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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갈망==
홍진기<ref>https://ko.wikipedia.org/wiki/%ED%99%8D%EC%A7%84%EA%B8%B0 가계 항목 참조</ref>는,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법무부장관일때는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경향신문]]을 폐간하였으며, [[조봉암]]을 사형집행 하였다. 내무부장관일때는 4.19 시위에 발포명령을 내려 4.19혁명이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홍진기]]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사면]]으로 풀려났으며, 삼성 [[이병철]]회장은 평소 홍진기씨를 존경<ref>http://image.yes24.com/usedshop/2018/0718/_/732f728a-0928-4aa2-a4af-9cebbd2a05b2.jpg</ref>하였으며 사돈지간이 되었다.  
 
아버지 [[홍진기]]는 국무위원으로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으로 입신양명하였으나 4.19혁명으로 사형선고후 [[박정희]]대통령의 사면으로 말그대로 구사일생하였다. 그리고 [[이병철]]회장과의 사돈관계로 집안에 부를 일구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산으로 대한민국내 진보,좌파세력에게 계속 견제를 당하여 왔다.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5146 박정희·허문도·홍진기, 언론자유 반헌법 인물로]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열전편찬위)가 16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열전 수록 가능성이 큰 집중검토 대상자 405명에 대해 발표했는데 이 중 언론자유 침해 관련자 20명을 발표했다. 해당 명단에는 독재자 박정희·전두환, '''홍진기 중앙일보 초대회장''', ‘5공실세’ 허문도 전 국토통일부 장관 등이 포함됐다.'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993 3차 개정이후 국보법 비판하며 언론·국민 탄압도구 경계]
'지난 '''1958년 국가보안법 3차 개정''', 이른바 ‘'''2.4 보안법 파동'''’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는 언론의 저항으로 점철됐다. 12월24일 한의석 국회부의장의 경위권 발동으로 무술경위 300여명이 의사당에 난입해 새 국가보안법을 통과한 것을 두고 신문들은 ‘국캄, ‘민주주의의 종언’을 선언하기도 했다. 
신문들의 이런 태도는 58년 11월7일 자유당 간부와 홍진기 '''법무부장관(중앙일보 창립자)'''이 합의한 새 국가보안법에 느닷없이 언론조항이 포함되면서 이미 예견됐던 일이었다. 11월10일 공개된 새 개정안 17조(약속, 협의, 선동, 선전 등) 5항에 ''“공연히 허위 사실을 허위인줄 알면서 적시 또는 유포하거나 사실을 고의로 왜곡하여 적시 또는 유포함으로써 인심을 혹란케하여 적을 이롭게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
 
*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54 법대 1층 유민홀 문제 있다]
' 돈만 내면 국가폭력의 장본인도 기념해 줄 것인가. 법대 15동 건물 1층에 최근 새로이 로비가 개관했다. 로비에는 기부자인 홍석규 보광그룹 사장의 선친인 「중앙일보」 창업주 홍진기의 호를 따 ‘유민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홍진기가 생전에 범한 역사적 과오들에 비춰볼 때 ‘유민홀’이라는 명칭은 부적절하다. 홍진기는 이승만 정권에 부역해 국가폭력에 일조한 ‘헌법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
 
언제 어디서 진보세력의 칼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보수진영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보호해줄 세력이 전무하며, 박근혜 대통령 이후 보수에서 인물과 세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진보세력의 뒷배는 '[[이석기]]와 [[통진당]]에서 보듯이 친북,종북이며, 북한의 뒷배는 중국공산당의 중국이다. 한반도 역사에서 권력을 유지하고 권세로서 억누르는데에 있어서 조선시대에 [[명]](중국)에 대한 사대만한 역사의 증명은 없었다.  일본의 [[천황제]]는 국내에 충성의 상징으로 존재하였고 조선의 중국 사대는 국외에 있음으로, 실질적으로 충성의 상징이 국내냐 국외냐의 차이일뿐 일반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서는 동일한 시스템이다. (물론 큰차이는 있다. 중국은 군사력으로 쳐들어 올수 있고, 일본 천황에게는 무력이 없었다.  일본은 번주에 의해 각 번주들간의 무한경쟁으로 사무라이에 대한 무력으로 나아갔고 조선은 문치로 나아간 엄청 큰 차이가 있었다.)
 
