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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 또는 3·15 개표조작은 1960년 3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이기붕 후보가 79.2%의 득표율로 제5대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승만 후보를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 결과는 부정에 의한 것이었고, 이 선거는 결국 부정선거로 밝혀졌다.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게 되었고 무리한 개헌 등으로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자유당에 불리한 여론이 생기게 된 것이다. 결국 이에 분노한 자유당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그의 측근들이 내무부 관료들과 자유당 소속 정치 폭력배 이정재, 임화수 등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 개표 조작을 감행하였다.
==개요==
3·15 부정선거 또는 3·15 개표조작은 1960년 3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였다. 선거에서 [[이기붕]] 후보가 79.2%의 득표율로 제5대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승만]] 후보를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기붕의 '''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임이 드러났다.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난 번의 그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 활동에 열을 올렸다. 처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짜게 된다.
==과정==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게 되었고 무리한 개헌 등으로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자유당]]에 불리한 여론이 생기게 된 것이다. 결국 이에 분노한 [[자유당]]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그의 측근들이 내무부 관료들과 자유당 소속 정치 폭력배 [[이정재]], 임화수 등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 개표 조작을 감행하였다.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난 번의 그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 활동에 열을 올렸다. 처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짜게 된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 운동망을 조직한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 운동망을 조직한다.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 독찰하도록 한다.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 독찰하도록 한다.


위의 두 가지 방법 이외에도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이는 이승만이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헌법상 대통령 승계를 하는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밖에 이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위의 두 가지 방법 이외에도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이는 [[이승만]]이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헌법상 대통령 승계를 하는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밖에 이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정치 깡패를 동원한다.
정치 깡패를 동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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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에는 경찰이 가담하였다. 그러자 몇몇 유권자들이 "경찰이 수사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 라고 호소하였지만, 깡패들이 "사실을 해명하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또한, 3월 9일과 10일에는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민주당 간부가 구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민주당은 이에 대해 '부정선거 거부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모든 것에는 경찰이 가담하였다. 그러자 몇몇 유권자들이 "경찰이 수사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 라고 호소하였지만, 깡패들이 "사실을 해명하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또한, 3월 9일과 10일에는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민주당 간부가 구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민주당은 이에 대해 '부정선거 거부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부정 선거가 폭로되자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부정선거를 시위하던 학생들 중 김주열 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화장된 유골이 마산 앞바다에 유기되면서 후일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선거는 결국 국회에서 무효 처리되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 데모대와의 대화를 통해 이기붕 부통령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후 즉각 하야하였다. 하야 후 한달 간 사저인 이화장에서 머물다 병환 치료차 하와이로 망명했다.
부정 선거가 폭로되자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부정선거를 시위하던 학생들 중 [[김주열]] 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화장된 유골이 마산 앞바다에 유기되면서 후일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선거는 결국 국회에서 무효 처리되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 데모대와의 대화를 통해 이기붕 부통령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후 즉각 하야하였다. 하야 후 한달 간 사저인 [[이화장]]에서 머물다 병환 치료차 [[하와이]]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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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부정선거와 관련된 소요사태의 전모와 원인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점은 최고 통지자로서의 결격사유로 지목되지만, 거꾸로 부정선거에서 그가 깊숙이 개입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증거로 김주열의 시신 발견 그 다음날 열렸던 국무회의 속기록을 훑어볼 필요가 있다.
이건 두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당시 연로했던 그가 효과적으로 국정 전반을 장악하지 못했을 가능성
둘째, 이기붕이 이끄는 자유당이 선거부정을 지휘-연출했던 총본산
   
{{인용2|제 36회 국무회의(1960년 4월 12일)
<시국 안정에 관하여>
이승만대통령 : [정부가 잘못하는 것인지 민간에서 잘못하는 것인지 몰라도 아직도 그대로 싸우고 있으니 본래 선거가 잘못된 것인가?] 하시는 하문
이승만대통령 : [나로서 말하기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리 국민은 아직 민주주의를 하여나가기까지 한참 더 있어야 할 것이며 정당을 하여갈 자격이 없다고 본다. (중략)어린아이들(김주열 군을 언급하는 걸로 추정됨)을 죽여서 물에 던져놓고 정당을 말할 순 없으니 무슨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대통령을 내놓고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이외는 도리가 없다고 보는데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이 없는가?] 하시는 하문
그리고 오히려 마산의 학생 시체 발견에 관한 보고를 받고 발끈해서 말한다.
“[[부정선거]]를 왜 한거야? 어린애를 죽여놓고 뭐라고? 공산당 짓이라? 그걸로 해결될 것 같아? 대통령이 책임져야해. 내가 그만둬야 도리이니 후속대책을 빨리 마련하시오” 라며 자진 하야를 암시했다.
또 이승만은 4.19경찰의 발포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태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는 병원으로 달려가 위문하면서도 “불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젊은이들이 장하다” “경찰이 백성을 죽이다니? 나라가 어떻게 백성을 죽일 수 있어?" 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 돌아와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고 전국에 방송한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오늘은 한사람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 ”내가 그만두면 사람들은 안 다치겠지?" 라며 걱정을 했다.
이후 이승만의 하야는 구체화되고 4.22일 시위 중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을 방문하여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젊은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 라는 말을 남기고 실제로 하야를 결행한다.
국민이 하야하란다고 해서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물러나는 독재자를 본 적이 있는가?
또한 퇴임 후 각국 수반의 위로 편지에 대해 이러한 답장을 쓴다. “나를 위로하는 편지는 안 받겠소.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오.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니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요”
그는 1900년대 초 20대 시절에 썼던 [독립정신]이라는 책에서 “조선의 무식하고 천하며 약한 형제자매들이 스스로 각정하여 국민정신이 바뀌기를 원하고 또 원하는 바이다”라고도 말했었는데 이에 대한 실현이라는 점에서 행복하다고 대답한 것이다.
|출처: 이승만 기념관}}
 
