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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신림이 잘못 알려진 사례==
==왕신림이 잘못 알려진 사례==
왕신림(王新林)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서대숙]]의 경우===
===[[서대숙]]의 경우===
[[서대숙]]은 왕신림(王新林)이 소련군인 바실리에프(Vassiliev)라 하였다. 이는 아마도 중국인들이 와시리(瓦西里, Vasily)라 한 것을 보고, 소련의 성에는 바실리는 없으니 유사한 성 바실리에프(Vassiliev)로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서대숙]]은 왕신림(王新林)이 소련군인 바실리에프(Vassiliev)라 하였다. 이는 아마도 중국인들이 와시리(瓦西里, Vasily)라 한 것을 보고, 소련의 성에는 바실리는 없으니 유사한 성 바실리에프(Vassiliev)로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2022년 10월 19일 (수) 11:33 판

왕신림(王新林, Ван Синьлиня, Wang Xinlin)은 1930년대말부터 1940년대 전반까지 동북항일연군의 소련 망명과 수용 문제를 다루던 소련 극동전선군 요인의 중국식 암호명으로 두 사람이 있다. 첫번째 왕신림은 극동전선군 내무부장(內務部長) 바실리 류쉔코(Василия Люшенко, Vasily Lyushenko, 瓦西里 留森科) 소장이다. 왕신림(王新林)은 바실리(Vasily, 瓦西里)의 음을 차용한 것이다.[1] 김일성 회고록에는 류쉔코 장령이라 나온다. 바실리 류쉔코에 이어 두번째 왕신림은 동북항일연군의 소련망명 문제를 타결짓고, 88여단의 창설과 운영을 관장한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정보부장) 나움 소르킨(Наум Семёнович Соркин, Naum Semyonovich Sorkin, 瑙姆 谢苗诺维奇 索尔金, 1899~1980) 소장으로 1941년 3월 극동전선군에 부임했다.[2]


개요

아래 Gennady Konstantinov의 책에 의하면 첫번째 왕신림은 소련 극동전선군 내무부장 바실리 류쉔코(Василия Люшенко, 瓦西里 留森科) 소장이나,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구체적 정보는 없다.[1]

Для контактов между Объединенной армией и советским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м фронтом советская сторона назначила Ван Синьлиня (генерал-майора Василия Люшенко) ответственным за работу с парторганизациями Северо-Восточного Китая и Объединенной армией.

For contacts between the United Army and the Soviet Far Eastern Front, the Soviet side appointed Wang Xinlin (Major General Vasily Lyushenko) in charge of working with the party organizations of Northeast China and the United Army.

会议期间在讨论到抗联与苏联远东军关系问题时,苏方指定王新林,即苏联远东军内务部部长留森科少将为联系人。王新林为俄名瓦西里之谐音,是留森科的中国化名。

왕신림(王新林)이란 이름은 주보중(周保中)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3] 등 중국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데, 1941년 2월 이전은 바실리 류쉔코, 3월 이후로는 나움 소르킨으로 보면 된다. 동북항일유격일기에는 왕신림이 누구인지 실명을 밝히지는 않았다.

주보중, 동북항일유격일기 p.460
①王新林,系苏联远东红旗军总部派出的负责与东北抗日联军进行联络的主要 负责人的称号。最初的代表为瓦西里,后为便于东北抗日联军同志称呼和保 密,遂用“王新林”这个谐音。’后来苏方曾多次更换代表,但乃统用“王新林” 的称号。

왕신림이 잘못 알려진 사례

왕신림(王新林)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서대숙의 경우

서대숙은 왕신림(王新林)이 소련군인 바실리에프(Vassiliev)라 하였다. 이는 아마도 중국인들이 와시리(瓦西里, Vasily)라 한 것을 보고, 소련의 성에는 바실리는 없으니 유사한 성 바실리에프(Vassiliev)로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p.46 88여단 부분에 소련군 장교 Vassiliev가 나옴.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대는 조선공산당의 도움없이 북한통치를 시도했고 스탈린은 북한주둔총사령관 이반 치스티아코프(Ivan Chistiakov)도 1945년 6월에 임명하였다.註 050 이들이 연해주에서 북한주둔을 계획한 것은 불과 2개월 남짓하고 당시 연해주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재소한인들은 1937년 강제이주로 전부 중앙아시아로 갔고 그 당시 하바로브스크 근처에는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만주에서 후퇴하여 1941년부터 소련 연해주에 있었다. 여기서 이들을 지도한 소련사람은 바실리에프(Vassiliev;王新林) 라는, 소위 소련의 극동 88연대에 소속되어 있는 군인이었다. 김일성도 역시 만주에서 일군에게 쫓겨 와서 소련 88연대에 일원으로 있었고 그 곳에는 만주의 한인 빨치산들이 중국인들과 많이 섞여 있었다.

팽시로의 증언

왕신림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아, 상당 기간동안 부정확한 증언들이 유통되었다. 팽시로의 증언도 그러한 사례이다.

