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프락치 사건은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남조선노동당의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현역 국회의원 13 명이 검거, 기소되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항소심이 시작되기 전에 6.25 전쟁이 발발하여 이들 중 12명이 월북하거나 납북되었다.

개요

좌경화된 기존 학계에서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대부분 이승만 정권의 조작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발굴된 북한과 소련 측 자료에 의하면 다수의 남한 국회의원들이 북한에 포섭되어 활동한 것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구속된 의원들과 1심 형량은 아래와 같다.[1]

1949년 5월에 현역 국회의원인 이문원(李文源), 최태규(崔泰奎), 이구수(李龜洙) 등 3명이 검거된 것을 시작으로 6월에는 황윤호(黃潤鎬), 김옥주(金沃周), 강욱중(姜旭中), 김병회(金秉會), 박윤원(朴允源), 노일환(盧鎰煥), 김약수(金若水, 국회 부의장) 등 7명이, 8월에는 서용길(徐容吉), 신성균(申性均), 배중혁(裵重赫) 등 3명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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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일환·이문원에게 징역 10년, 김약수·박윤원에게 징역 8년, 김옥주·강욱중·김병회·황윤호에게 징역 6년, 이구수·서용길·신성균·배중혁에게 징역 3년, 최태규에게 징역 3년과 벌금 10만원을 각각 선고했다. 이에 피고인들은 모두 항소했으나 항소심이 시작되기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해 인민군의 서울점령에 따라 형무소에서 풀려난 피고인들 대부분이 월북 또는 납북됨으로써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좌파적 시각

일부 소장파 의원들이 북한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주장을 하는 것이 건전한 정부 비판활동인지도 의심스럽고, 정부 출범 당시 많은 좌익들이 남한에 남아 있었고, 북한의 남한 유력인사 포섭공작도 활발했는데, 이들을 견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해야 한다는 것은 적화통일되었어야 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이들에 대한 재판 중에 적화통일을 위한 북한의 남침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에는 이미 엄격한 탄압과 감시체제가 구축되어 어떠한 우익세력도 공개활동은 할 수 없고, 지하활동도 거의 불가능해, 남한에 동조하는 세력은 있을 수도 없었다. 남한만 북한에 동조하거나 북한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은 국가가 존립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우파적 시각

국회 프락치 사건 관련 소장파 의원들과 김구 - 북한 주장의 유사성.

북한과 소련측 자료

북한과 소련측 자료에는 자신들이 남한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공작을 펼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슈티코프는 해방직후 북한 소련군정의 최고 책임자로 김일성 정권의 산파였고, 북한 정권 공식 출범 후 북한주재 소련대사로 있었다.
해외사료총서 11권 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1950~53년 > 제1장 전쟁 직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및 중화인민 공화국과 소련의 군사정치 협력 > 1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대사가 소련 내각회의 의장에게 보낸 보고, 남북 조선의 정치경제 상황 개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TELEGRAM, SHTYKOV TO STALIN : The political situation in the south of Korea (러시아어 원문 및 영역) SEPTEMBER 15, 1949 : Wilson Center
노동당 및 이와 연합하고 있는 좌익 단체들은 우익 진영내의 불협화음과 미 제국주의자들의 이익을 위해 이승만을 비롯한 그 측근이 펼치고 있는 반민족주의적 정책을 역이용하고, 현 정부의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는 중앙당 및 우익정당 단체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고 있습니다. 좌익 단체들은 중앙당과 우익당의 몇몇 주요 인사들을 북조선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습니다.

