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습격사건(土城襲擊事件)은 1934년 1월 22일 밤 11시 30분 (또는 1월 23일 새벽 0시 5분이라고도 함.) 만주의 공산군 300여명이 평북 자성군 장토면 토성동(平北 慈城郡 長土面 土城洞)[1][2]을 습격한 사건을 말한다.
북한은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습격 사건을 김일성의 엄청나게 중요한 항일전공으로 선전하고, 남한의 좌파 학자들도 항일무장투쟁이 끊어진 줄 알던 시기에 일어난 보천보 사건으로 조선인들이 독립에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둥 하면서 부풀려 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규모였던 1935년 2월 13일의 동흥습격사건도 있었고, 1934년 1월 23일의 토성습격사건도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큰 규모였다. 하지만 이런 두 사건이 보천보 사건의 명성(?)을 가릴까보아 남북한 어디에서도 거론조차 하지 않아 잊혀져 있다.
동흥습격사건과 토성습격사건을 보면 보천보 사건을 남북한 모두에서 얼마나 터무니 없이 과장하여 선전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남한의 좌파들은 흔히 보천보 사건 당시 동아일보가 호외[3]를 발행한 때문에 이 사건과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토성습격사건은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매일신보도 같은 날 호외를 발행하여 보도했음에도[4][5] 완전히 잊혀져 있으므로 이런 주장이 거짓말이라는 것도 밝혀진다.
개요
이 사건의 대체적인 경과는 아래와 같다.[6]
- 고바야시 추지(小林忠治), 토성에 있어서의 마적습격사건(土城に於ける馬賊襲擊事件)[8]
[고바야시 추지(小林忠治)는 당시 토성주재소(土城駐在所) 경찰관임.]
당시 신문보도에는 침입한 병력의 수는 300여명이라 하였고, 두목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일본군 수비대(守備隊)의 기록에는 침입한 병력의 수가 100여명이라 했다.
1933년 12월 중순 임강현(臨江縣) 서방에 왕전양(王殿陽, 1892~1934.11.27)의 부대 400여명이 있다고 했으므로,[9][10] 그의 부대가 침입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왕전양(王殿陽)은 중국인으로 1934년 11월말 귀순했다고 당시 신문에 보도되었으나 실제로는 11월 27일에 사살 당했다.[11][12][13][14]
당시의 신문 보도
- 평북자성군토성(平北慈城郡土城)을 공군삼백명(共軍三百名)이 습격(襲擊) 1934.01.23 동아일보 호외 1면
- 공산군 삼백여명(共產軍 三百餘名)이 자성토성촌(慈城土城村)을 襲擊 1934.01.24 동아일보 (23일)석간 2면
- 今曉에 越江駐在所等에 襲來, 中江鎭軍警이 擊退
- 民家六戶燒却(민가육호소각) 共軍一名(공군일명)은 射殺(사살)
- 鴨綠江岸一帶(압록강안일대)를 嚴重히 警戒中(경계중), 大部隊가 侵入 襲擊 한 것은 近來의 稀有한 事件
- 兩方(양방)의死者七名(사자칠명) 1934-01-24 동아일보 조간 2면
- 馬賊二百名(마적이백명)이 또慈城襲擊說(자성습격설) 1934.02.06 동아일보 2면
- 삼백여명 토병단이 자성군하를 습격 부락에 衝火(충화) 6호 燒盡(소진). 국경 수비대 출동 : 조선일보 1934.01.24 석간2 2 면
- 반만군. 王殿揚 맹활동 : 조선일보 1934.03.21 석간2 2 면
- 三百餘의 大匪賊團 昨夜中江鎭에 侵入 放火와 掠奪의 警急을 듯고 警官과 守備隊가 出動擊退 매일신보[每日申報] 1934년 01월 24일 석간 7면
- 中江鎭管內匪賊侵入後報 賊團은 大刀會匪 住民六名이 被殺 돈도 三백五十원을 앗겻다 沍寒의 國境極度로 緊張 매일신보[每日申報] 1934년 01월 25일 7면 8단
- 馬賊團!鮮內侵入, 土城駐在所を襲擊, 一部は部落に放火掠奪を開始, 一時間の交戰で擊退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01월 24일
- 土城襲來の匪賊を發見して急襲す, 福崎大尉以下の追擊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01월 27일
- 平安北道, 土城事件以來匪賊の跳梁甚だし, 渭原署で嚴重に警戒對岸の避難民新川へ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02월 02일
