여하면서 보니까 그때 목단江驛(강역)에서 보았던 그 蘇聯軍上尉(소련군상위)가 바로 北傀(북괴) 괴뢰軍總參謀長(군총참모장)으로 올라앉은 安吉(안길)이었읍니다. 安吉(안길)이와 함께 있던 中尉(중위)에서 소좌에 이르는 三十(삼십)여명의 소련군 장교중엔 나중에 北韓(북한)을 틀어쥔 金日成(김일성) 金策(김책) 金一(김일) 崔賢(최현) 林春秋(임춘추)등도 서있었다고 봅니다. 아마도 金日成(김일성) 일당이 韓國(한국)으로 나오고 있던 한 장면이었다고 여깁니다.

김일성 일행은 귀국길에 올라서도 자기들끼리 중국말로 대화할 정도로 중국에 동화된 사람들이라는 증거이고, 또한 그들도 오랜 외국생활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세가 이승만, 김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증거도 될 수 있다.


김일성 일행은 안길이 말한대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로 출발, 9월 19일 오전 11시 원산항에 입항한다. 항구에 출영나온 인사들에게 김일성은 자신을 "김성주"라는 본명으로 소개했다.[51] 9월 22일에 기차로 평양에 도착한 이후로는 한동안 비밀리에 잠행하며 김영환(金英煥)이라는 새로운 가명을 사용하였다.[52][53][54]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

해방 당시 국내에는 소련군 88여단에 조선인 빨치산들이 다수 있고, 특히 진지첸 대위와 같은 인물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이들에 대한 지지세력도 있을 수 없었다. 조선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생소한 인물을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특단의 방안이 강구되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고안된 방법이 조선인들 사이에 김일성 장군이란 이름이 유명한 것을 알고, 그 이름을 사칭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소련군 진지첸 대위는 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현 김일성 종합경기장)에서 열린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전설의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앞에 처음 나서게 된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장

남북 분단이 고착되는 실제 과정

스탈린이 1945년 9월 초에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결정했다는 것은 이미 이때 북한을 분할 점령하여 통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 스탈린이 9월 20일에 극동군 사령부와 평양의 소련 25군 사령부에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국가를 건설하라"는 비밀 지령문을 내려보낸 것은 당시 북한 분할 통치를 확실히 결정하고 있었다는 명시적 증거이다.

  • 1945년 9월 20일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국가를 건설하라는 스탈린의 비밀 지령
  • 1945년 12월 25일 쉬킨 보고서 : 북한에 스탈린의 지령이 잘 이행되지 않고 있으므로 토지개혁 등 실행해야 할 구체적 방안제시
  • 1946년 1월 5일 반탁입장을 굽히지 않고, 소련과 타협을 거부하는 조만식 선생을 고려호텔에 연금
  • 1946년 2월 9일 사실상 북한 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 1946년 3월 5일 소위 "무상몰수·무상분배"라는 토지개혁 단행 - 남북한의 이질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능해짐.

분단은 스탈린의 뜻에 의해 해방 직후 결정되어 있었고 1945년 말에는 돌이킬 수 없게 됨.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이나 찬탁 반탁 운동, 미소공동위원회 등은 미군정과 남한 사회를 흔들어 놓기 위한 소련의 전략이나, 미국은 스탈린의 속셈을 알지 못해 말려들었음. 북한은 일체의 반대 세력을 제거 또는 무력화 시키고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화를 착실히 진행하고 있었음. 남한도 공산화를 수용하지 않는한 남북한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는 길이 없었음. 1948년 봄의 남북 협상은 김구, 김규식등 남한 인사들이 소련과 김일성에 놀아난 것임.

북한 정권 공식 출범

6.25 남침

정적 숙청과 김일성 유일체체 확립

조만식 선생과 민족 진영 인사들 처형

김일성은 6.25 남침전쟁에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UN군과 국군이 평양으로 진격해오자 평양을 점령 당하기 직전에 1946년 1월 5일부터 고려호텔에 연금했던 조만식 선생과 다른 민족진영 인사들을 모두 총살하고, 달아난다.

박헌영과 남로당파 숙청

8월 종파 사건과 연안파, 소련파 숙청

1990년 동아일보에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를 연재 (총 18회).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 <1> 1990.04.22 동아일보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 <2> 1990.04.29 동아일보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 <18> 1990.07.22 동아일보

갑산파 숙청

장남 김정일 후계 구도 확립

김일성 연보

김일성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나 북한 간행 전기들이 조작이 많아 정확한 진실을 알기 어렵고, 아직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아래의 김일성 연보도 작성자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보이고, 잘못된 것들도 있다.

