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희(申翼熙, 1892.06.09 ~ 1956.05.05)의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여구(汝耉)이며 호는 해공(海公)이다. 조선말 대사헌을 지낸 신단(申檀, 1831~1905)[1][2]의 5남 중 막내로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 160-1에서 태어났다.[3] 해방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법무·내무·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외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4] 해방 후에는 남북협상을 고집하며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임정 요인 김구, 김규식과는 달리 적극 참여하여 초대 국회의장을 지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야당인 민주당 후보가 되었으나 선거운동 기간 중에 급서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무난히 연임하게 된다.

생애

일제시대에 국내에 있은 사람은 모두 친일파

김구와 신익희는 "일제시대에 국내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라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는데 전국민을 모두 조사하고 처벌했으면 만족했을 것인가?[5][6]

Mark Gayn (1909~1981),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

[November 7, 1946 SEOUL] With characteristic bluntness, Kim Koo said: "Practically everyone in Korea is a collaborator. They all ought to be in jail."

[1946년 11월 7일, 서울] 김구는 특유의 퉁명스러운 어조로 "한국 내에 있은 사람은 사실상 모두 일제 협력자다. 그들은 모조리 감옥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서울, 東亞日報社, 1981) p.329

이 해(1945년) 12월 중순의 일이다.... 술기운 탓도 있겠지만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7]

참고 자료

항일 무장 독립운동 펼친 ‘민주주의 신봉자’
3·1운동 주도, 임정서 주요 역할…문맹퇴치 위한 계몽활동도 벌여

함께 보기

각주

  1. 신단(申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생년은 1837년 아닌 1831년(신묘(辛卯))이 정확하다.
  2. 신단(申檀) 1858년 문과방목
  3. (강북)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선생 묘 네이버 블로그 2008. 6. 18
  4. 임시정부 지도자 신익희 선생 61주기 추모식 내일 거행 연합뉴스 2017-05-04
  5. Mark Gayn,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6.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서울, 東亞日報社, 1981) p.329
  7. 《독립을 향한 집념(執念) : 고하 송진우 전기(古下宋鎭禹 傳記)》 (東亞日報 社, 1990년 5월) p.238 에는 당시 이런 발언이 오간 상황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