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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5월 일만군(日滿軍)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전사했다.
1935년 5월 일만군(日滿軍)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전사했다.


이홍광의 [[동흥사건|동흥습격사건]]은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이 주도한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사건]]보다 규모도 크고, 2년 먼저 일어났지만 지금은 거의 잊혀져 있다. 보천보사건도 역시 잊혀져 있었지만 해방 후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여 자신의 혁혁한 항일전공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유명해졌고, 그보다 더 큰 동흥습격사건은 고의적으로 은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이 단행한 여러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시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이 지금은 [http://www.cybernk.net/infoText/InfoAdminstList.aspx?mc=AD0101&ac=A1005002 양강도 김형직군 고읍노동자구]로 되어있는 것도 이러한 동흥사건 은폐작업의 일환일 것이다. 보천보 일대에는 대대적인 기념물이 조성되어 있으나, 동흥읍에는 동흥사건에 대한 기념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김일성 미화에 열심인 남한의 학자들도 북한 주장에 보조를 맞추어 [[보천보사건]]이 독립군 최조의 국내 진공이며, 일시적으로나마 보천보 지역이 해방되었다는 의미가 있다면서 사실과 맞지도 않게 부풀려 대단한 사건으로 취급하며 교과서에까지 싣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동흥사건]]과 이홍광에 대해서는 김일성 미화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고의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이홍광의 [[동흥사건|동흥습격사건]]은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이 주도한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사건]]보다 규모도 크고, 2년 먼저 일어났지만 지금은 거의 잊혀져 있다. [[보천보사건]]도 역시 잊혀져 있었지만 해방 후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여 자신의 혁혁한 항일전공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유명해졌고, 그보다 더 큰 동흥습격사건은 고의적으로 은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이 단행한 여러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시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이 지금은 [http://www.cybernk.net/infoText/InfoAdminstList.aspx?mc=AD0101&ac=A1005002 양강도 김형직군 고읍노동자구]로 되어있는 것도 이러한 동흥사건 은폐작업의 일환일 것이다. 보천보 일대에는 대대적인 기념물이 조성되어 있으나, 동흥읍에는 동흥사건에 대한 기념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김일성]] 미화에 열심인 남한의 학자들도 북한 주장에 보조를 맞추어 [[보천보사건]]이 독립군 최조의 국내 진공이며, 일시적으로나마 보천보 지역이 해방되었다는 의미가 있다면서 사실과 맞지도 않게 부풀려 대단한 사건으로 취급하며 교과서에까지 싣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동흥사건]]과 이홍광에 대해서는 [[김일성]] 미화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고의적으로 외면한다. 더구나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만주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며, 북한이 [[김일성]]의 전공으로 날조한 것이 확실한데도 이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국 길림성 반석시(磐石市) 조선족중학교는 그를 기념하여 1988년 11월 25일 반석시홍광중학교로 개칭하였다.<ref>[http://www.jlcxwb.com.cn/qihua/content/2013-05/06/content_107527.htm 승리의 군기 비춰준 불멸영령 - 리홍광] 길림신문 2013-05-06</ref>
중국 길림성 반석시(磐石市) 조선족중학교는 그를 기념하여 1988년 11월 25일 반석시홍광중학교로 개칭하였다.<ref>[http://www.jlcxwb.com.cn/qihua/content/2013-05/06/content_107527.htm 승리의 군기 비춰준 불멸영령 - 리홍광] 길림신문 2013-05-06</ref>

2021년 9월 23일 (목) 05:56 판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은 경기도 용인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935년 2월 13일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소속 20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동흥읍(東興邑)을 습격하여 일본측에 상당한 피해와 충격을 주었다.

생애

이홍광(李紅光, 1910~35)[1][2]의 본명은 홍해(弘海) 또는 홍규(弘奎)이며, 의산(義山)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3][4][5] 근래의 연구에서 그의 출생지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 400번지인 것이 밝혀졌다. 또 용인 이씨 족보와 제적등본에서 그의 가계가 밝혀지고, 그의 딸과 친척들이 국내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용인시 포곡읍사무소 발행 제적부와 용인이씨 족보에는 이름이 홍규(鴻圭)로 나와 있다.[6][7]

어릴 때 만주로 이주하였다. 남만(南滿)의 반석현(磐石縣)[8]에서 중국공산당 남만특위 아래에 제일 먼저 결성되었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군장 중국인 양정우(楊靖宇, 1905~1940))의 제1사(師) 사장(師長)이 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가 1935년 2월 13일 20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조선 국경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厚昌郡 東興邑)을 습격한 동흥습격사건은 일본 측에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 당시 국내에는 그가 18세의 미소녀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이홍광 측에서 심리전 차원으로 퍼뜨린 헛소문이라 한다.[9][10]

1935년 5월 일만군(日滿軍)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전사했다.