노동당은 남조선의 국회의원들 중 일부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사업을 조직했습니다. 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이들 국회의원들은 의회 내에서 남조선에서 시행되는 미국 정책 및 남조선 정부 당국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요구 사항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남조선에서의 미군 철수를 내용으로 하는 62명의 의원들이 작성한 청원서, 정부 불신임 표결 제의, 모든 장관들의 사임 요구 등이 바로 위와 같은 목적에 따라 실행된 예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는 국회 다수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또한 법률안 심의시 이들은 법률안의 반민족적 성격을 폭로하고 그 내용을 수정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시백 동지는 1948년 가을부터 남조선 괴뢰<국회>공작에 힘을 넣었다. 괴뢰 <국회>안에는 각양각색의 분파들이 있었다. 이러한 분파와 그들간의 싸움을 리용하여, 우선 <국회> 안에 민족적 감정과 반미 이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다른 <국회의원>들까지 포섭하여 반미 반괴뢰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공작을 대담하게 벌려 나갔다. 그리하여 <국회 부의장>과 수십 명의 <국회의원>들을 쟁취 포섭하는데 성공한 성시백 동지는 그들로 하여금 <국회>연단에서 <외군철회요청안>과 <남북화평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서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고 남조선 인민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안겨주었다.
성시백 동지의 <국회>공작에, 적들이 얼마나 놀랐던지 남조선의 한 출판물은 이렇게 썼다. <,,, 배후에는 성시백이 움직였다. 그는 마침내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남조선 정권을 흔들어 놓기 시작하였다. 국회는 갈수록 변색되어 우리의 <국회>가 아닌 남의 <국회>로 멀어져 갔다.> (대한년감 1975).
전 북한 노동당 간부 박병엽(朴炳燁, 1922~1998) 증언록
"국회프락치 사건의 핵심인물인 노일환 등은 남로당 계통이었으나, 진양 출신의 황윤호, 함양 출신의 김옥주, 광양 출신의 강욱종 등은 분명히 성시백 계통이었다.... 체포된 사람의 숫자를 파악해 보니 남로당 계통보다 성시백 선 쪽이 더 많았다....
국회 프락치는 정식 당원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좌익 관계 동조자로 형성된 소조 형태의 조직망이었다. 남로당의 정치적 지도를 받는 정치소조였지만, 정확한 의미에서 남로당 프락치 조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미군철수와 남북협상에 관한 국회동의안에 행동통일한) 소장파 의원들 중에는 남로당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도 몇몇 섞여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61~63쪽)
국회 프락치 사건 연루 국회의원은 모두 13명인데, 그 중 12명이 6.25 때 월북했다. 신경완(申敬完)은 박병엽(朴炳燁, 1922~1998)의 가명이며, 월북한 이들이 자신들이 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제대로 대접을 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고 증언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 의원들은
"우리가 남로당 비밀당원으로서 국회에서 큰 활동을 했고, 감옥살이까지 했기 때문에 북에 오면 큰 대우를 받을 줄 알았는데..."
라고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했다. (117쪽)

참고 자료

戰慄(전율)! 莫府(막부)의 第五列(제오열) 1949-07-23 동아일보 2면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1) 行商人(행상인)으로 扮裝(분장) 新版(신판) "마타하리"의 正體(정체) 1949-07-23 동아일보 2면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2) 軍警機密書等三百餘點(군경기밀서등삼백여점) 逮捕端緖(체포단서)는"疑問(의문)의집"에서 1949.07.24동아일보 2면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3) 白晝(백주)에 往來(왕래)한 機密文書(기밀문서) 巧妙(교묘)한 方法(방법)으로 街頭連絡(가두연락) 1949.07.25 동아일보 2면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4) 暴露(폭로)된牒報團正體(첩보단정체) 苦難(고난)과忍耐(인내)의尾行繼續(미행계속) 1949.07.26 동아일보 2면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5) 連絡系統完全把握(연락계통완전파악) 搜査網三八線(수사망삼팔선)으로擴大(확대) 1949.07.27 동아일보 2면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6) 越北直前文件押收(월북직전문건압수) 1949.07.28 동아일보 2면
國際(국제)스파이事件眞相(사건진상) (完(완)) 半年(반년)의辛苦(신고)는結實(결실) 命令一下瞬息間(명령일하순식간)에打盡(타진) 1949.07.29 동아일보 2면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