각주

  1. 이 날은 타이타닉(Titanic)호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날이며, 북한은 이를 또한 김일성 우상화 선전에 이용하고 있다. 김일성 출생은 타이타닉 침몰보다 더한 재난이다.
  2. 2.0 2.1 「조선공산청년회 조직의 건(朝鮮共産靑年會 組織ノ件)」 1929년 5월 14일자 길림 총영사의 보고문
  3. 최형우(崔衡宇),《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 (漢城 : 東方文化社, 1945년 12월 10일) p.28
  4. 金日成은 나의 弟子다? 三八線 넘는 崔東旿氏談 민중일보(民衆日報) 1948/04/22
  5. 김응우와 샤만호격침기념비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7-06-20
  6. 새전기「세기와 더불어」 허동찬씨의 분석 (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 : 20) 서울신문 1992. 12. 10
  7. 長白縣 檔案館 所藏 韓國史 關聯 檔案資料 槪況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8. 北, '광복의 천리길' 답사 시작 dailynk 2005-01-23
  9. 김일성저작집1 p.361
  10.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81
  11.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p.67~68 ; p.110.
  12. 한재덕(韓載德),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1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동아일보 1962.05.24, 2면
    한재덕(韓載德), 『김일성을 고발한다』 (내외문화사, 1965) p.96
  13. 화성의숙 숙장 최동오(崔東旿, 1892∼1963)는 6.25때 납북 당했는데, 박정희 정권 때 외무장관을 지내고 1986년 월북한 최덕신(崔德新, 1914~1989)의 부친이다. 최덕신의 월북에는 부친과 김일성의 인연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14.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96~97.
  15. 허동찬(許東粲),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1. 金亨稷 國史館論叢 第4輯 (국사편찬위원회, 1989)
  16. 허동찬(許東粲, 1932~ ),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의 분석 (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 : 39)》 서울신문 1993-02-23 5면
  17.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7, pp.94~95
  18. 이명영, 《김일성 열전》 (신문화사, 1974) pp.97~98
  19. 19.0 19.1 김학규(金學奎, 1900~1967), 《백파 자서전(白波 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11) 부록(附錄) 자료 I(資料 I),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년) p.7 (p.589)
  20. 이명영, 《김일성 열전》 (신문화사, 1974) pp. 107~108
  21.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에 관한 件 1930-06-25 일자로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22. 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 宣言 口號 : 1930-09-20 일자 관동청 경무국장(關東廳 警務局長)이 작성한 보고문.
  23. 세화군(世火軍)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 김성주(金成柱)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제124호(1932년 11월)의 기사.
  24. 이종락(李鍾洛) 부하 김일성(金一成)이 체포 동아일보 1931-03-26 일자 2면기사.
  25. 이종락(李鍾洛) 부하 김일성(金一成)이 체포, 길림성 정부로 호송 동아일보 1931-05-04 일자 2면기사
  26.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122~124.
  27. 國史館論叢 第4輯 >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4. 抗日遊擊隊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143~145
  28. 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二) 匪名『金日成』을 襲名 滿鮮日報 1940/04/18, 6면
  29. 이명영(李命英), 眞僞 金日成 列傳 (13) |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
  30. 30.0 30.1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 정치위원 呂政(여정) 手記(수기) <1> 1990.04.22 동아일보 : 솔로킨 소장이 소르킨 정찰국장이고, 부르가예프 대장은 극동전선군(원동방면군) 사령관 Maksim Purkayev 대장이다.
    여정(呂政, 본명 강수봉), 『붉게 물든 대동강 : 前 인민군 사단 정치 위원의 수기』,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1991.07.01
  31. 허동찬(許東粲), 『김일성 평전 [속] (金日成 評傳 [續])』,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8년 4월 1일.
  32. 32.0 32.1 32.2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33. 33.0 33.1 33.2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34. 항일군 3인 왜 일왕에 충성맹세 했나 오마이뉴스 2007.09.13
  35. 김창영(金昌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 (반민특위 조사 기록) 1949년 4~5월 / 김창영(金昌永, 1890-1967)
  36.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전5회)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년 4월
  37. 《抗聯 第一路軍 略史》, 『東北抗日聯軍 史料(下)』, 東北抗日聯軍 史料 編寫組, 中國共産黨史 資料出版社, 1987, pp.665~679
  38. 중국어 원문 보기 : 《抗联第一路军略史》 东北抗日联军史, 哈尔滨市人民政府地方志办公室 (哈爾濱市人民政府地方志辦公室)
  39.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403-414 : 중국어 원문의 번역
  40. 《金日成의 自筆 빨치산 日誌》 金贊汀 新東亞. 390('92.3) pp.380-393 /東亞日報社
  41. <다시쓰는한국현대사>7.東北항일聯군활동기 金日成자필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42. 고려인의 강제 이주 위키백과
  43. 美(미)정보전문 간행물 발표 "金日成(김일성) 항일투쟁은 조작" 1994.06.09 동아일보 5면
    KGB 비밀문서, 金日成 抗日투쟁 경력 일축 연합뉴스 1994-06-08
  44. Christopher M. Andrew, ‎Oleg Gordievsky, More Instructions from the Centre: Top Secret Files on KGB Global Operations 1975-1985, (Psychology Press, 1992) pp. 78~79
  45. 김충석, 소련 극동군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북한 정치에서 제88여단파의 기원과 형성 역사연구 제30호, 2016.6, pp.50~55.
    김일성은 소련 비밀경찰(NKVD)의 요원이었다! NewDaily 2015.12.02
  46. 김충석, 소련 극동군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 북한 정치에서 제88여단파의 기원과 형성 역사연구 제30호, 2016.6
    김충석,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연구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6. 2)
  47. 47.0 47.1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하권 pp.202~204 ;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아카데미, 2008) pp.72-73
  48. 평양 소련군정 요원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Konovich Mekler, 1909~2006)도 김일성이 귀국전 스탈린의 면접심사를 받은 것을 증언했다 : 김일성정권 내가 만들었다; 소련군 정치장교 G .메크레르의 증언 <對談> / 메크레르,G·惠谷治 極東問題. 159('92.5) pp.48-58. 極東問題硏究所
    Kim Il Sung's Soviet Image-Maker Moscow Times 07/22/2004
  49.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50.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p.176"
  51. "나도 북침인 줄 알고 6·25 참전했어" 2009년 6월 20일 조선일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 1992년) 상권 pp.72~74
  52. 한재덕(韓載德), 金日成將軍 凱旋記 : 빗나는 革命家의 집 p.84 -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7.25 ; 이듬해 간행된 한재덕의 저서 『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의 같은 글에는 김영환이란 가명을 썼다는 말이 삭제됨.
  53. 한재덕(韓載德),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27) 1962.06.01 동아일보 2면 [1959년 한국으로 귀순 후 쓴 글]
  54.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시대정신, 2006.04.15) p.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