4.19혁명으로 집안의 멸족에 까지 가까이간 집안으로서는 생존에 대한 집착만큼은 벗어날수 없었으므로, 결국 언젠 칼을 들이댈지 모르는 진보,좌파에 대한 방패와 권세를 유지할 가장 좋은 방법은  최종 뒷배인 친중으로 나아감 만한 것이 없다.
 
어차피 언제가 덮쳐올 민중의 거대한 쓰나미 파도라면 그  쓰나미를 타는 것도 생존의 방도이다.
아버지를 살려준 [[박정희]] 대통령의 딸은 탄핵으로 <ref>https://newsimg.hankookilbo.com/2017/10/03/201710031190944695_1.jpg</ref>
사돈으로 부를 일구게 해준 [[이병철]] 회장의 손자는 구속<ref>https://file.mk.co.kr/meet/neds/2017/07/image_readtop_2017_468299_14999244802954081.jpg</ref>으로 나아 갔다. 이제 진보, 좌파들의 우러름을 받는 위치까지 갔다.
 
그리고 [[중앙일보]]를 통해 보수에게는 보험을 들었다. <ref>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6829 ‘주적 개념’ 없애야 한다던 홍석현…당시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홍석현 회장은 “남북문제는 우리가 김대중 정권 이전인 95년부터 일관되게 고민과 연구를 해왔다. 김영삼 정권 초기에 지금보다 빠른 속도로 햇볕정책을 펴다 180도 돌아섰을 때도, 김대중 정권이 날 잡아넣었어도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우리는 국가보안법 폐지까지 사설에 쓴 신문”이라며 조선·동아와 차별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앙일보가 지금은 어떤가요? 2002년 인터뷰를 하면서 홍석현 회장은 “개인적으로 남북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대북지원이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 중앙은 남북 긴장완화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논조를 펴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북 긴장완화에 도움이 되는 방향의 논조’를 잘 펴나가고 있다고 보는지요. 참고로 중앙일보는 오늘(16일) 사설에서 “이번 백서는 우리 군의 주적관을 애매모호하게 흐려놓았다”고</ref>. 그러나 보수 길들이기는 잊지 않았다. <ref>https://youtu.be/HVCl1EJG9m0</ref>, <ref>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828679 황교안 표제어의 중앙일보 항목 참조</ref>
 
홍석혁의 아버지 [[홍진기]]는 서울 토박이 중인계급의 집안으로서 아버지의 쌀가게가 어려워진후 어머니가 거리에서 야채장사로 학비를 벌어 경성제국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한다. <ref>https://namu.wiki/w/%ED%99%8D%EC%A7%84%EA%B8%B0</ref>그리고 일제시대동안 판사로서 경력을 쌓아 친일파로 몰렸다. 전형적인 중인계급에서 조선시대에서는 절대 개천에서 용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서 그는 자신의 머리좋음으로 노력으로 판사까지 올라갔다. 즉, 일제시대이지만 개인의 노력으로 출세할수 있었다.
대한민국 건국후 법무부 공무원으로 새출발하고 이승만 집권 12년의 마지막 3년에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그로서는 개인의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회는 과거 조선시대가 아닌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로마 문명에 대한 바탕이 없고 경험도 일제시대밖에 없었기에 조급함으로 성공에 대한 몰입으로  오히려 이승만 정권의 마지막을 앞당기는데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홍석현은 자신의 아버지가 평생에 걸친 집안의 배경이 아닌 개인의 노력과 창의로 성공할 수 있는 나라 만들기에 반기를 들고 아버지를 부정한 격이다.<ref>물론 홍진기는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국가 건설에 방해를  하였다. </ref>
 
===아버지, 홍진기===
 
홍석현씨의 아버지, [[홍진기]]<ref>https://ko.wikipedia.org/wiki/%ED%99%8D%EC%A7%84%EA%B8%B0 가계 항목 참조</ref>는,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법무부장관일때는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경향신문]]을 폐간하였으며, [[조봉암]]을 사형집행 하였다.
내무부장관일때는 4.19 시위에 발포명령을 내려 4.19혁명이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홍진기]]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사면]]으로 풀려났으며, 삼성 [[이병철]]회장은 평소 [[홍진기]]씨를 존경<ref>http://image.yes24.com/usedshop/2018/0718/_/732f728a-0928-4aa2-a4af-9cebbd2a05b2.jpg</ref>하였으며 사돈지간이 되었다.  