이홍광의 동흥습격사건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이 주도한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사건보다 규모도 크고, 2년 먼저 일어났지만 지금은 거의 잊혀져 있다. 보천보사건도 역시 잊혀져 있었지만 해방 후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여 자신의 혁혁한 항일전공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유명해졌고, 그보다 더 큰 동흥습격사건은 고의적으로 은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이 단행한 여러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시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이 지금은 양강도 김형직군 고읍노동자구로 되어있는 것도 이러한 동흥사건 은폐작업의 일환일 것이다. 보천보 일대에는 대대적인 기념물이 조성되어 있으나, 동흥읍에는 동흥사건에 대한 기념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김일성 미화에 열심인 남한의 학자들도 북한 주장에 보조를 맞추어 보천보사건이 독립군 최조의 국내 진공이며, 일시적으로나마 보천보 지역이 해방되었다는 의미가 있다면서 사실과 맞지도 않게 부풀려 대단한 사건으로 취급하며 교과서에까지 싣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동흥사건과 이홍광에 대해서는 김일성 미화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고의적으로 외면한다. 더구나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만주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며, 북한이 김일성의 전공으로 날조한 것이 확실한데도 이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국 길림성 반석시(磐石市) 조선족중학교는 그를 기념하여 1988년 11월 25일 반석시홍광중학교로 개칭하였다.[11]

몰년에 대한 논란

대다수 문헌들에는 그가 1935년 5월 12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원명은 2014년 발표한 논문에서 용인이씨 족보와 호적 등에서 이홍광의 가계를 확인하였고, 1938년 출생한 이홍광의 둘째딸이 생존해 있으며, 이홍광 본인이 1943년 출생신고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7] 이홍광이 1935년 전사했다는 최초 기록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1937년 중국측 신문 기사로는 1935년 전사가 확인이 되고,[1][2] 그의 전사 후 동지들이 조성했다는 묘소까지 확인되며, 이후 알려진 그의 활동 기록도 없으므로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그의 정확한 전사 연도에 대해서는 좀더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이홍광 열사전

참고 자료

각주

  1. 1.0 1.1 李紅光열사 약전 『구망일보(救亡日報)』 1937-09-18 (상해에서 간행되던 신문)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이홍광으로 검색)
  2. 2.0 2.1 李紅光열사전 중국 『구국시보(救國時報)』1937년 7월 10일자 기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3. 장세윤(張世胤),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4.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眞僞 金日成 列傳) (26) 이홍광과 동흥사건」 중앙일보 1974.06.05 종합 3면
  5. 이홍광(李紅光, 1910~193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용인출신으로 새롭게 밝혀진 항일영웅 이홍광 용인시민신문 2011.01.26
  7. 7.0 7.1 이원명, 1930년대 ‘在滿 항일운동가 李紅光(본명 李鴻圭)’의 戰死年度와 家系에 대한 일고찰 동북아 문화연구 제38집, 2014.3, pp.131-159 (29 pages)
  8. 길림성 반석시(吉林省 磐石市) 구글맵
  9. 李紅光은 十九歲美人 男便李某가 首領 이들 일단은 전부 조선인 청년 東興襲擊紅軍正體 매일신보 1935-02-19 02면 08단
    "동흥사건 餘聞(여문). 共軍(공군) 두목 李紅光은 18세 남장 미인. 조선 소녀로 부하가 6백여명. 습격 당시도 진두에서 직접 지휘" 조선일보 1935.02.23 / 석간2 : 2 면
    李紅光(이홍광) 戰死說(전사설) 1935.11.01 동아일보 2면
  10. 平安北道, 東興を襲擊した東北人民革命軍第一司令官李紅光とは全く妙齡の女性, 丹下部長歸任談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5년 02월 27일 4면 1단
  11. 승리의 군기 비춰준 불멸영령 - 리홍광 길림신문 2013-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