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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원에 대한 원수갚기가 [[김일성]]의 남침 목표?===
===김석원에 대한 원수갚기가 [[김일성]]의 남침 목표?===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84%9D%EC%9B%90 김석원(金錫源, 1893 ~ 1978)]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84%9D%EC%9B%90 김석원(金錫源, 1893 ~ 1978)]은 일본 육사 27기로 졸업후 일본군에서 복무하다 해방 후 국군으로 근무한 것은 맞다. 해방전에 북한 [[김일성]]과 아무 연고도 없었지만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그에 대한 비방이 잔뜩 나온다. [[보천보사건]] 직후 벌어진 소위 [[간삼봉전투]]라는 일본군과 [[동북항일연군]] 1군 2사, 2군 4사, 6사 연합부대의 전투에서 일본군측 지휘관이 김석원인 줄로 잘못 알고 헛소리를 한 것이다. 간삼봉전투의 일본군 지휘관은 김석원의 일본육사 동기인 김인욱(金仁旭, 1892 ~ ?) 소좌였다.


* [http://www.hani.co.kr/arti/SERIES/231/396630.html <nowiki>[전쟁 60년 화해 10년]</nowiki> 브루스 커밍스 인터뷰 : 이승만·김일성 모두 ‘침공’ 추진…북, 중·소 설득해 선공] [[한겨레신문]] 2009-12-31
* [http://www.hani.co.kr/arti/SERIES/231/396630.html <nowiki>[전쟁 60년 화해 10년]</nowiki> 브루스 커밍스 인터뷰 : 이승만·김일성 모두 ‘침공’ 추진…북, 중·소 설득해 선공] [[한겨레신문]] 2009-12-31

2020년 7월 1일 (수) 10:50 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09.05 ~ )는 미국의 동아시아역사 학자로 한국의 현대사와 외교관계 전공이다. 시카고 대학 등에서 교수를 지냈다.

개요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vol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1990.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1: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 606 pp.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2: 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 957 pp.

엉터리 주장들

김석원에 대한 원수갚기가 김일성의 남침 목표?

김석원(金錫源, 1893 ~ 1978)은 일본 육사 27기로 졸업후 일본군에서 복무하다 해방 후 국군으로 근무한 것은 맞다. 해방전에 북한 김일성과 아무 연고도 없었지만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그에 대한 비방이 잔뜩 나온다. 보천보사건 직후 벌어진 소위 간삼봉전투라는 일본군과 동북항일연군 1군 2사, 2군 4사, 6사 연합부대의 전투에서 일본군측 지휘관이 김석원인 줄로 잘못 알고 헛소리를 한 것이다. 간삼봉전투의 일본군 지휘관은 김석원의 일본육사 동기인 김인욱(金仁旭, 1892 ~ ?) 소좌였다.

48년 이승만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이승만은 북한에서 내려온 일본군 출신 한국인 장교들을 군 장성으로 기용했다. 이들 중 한명이 김석원이다. 그리고 미국은 48~50년에 500명의 미군 장교들로 이뤄진 자문단을 구성했다. 이 자문단은 김석원과 같은 (일본군 출신들에게) 38선 방어를 책임지게 했다. 이 점에서 소련과 미국이 30년대 일본강점기에서부터 부딪친 양쪽을 각각 지원한 것은 외국이 (한 나라에) 개입한 경우로는 최악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은 통일됐을 것이다. 김일성은 한국군의 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본군과 싸웠기 때문이다. 김석원은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가장 심한 부역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군이 아니라, 벌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소련은 북쪽에서 김일성을 지지했고, 미국은 남쪽에서 김석원(과 같은 인물들)을 지지했다. 이는 한국으로선 최악이었다. 49~50년 한국 상황에서 이는 거의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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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소련) 문서들이 공개되는대로 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을 침공한 첫번째 주동자는 스탈린이 아닌, 김일성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김일성은 지속적으로 스탈린에게 지원을 간청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에게 제한된 지원을 허락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면적 침략을 감행했다. 나의 가장 심한 비평가들, 캐서린 위더스비와 같은 사람도 지금은 (나의 견해를) 인정한다. 캐서린은 늘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건 스탈린의 전쟁이다. 스탈린이 단추를 눌렀다’라고. 나는 그런 주장에 내 귀를 닫았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일 리가 없기에. 그리고 지금 판명됐다. 게릴라 전쟁이 아닌, 국지전이 아닌, 전면적 전쟁을 치르기로 한 결정은 김일성이 내린 것이다. 김일성의 목표 중 하나는 남한을 점령해서 김석원과 같은 사람을 붙잡아 그들의 목을 비틀고 그들이 30년대에 저지른 것을 추궁하려 했다는 것이다. 김석원이 김일성의 첫번째 아내 김혜순을 살해했다는 루머가 있다. 나는 김혜순이 그의 첫번째 아내인지, 그리고 이게 사실인지 모른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석원 사이에 누군가의 죽음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한국전쟁에 대한) 주장이 옳았다고 본다. 김대중은 ‘김일성이 50년대에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먼저 한국, 그 다음 일본 식의 세계 공산화 전략을 추구한 게 아니었다.”


북한 김일성김정숙 이전의 처였던 김혜순은 김석원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고, 김일성이 사망한 직후인 1994년 7월 25일에 찍은 사진도 알려져 있다.

박헌영의 외신 인터뷰 논란

북한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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