* 이기붕에 대한 과잉충성
* 이기붕에 대한 과잉충성

2019년 7월 7일 (일) 19:30 판

홍진기[1]는,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법무부장관일때는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경향신문을 폐간하였으며, 조봉암을 사형집행 하였다. 내무부장관일때는 4.19 시위에 발포명령을 내려 4.19혁명이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홍진기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사면으로 풀려났으며, 삼성 이병철회장은 평소 홍진기씨를 존경[2]하였으며 사돈지간이 되었다.

  • 이기붕에 대한 과잉충성

[3]

  • 경제담당 검사 회의 ( 제1공화국에서는 검사회의를 법무부장관이 주관하는 게 적절하였는지 알려주십시요.)

  • 국무위원들 풍경

[4]


4.19발포 명령

  • 4.19 발포 명령자 공판.[5],[6]


  • 정.부통령 선거일자 공고[7]



신국가보안법으로 경향신문 폐간

  • 국가보안법 운영 실무자 회의[8]

  • 신국가보안법의 첫 적용으로 경향신문 폐간[9]

  • 정진석 교수, 이승만과 언론 : 질의응답 1 - 경향신문 폐간

  • 4.19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 윤보선 대통령 또한 신문윤리위원회 창설로 언론 통제를 시작함.[10]

신국가보안법으로 조봉암 사형

법무부 장관으로서 조봉암 사형집행.[11]

  1. https://ko.wikipedia.org/wiki/%ED%99%8D%EC%A7%84%EA%B8%B0 가계 항목 참조
  2. 732f728a-0928-4aa2-a4af-9cebbd2a05b2.jpg
  3. 이기붕 의장 63회 생신. -이승만 대통령이 보내온 케익을 자르는 이기붕씨와 박 마리아 여사. -항상 젊은 마음으로 더욱 힘써 일하겠다고 평소의 소감을 피력. -이기붕의장 참석인사들과 환담을 나누는 모습. -홍진기, 최인규 장관들 참석.
  4. 6.25때 파괴된 여러 시설기관의 복구와 새로운 시설 증축 및 준공식. 새로 신설된 서울 사법보호위원회 준공식.사법 보호회는 형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의 재생의 길을 열어 주는 곳.홍진기 법무부장관
  5. 4.19 당시 학생들에게 총을 쏘게한 발포 명령자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려 현장 검증이 실시됨. -4월 19일 평화적인 학생데모원에게 총을 쏘게 해서 살인죄, 살인교사죄로 기소된 전 법무부장관 홍진기 등 발포 명령자 6명에 대한 첫 공판이 7월 13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림.
  6. https://youtu.be/wztqjwsirHc 내무부장관 홍진기
  7. 정·부통령 선거일자 공고. -정부에서는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 선거일자를 3월 15일에 실시 할 것이라고 공고. -국무위원들 회의 모습. -최인규, 홍진기, 송인상, 김정렬, 전성천씨 의견 발표 모습. -모범선거가 될 것을 요망.
  8. 홍진기 법무부장관의 주재로 국가 보안법 운영에 관한 실무자 회의가 이루어짐. -신 국가보안법의 공정한 운영을 위한 전국 검찰청 실무자 회의가 대검찰청 회의실에서 열림. -홍진기 법무부장관의 주재로 열림.
  9. 자유당은 보안법 개정을 추진한다. 보안법상 국가기밀의 범위가 군사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역으로 확대되고, 허위사실 유포 처벌 조항과 헌법상의 기관에 대한 명예훼손 조항이 추가됐다. 보안법이 개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보성향의 야권언론인 경향신문이 폐간됐다. 정부가 발표한 폐간 사유는 법원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경향신문은 1년 후 복간된다. 얼마 후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이 체포되는 진보당 사건이 벌어진다. 이유는 조봉암이 주장한 평화통일 방안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평화통일은 북한에서 사용하던 용어로 이승만의 무력통일과 정면으로 대치됐다. 대법원은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나 조봉암에게는 이중첩자 양명산을 통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미국은 조봉암의 사형을 막기 위해 다울링 특사를 파견한다. 다울링은 이기붕에게 조봉암 사형이 가져올 부정적 결과에 대해 경고했지만 결과를 뒤집진 못했다. 결국 1959년 7월 30일,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우방도, 민심도 잃어버리고 만다.
  10. 따뜻한 통제
  11. 조봉암의 사형을 전환점으로 미국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고 차기 정부 수립을 위한 전략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4·19 혁명 때는 결국 이승만의 하야를 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