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펠르랭 소사이어티

몽펠르랭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 MPS)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경제학자, 철학자, 역사학자, 사업가 등으로 구성된 국제적 단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프랭크 나이트, 칼 포퍼, 루드비히 폰 미제스, 조지 스티글러, 밀턴 프리드먼, 발터 오이켄 등이 있다. MPS는 표현의 자유, 자유시장경제정책, 열린 사회를 옹호한다. 또한 MPS는 자유기업에 대한 방법을 발견하고자 하는 탐색이 현재 정부로부터 제공되고 있는 많은 기능들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표

1947년 4월 8일 위험을 대면하고 있는 문명에 대해 걱정하는 학자들은 '목표 성명서(Statement of Aims)'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다방면에 걸쳐 지구가 직면하고 있는 인간 존엄과 자유에 대한 필수조건은 이미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은 현재의 정책 경향의 발전으로부터 끊임없음 위협을 받고 있다. 개인들고 자발적인 단체들의 위치는 임의적 권한의 확장에 의해 점진적으로 훼손되었다. 심지어 서구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소유물인 생각과 표현할 자유조차 위협받고 있는데, 이 위협은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특권을 주장하는듯 하면서 자신의 관점만 빼고 모든 이의 관점을 막고 말소할 수 있는 권력의 위치를 확립하려는 것이다.

MPS는 또한 '사유 재산 및 경쟁시장'과 관련된 '확산된 힘과 주도권' 없이 '자유가 효과적으로 보존될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하기 어렵다'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1. "현재 위기의 본질을 분석하고 탐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본질적인 도덕과 경제적 기원으로 다른 이들을 돌려놓는것.
  2. 전체주의와 자유 주의적 질서를보다 명확히 구별 할 수 있도록 국가의 기능을 재정의하는 것.
  3. 법의 지배를 재확립하고 개인과 집단이 타인의 자유와 사적 권리를 침해 할 수있는 위치에 있지 않는 방식으로 그 발전을 보장하는 방법은 약탈의 근거가 될 수 없다.
  4. 시장의 주도권과 기능에 비판적이지 않음으로써 최저 기준을 설정할 가능성.
  5. 자유에 적대적인 신념을 조성하는 역사의 오용을 퇴치하는 방법.
  6.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고 조화로운 국제 경제 관계 설립을 허가하는 국제적인 질서를 만드는 문제.

MPS는 "아무런 정교하고도 정통적인 정통성을 세우려하지 않고", "선전을 실시"또는 일부 정당과 제휴를 추구한다. 그것은 "자유로운 사회의 보전과 개선에 기여할 전망의 교환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한다.

역사

대부분은 경제학자들이고, 일부는 역사학자 또는 철학자들인 39명의 학자들이 1947년에 “국가 주도권과 지구를 휩쓸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자와 케인지안의 기획”에 맞써 싸우고, 고전적 자유주의의 상황과 가능한 운명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의해 스위스 몽페를랭에 초대되었다. 개회 연설에서 하이에크는 "이 모임의 계획을 위해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눴던 두 분이 끝내 이것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셨다"며 시카고 대학교에서 훗날 이 모임의 회장이 되는 밀턴 프리드먼을 가르친 헨리 시몬스와, 잉글랜드 은행의 고관이며 런던 왕립학회의 회장을 역임했던 존 클래펌을 언급했다.

하이에크는 참석자를 직접 고르고 연락처를 일일이 찾아 초청편지를 써서 보냈다. 전쟁 직후여서 여권이 제대로 발급되지 않은 때라 우여곡절 끝에 모였고 열흘 동안 몽펠르랭에 머물며 '어떻게 하면 자유주의를 되살리고 전파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했다. 정부의 과도한 개입으로 발생한 대공황파시즘, 나치즘, 스탈리니즘같은 전체주의가 세계를 황폐화 시켰고 공산주의같은 계획경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였다. 이런 세계적인 혼란 속에서 학자들은 자유주의를 통해 세계를 살려내려고 했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사유재산, 경제자유, 법치 등이 인류를 구제할 수 있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몽페를랭회는 1947년 4월 10일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조직한 회의에서 창립되었다. 초기에는, 액턴-토크빌 협회라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두 명의 "로마 가톨릭 귀족"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에 대해 프랭크 나이트가 이의를 제기하였고,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액턴과 토크빌의 실수가 협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여, 모임이 열렸던 스위스의 리조트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몽펠르랭소사이어티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9명이나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이에크가 1974년 노벨상을 받고 뒤이어 1976년 밀턴 프리드먼이 받았다. 이어 조지 스티글러(1982), 제임스 뷰캐넌(1986), 모리스 알레(1988), 로널드 코즈(1991), 게리 베커(1992), 버논 스미스(2002), 라스 피터 한슨(2013)이 받았다.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성공사례[1]

서독

1949년 스위스 셀리스베르크에서 열린 제 2회 몽펠르랭 총회에 참석해 회원이 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당시 서독 재무장관은 1956년 베를린 몽펠르랭 총회를 유치했고 이 자리에서 '자유세계의 경제전략'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생산통제를 철폐하고 가격을 자유화 하는 등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1963~1966년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서독 경제를 바꿔놓았고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지도자가 되었다.

영국

마가렛 대처 총리는 몽페르랭 주창자인 하이에크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대처 총리는 대학시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에 감명받은 것으로 유명한다. 그녀는 자유시장경제를 내세워 당시 영국을 병들게 한 복지병을 뜯어 고쳤다. 이후 영국 경제는 세계 5위의 경제대국으로 재탄생했다.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자유주의 경제학 철학의 추종자였다. 레이건은 규제완화오 세금 감면, 친기업 정책 등 시장 친화적 정책을 과감히 추진해 장기 호황의 발판을 마련했다. 레이거노믹스를 만든 관료 77명 가운데 22명이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회원이었다고 한다.

서울에서의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서울 총회

2017년 5월 7일부터 10일까지 나흘간 한국경제신문 주관하에 서울에서 열렸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대만, 홍콩에서 지역총회나 총회가 열린적이 있지만 한국에서 열린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서울총회의 타이틀은 '경제적 자유:번영으로 가는 길'이다.

반기업정서가 팽배하고 시장경제가 근거없이 매도당하는 시점에서 자유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모임이 개최되었다는데 뜻 깊은 서울 총회는 500여명이 참석했다.

서울 총회의 주요 메세지

  1. 경제적 자유를 지켜라
  2.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한 법들이 오히려 반 법치적이고 경제자유를 유린한다.
  3. 대기업 차별같은 차별입법을 금지하는 법치의 중요성
  4. 기업가 정신의 중요성
  5. 정부는 함부로 개입하지 말고 시장의 자생력을 믿어야 한다.

외부 링크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