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중 !! : 이 알림판이 삭제되면 보세요.

백두산은 단군신화의 무대인가?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나오는 단군신화의 무대는 태백산이다. 일연은 태백산이 묘향산이라고 했다.

근래의 학자들은 태백산이 백두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근대까지도 그랬지만 더더구나 추정되는 단군의 시대에는 백두산 일대는 사람의 접근이 지극히 어려운 무인지경에 속했다.

고려의 영토 밖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 사람들은 백두산의 존재도 알지 못했고, 일연이나 이승휴도 백두산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일연이나 이승휴가 고려의 영토내에 있지도 않는 산을 우리 민족의 기원이 된 산으로 파악했을 가능성도 낮다.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처음 비정한 사람은 최남선?

  • 최남선의 삼국유사 발굴...

백두산의 화산 대폭발 : 940년

한중일 어느 나라 기록에도 나오지 않으나 근래의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940년경 백두산 화산의 대폭발이 있었다.

천지도 이때 처음 생겨났을 것으로 보인다. - 단군시대부터 있던 호수가 아니다.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발해는 화산 폭발전에 이미 망했다.

백두산의 조선 영토 편입 : 세종의 4군 6진 개척

백두산은 세종 때인 1430년대에 조선으로 편입되었다. - 우리 민족과 관계를 맺는 것은 이때부터....600년이 채 안되는 기간이므로 민족의 영산이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있었을 리도 없다.

삼수갑산은 험난한 지형으로 해서 조선시대의 악명높은 귀양지였는데, 백두산은 삼수갑산 너머에 있어 그보다 접근이 더 어려워 탐방객이 거의 없었다.

탐방이 어려운 여러 조건들

  • 기상 변화가 무쌍해 큰비를 만나면 고립되거나 익사의 위험
  • 진흙지대에 잘못들어서 탈출 불가능이 될 수도
  • 맹수의 위험
  • 산세가 깊어 등반일정이 길어지므로 식량등의 지참에 어려움이 있음.

백두산 정계비 : 1712년

조선 후기 백두산 등정 기행문

조선선비들의 백두산관

백두산 기행문 : 20세기

  • 민태원 - 1921
  • 권덕규 - 1921
  • 최남선 - 1926, 1927 :민족의 영산이라는 인상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임.
이은상 - 1927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가 많이 읽혔고 백두산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임.

백두산과 김일성 일족 - 백두혈통 신화

  • 이찬의 김일성 장군의 노래 - 1946
  •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 - 1947
  • 1984 :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조작 - 백두혈통 신화의 시작

최남선과 김일성

두 사람은 직접 만난 적은 없으나 상당한 연고가 있다.


남한 사람들의 백두산에 대한 인식

  • 우리의 맹세 -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통일을 완수하자
  • 지리 :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산, 칼데라호 천지
  • 접근 불가능해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던 산
  • 1990년대 들어 남한사람들의 중국을 통한 백두산 탐방
  • 고은 - 백두산 서사시 (1987) : 김바우는 김일성을 모델로 한 것?

함께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