88여단 출신 중국인 팽시로(彭施鲁, 1914~2009)[4]의 증언에 의하면 왕신림은 2인으로, 극동군 내무부장 바실린 소장이며, 항일연군과 나쁜 관계에 있었고, 1941년 1월 두번째 왕신림으로 극동군 정보부장 차르겐 소장이 왔는데. 항일연군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였다.[5]

Shen Zhihua (沈志华)의 경우

셴즈화(沈志华, 沈志華, Shen Zhihua)는 화동사범대학(华东师范大学) 역사학과 교수이자 중국 베이징대학과 인민대학 겸임교수다.

Wang Xinlin (王新林, also known as Vassiliev)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계승본 2편, 1998년 출간): 1940년 3월 ~ 1945년 8월

제22장 혁명의 기치를 끝까지 고수하자 (1940년 4월 ~ 1940년 12월) 3. 국제당의 련락을 받고

내가 국제당의 련락을 다시 받은것은 1940년 10월중순이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부대들이 소할바령회의 방침에 따라 도처에서 소부대활동을 벌릴 때입니다.

국제당에서 파견한 련락원 2명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 련락원들의 말이 자기네를 파견한 사람은 원동군사령부에 있는 류쉔꼬 장령인데 그가 국제당의 명의로 전달하라고 한 사항은 12월에 하바롭스크에서 국제당이 소집하는 회의에 참가해달라는 것이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만주에서 활동하는 모든 항일무장부대들이 대부대활동으로부터 소부대활동으로 넘어가며 원동에 기지를 정하고 력량을 수습재편성할수 있도록 조속히 들어오라는 국제당의 지령도 동시에 전달하였습니다.

류쉔꼬는 원동군사령부에 있으면서 국제당이 주관하는 일을 맡아보았습니다. 그후 하바롭스크에 들어가서 그를 만나보았습니다. 그는 나를 만나자 이거 김일성동지의 손을 잡아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고 하면서 우리와의 련계를 짓기 위해 소부대와 소조들을 파견하던 경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습니다. 첫 대면부터 상대의 마음을 잡아끄는 열정과 친화력을 가지고있는 사람이였습니다.

류쉔꼬는 흔히 왕신림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였는데 주로 국제당이나 쏘련과 우리 사이에 련계를 지어주는 사업을 많이 하였습니다.

련락원들의 말에 의하면 1940년초에 국제당이 하바롭스크에서 소집하려고 했던 만주빨찌산지휘관들의 회의는 조선인민혁명군과 제1로군 대표들이 참가하지 않았기때문에 북만과 길동지구 빨찌산대표들만 참가한 회의로 되고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제당은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동북의 모든 항일무장부대 지휘관들의 회의를 기어이 소집하여 동북항일운동의 발전방향도 토의하고 쏘련이 당하고있는 국난도 타개하려고 하였습니다.

련락원들이 우리에게 와닿은것은 10월이지만 국제당이 회의소집과 관련한 통지를 보낸것은 1940년 9월이였습니다. 그 통지가 제2로군과 제3로군에는 전신으로 전달되였지만 무선통신체계가 없던 우리에게는 련락원들을 통해 전달되였습니다. 국제당이 하바롭스크회의에 참가하라고 지정한 대상은 각 로군의 총지휘, 정치위원, 당서기를 비롯한 주요군정간부들이였습니다.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1941년 1월 ~ 1942년 7월) 1. 하바롭스크 회의

왕신림은 쏘련원동군 정보부장 류쉔꼬의 가명이다.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 부대들이 쏘련경내에 들어가 활동하던 시기 국제당과 쏘련당, 쏘련원동군을 대표한 인물은 자기를 왕신림으로 행명하였다.

하바롭스크회의가 마감고비에 이르렀을 때 쏘련원동군의 쏘르낀장령이 류쉔꼬가 맡아하던 임무를 넘겨받았는데 그도 역시 왕신림이라는 이름으로 행명하였다.
........

동북항일련군의 지휘관들은 쏘련원동군의 우산밑에 들어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있었습니다. 10여년동안 풍찬로숙하면서 혈전을 벌려왔는데 통합은 무슨 통합인가, 절대로 동북혁명을 포기할수 없다, 쏘련측은 남의 사정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자기네 생각만 한다, 그들의 립장은 매개 나라 혁명의 독자성을 존중할데 대한 혁명적원칙을 무시하는것이라고 하면서 이 문제를 쓰딸린이나 지미뜨로브에게까지 제기하여 풀어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후에 알게 되였지만 쓰딸린과 지미뜨로브도 동북항일련군측의 이러한 립장을 지지해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문제와 관련하여 류쉔꼬는 쏘르낀과 교체되였습니다.

각주

  1. 1.0 1.1 Геннадий Константинов, "Особая 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ая.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фронта (第 88 国际特别旅. 중국어 번역도 같이 있음.)" (- Khabarovsk: Priamurskiye Vedomosti, 2015; ISBN 978-5-8003-0350-6) pp.73~74
  2. Геннадий Константинов, "Особая 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ая.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фронта (第 88 国际特别旅. 중국어 번역도 같이 있음.)" (- Khabarovsk: Priamurskiye Vedomosti, 2015; ISBN 978-5-8003-0350-6) p.91
  3.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4. 彭施鲁 - 维基百科
  5. 김찬정의 "비극의 항일 빨치산 (동아일보사, 1992)" pp.193~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