 
[[분류:부정선거]]
[[분류:한국 현대사]]

2020년 11월 21일 (토) 20:39 기준 최신판

개요

3·15 부정선거 또는 3·15 개표조작은 1960년 3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이기붕 후보가 79.2%의 득표율로 제5대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승만 후보를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기붕의 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임이 드러났다.

과정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게 되었고 무리한 개헌 등으로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자유당에 불리한 여론이 생기게 된 것이다. 결국 이에 분노한 자유당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그의 측근들이 내무부 관료들과 자유당 소속 정치 폭력배 이정재, 임화수 등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 개표 조작을 감행하였다.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난 번의 그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 활동에 열을 올렸다. 처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짜게 된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 운동망을 조직한다.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 독찰하도록 한다.

위의 두 가지 방법 이외에도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이는 이승만이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헌법상 대통령 승계를 하는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밖에 이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정치 깡패를 동원한다. 공개 투표를 계획한다(예: 사람들이 단체로 지나가면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이들이 그들에게 "자유당인 거 잊지 마라" 등의 말을 하는 것). 완장 부대를 활용한다(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누구 찍어야 하는 지 알지" 따위의 말로 자유당에 한 표를 던지라고 협박하는 것). 투표가 시작되기 전에는 자유당에 한 표를 던진 가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집어 넣는다. 야당 참관인은 투표하는 장소에서 추방시킨다.

이 모든 것에는 경찰이 가담하였다. 그러자 몇몇 유권자들이 "경찰이 수사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 라고 호소하였지만, 깡패들이 "사실을 해명하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또한, 3월 9일과 10일에는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민주당 간부가 구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민주당은 이에 대해 '부정선거 거부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부정 선거가 폭로되자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부정선거를 시위하던 학생들 중 김주열 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화장된 유골이 마산 앞바다에 유기되면서 후일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선거는 결국 국회에서 무효 처리되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 데모대와의 대화를 통해 이기붕 부통령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후 즉각 하야하였다. 하야 후 한달 간 사저인 이화장에서 머물다 병환 치료차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승만은 부정선거와 관련된 소요사태의 전모와 원인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점은 최고 통지자로서의 결격사유로 지목되지만, 거꾸로 부정선거에서 그가 깊숙이 개입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증거로 김주열의 시신 발견 그 다음날 열렸던 국무회의 속기록을 훑어볼 필요가 있다. 이건 두가지로 해석된다 첫째, 당시 연로했던 그가 효과적으로 국정 전반을 장악하지 못했을 가능성 둘째, 이기붕이 이끄는 자유당이 선거부정을 지휘-연출했던 총본산

제 36회 국무회의(1960년 4월 12일)

<시국 안정에 관하여> 이승만대통령 : [정부가 잘못하는 것인지 민간에서 잘못하는 것인지 몰라도 아직도 그대로 싸우고 있으니 본래 선거가 잘못된 것인가?] 하시는 하문 이승만대통령 : [나로서 말하기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리 국민은 아직 민주주의를 하여나가기까지 한참 더 있어야 할 것이며 정당을 하여갈 자격이 없다고 본다. (중략)어린아이들(김주열 군을 언급하는 걸로 추정됨)을 죽여서 물에 던져놓고 정당을 말할 순 없으니 무슨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대통령을 내놓고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이외는 도리가 없다고 보는데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이 없는가?] 하시는 하문

그리고 오히려 마산의 학생 시체 발견에 관한 보고를 받고 발끈해서 말한다. “부정선거를 왜 한거야? 어린애를 죽여놓고 뭐라고? 공산당 짓이라? 그걸로 해결될 것 같아? 대통령이 책임져야해. 내가 그만둬야 도리이니 후속대책을 빨리 마련하시오” 라며 자진 하야를 암시했다. 또 이승만은 4.19경찰의 발포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태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는 병원으로 달려가 위문하면서도 “불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젊은이들이 장하다” “경찰이 백성을 죽이다니? 나라가 어떻게 백성을 죽일 수 있어?" 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 돌아와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고 전국에 방송한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오늘은 한사람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 ”내가 그만두면 사람들은 안 다치겠지?" 라며 걱정을 했다. 이후 이승만의 하야는 구체화되고 4.22일 시위 중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을 방문하여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젊은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 라는 말을 남기고 실제로 하야를 결행한다. 국민이 하야하란다고 해서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물러나는 독재자를 본 적이 있는가? 또한 퇴임 후 각국 수반의 위로 편지에 대해 이러한 답장을 쓴다. “나를 위로하는 편지는 안 받겠소.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오.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니 이런 날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요” 그는 1900년대 초 20대 시절에 썼던 [독립정신]이라는 책에서 “조선의 무식하고 천하며 약한 형제자매들이 스스로 각정하여 국민정신이 바뀌기를 원하고 또 원하는 바이다”라고도 말했었는데 이에 대한 실현이라는 점에서 행복하다고 대답한 것이다.

― 출처: 이승만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