- 近寄る匪賊共には手榴彈が欲しいもの, 土城事件の實例に鑑みて痛切と丹下平北警察部長語る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02월 17일
- 대안의 비적, 토성[土城]에 침입 부산일보[釜山日報] 1934년 01월 25일
주요 기사 원문 이미지
일본군 수비대(守備隊)의 기록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2960600、昭和9年「陸満密綴 第3号」 自 昭和9年2月5日 至 昭和9年3月13日(防衛省防衛研究所)」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20872600、歴史資料 昭和9~12年(防衛省防衛研究所)」
- 標題:軍歴史関係事項調査の件報告 朝平憲秘庶第140号/昭和9年度 : 資料作成年月日 昭和14年11月9日(1939/11/09)
(一)派遣出動 ○越境部隊随伴 (1)一月二十三日午後十一時三十分頃平安北道慈城郡土城洞ニ対岸ヨリ匪賊百余名来襲殺傷掠奪、防火ヲ敢行対岸ニ引揚ケタルニヨリ第二十師団第一守備中江鎮慈城守備隊ノ一部追撃ノ為越境中江鎮憲兵分遣隊ヨリ左記四名右部隊ニ随伴同月三十日皈還ス 記 憲兵伍長佐久間政一 以下四名
(2)三月三十一日午後八時平安北道慈城郡長土面中里ニ対岸ヨリ匪賊数名侵入満人一名ヲ拉去外走セルニ依リ第二十師団第一守備隊中江鎮守備隊ノ一小隊越境追撃ニ伴ヒ中江鎮憲兵分遣隊ヨリ左記ノ者右部隊ニ随伴四月一日皈還ス 記 憲兵伍長佐久間政一
참고 자료
- 고바야시 추지(小林忠治), 「토성에 있어서의 마적습격사건(土城に於ける馬賊襲擊事件)」 (1936년 3월)[8]
- 고바야시 추지(小林忠治), 「토성에 있어서의 마적습격사건의 추상(土城に於ける馬賊襲擊事件の追想)」 : 朝鮮初等敎育硏究會 編, 『조선의 교육연구(朝鮮の敎育硏究)』 1936년 8월호 pp.98~100. (국립중앙도서관 Vol.16)
- 共軍 300명, 평북 慈城郡 土城 습격 : 1934년 01월 23일 신동아 4-3(1934. 3. )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 (북한연구소, 1988) pp.427~428.
- 九一八事變之後讓日軍近似瘋狂的傳奇人物 : 王殿陽 每日頭條 2017-12-06
- 抗日英雄王殿阳 —— 阳岔故事之七 通化日报 2019.4.10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2120177700、満洲帝国協和会史料 協和会史資料集 第4集 中央事務局新京移転前後(防衛省防衛研究所)」
- 歸順工作の一班 平山工作員と匪首との会見記録及同往復文書 昭和8年 (1933)
- 일본측 귀순공작반(歸順工作班)에 왕전양(王殿陽)이 보내온 답신이 나옴.
함께 보기
각주
- ↑ 자성군(慈城郡)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현재의 자강도 중강군 토성리이다 : 토성동 - 북한지역정보넷
- ↑ 보천보 사건을 보도한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 1 /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 2
- ↑ 만주 공산군의 토성습격사건을 보도한 1934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 호외
- ↑ 토성습격사건을 보도한 1934년 1월 24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 : 기사 말미에 호외의 내용을 재록한다고 하였다.
- ↑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 (북한연구소, 1988) pp.427~428.
- ↑ 抗日英雄王殿阳 —— 阳岔故事之七 通化日报 2019.4.10
- ↑ 8.0 8.1 國境警備 平安北道警察部 編 (平北警鐘編輯部, 昭和11[1936]년 3월 20일) pp.25~34.
- ↑ 臨江縣西方(임강현서방) 反滿軍員數(반만군원수) 1933.12.13 동아일보 2면
- ↑ 反滿軍(반만군)과提携(제휴)하야 朝鮮(조선)○○團活動(단활동) 1933.12.13 동아일보 2면
- ↑ 反滿軍巨頭(반만군거두) 王殿陽射殺(왕전양사살) 石棚子附近(석붕자부근)서 1934.12.05 동아일보 2면
- ↑ 又も散る桐一葉, 匪賊討伐着着進み王殿陽遂に歸順, 王道樂土の理想鄕建設近き滿洲國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11월 17일 3면 1단
- ↑ 秘中の秘, 匪首“王殿陽”歸順顚末を語る, 高橋守備隊長と會見約二千の歸順を見ん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11월 30일 3면 3단
- ↑ ◈滿軍의 頭目 王殿陽被捉說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34년 11월 29일 2면 4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