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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06-06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6사장 김일성의 신원 : 김일성은 27세의 청년(金は廿七歲の靑年)

金は廿七歳の青年 地理に通して神出鬼沒

堡田事件の首魁と見られてゐる共產匪主金日成は滿洲事變直後對岸 東邊道に現れ、當時共產匪と緣[綠]林仲間に羽振りをきかせてゐた東北人民革命軍第一師司令李江光[1]の仲間に飛び込み、○○團の支援を得て、常に鮮內の攪亂、朝鮮獨立を叫び、さらに東邊道の赤化に努めてゐる不逞漢である、彼の密林に於ける動作は實に機敏で日滿兩當局とも彼の全貌を摑むことが出來ず、討伐は苦心の連續線で、今日に至るも逮捕出来ず、咸南警察部の苦心によつて昨年末始め判つ た彼のアウトラインは次の通りである

彼は平南平壌出身で、本年二十七歳の白面の美青年である。父親も日韓併合をきらつて滿洲に 渡り、馬賊の頭目となつた、綠林生活の訓練を受けてた金は十五歲の時モスコーに行き兵事訓練専門の學校に學び、廿二歳の時再び東邊道に現れ、父子二代 に亘つて反滿反日戰の第一線に起つた、新しい戰闘法と武器を 持つ金日成の人氣は鴨綠江一帶 を縄張りに遂に東北人民革命軍 第一師司令李江光に代つて共産軍の實權を握り、頑強に日滿、鮮の討伐隊の癌となつてある

討伐隊は一度も金日成一派の本隊と正面衝突をしてゐない、この事實は日滿兩軍とも地理にらとく到る處に密偵か居り確實な情報は 金日成一派にに集まる爲討伐隊の 苦心は今日まで水泡に歸してゐる

彼の命令で發砲襲擊を敢行さるのは常に鮮内の駐在所及びその他の公共團體か、若く里密林を舞臺と してゐる密輸業者に限られてゐる 彼は長白、臨江兩縣境の奥地に本據を要し、警戒員に捕つた密輸業者の話によると

そこには學校、市場、散髮屋。 浴場、兵事訓練場等があり、小 いながら 共産都市を建設してゐり、その上附近には有望な 金山砂金鑛があり、これがため 金の一派は金には困らない狀態である。

同所は地圖にも明記されてゐない 不便極まる個處であるだけ、國境警察官を始め滿軍の討伐の苦心には深い同情を持たれてゐる。 (寫眞は全滅を傳へられる普天堡の部落)

김일성은 27세의 청년, 지리(地理)에 통하여 신출귀몰(神出鬼沒)
보전사건(堡田事件)의 수괴로 지목되고 있는 공산비주(共產匪主) 김일성은 만주사변 직후 대안 동변도(對岸 東邊道)에 나타나 당시 공산비(共產匪)와 녹림(綠林) 동료들에게 이름을 날리던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 사령 이강광(李江光)[1]의 패거리에 뛰어들어 ○○단의 지원을 받아 항상 조선내 교란(攪亂), 조선독립을 외치며 나아가 동변도(東邊道)의 적화에 힘쓰고 있는 불령한(不逞漢)이다. 그의 밀림에서의 동작은 실제로 기민하여 일본과 만주 양당국 모두 그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고, 토벌은 고심의 연속선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체포하지 못했다. 함남경찰부의 고심에 따라 작년 말 처음 파악한 그의 아웃라인은 다음과 같다.

그는 평남 평양 출신으로 올해 27세의 백면(白面)의 미청년(美青年)이다. 아버지도 한일합방을 앞두고 만주로 건너가 마적의 두목이 되어 녹림생활(綠林生活) 훈련을 받던 김(金)은 15세 때 모스크바로 가서 군사훈련 전문학교에 다녔고, 스물두살 때 다시 동변도(東邊道)에 나타났다. 부자 2대에 걸쳐 반만 반일전(反滿反日戰)의 최일선에 일어난 새로운 전투법과 무기를 가진 김일성의 인기는 압록강 일대를 세력권으로 마침내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 사령 이강광(李江光)을 대신하여 공산군의 실권을 쥐고 완강히 일만(日滿), 조선(朝鮮) 토벌대의 암(癌)이 되고 있다.

토벌대는 한번도 김일성 일파의 본대와 정면충돌을 한 적이 없고, 이 사실은 일만양군(日滿兩軍) 모두 지리적으로 접근하는 곳에 밀정이 있어 확실한 정보는 김일성 일파에 모이기 때문에 토벌대의 고심은 오늘날까지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

그의 명령으로 발포 습격을 감행하는 것은 항상 조선 내의 주재소 및 기타 공공단체나 마을 밀림을 무대로 하고 있는 밀수업자에 한정되어 있다. 그는 장백(長白), 임강(臨江) 양현경(兩縣境)의 오지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경계원에게 잡힌 밀수업자의 말에 의하면

거기에는 학교, 시장, 이발소. 목욕탕, 군사훈련장 등이 있어 작지만 공산도시를 건설하고 있으며, 게다가 부근에는 유망한 금산 사금광(金山砂金鑛)이 있으며, 이로 인해 김(金)의 일파는 돈에 곤란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곳은 지도에도 명기되어 있지 않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국경경찰관을 비롯한 만군(滿軍)의 토벌 고심에는 깊은 동정을 받고 있다.

(사진은 전멸했다고 전하는 보천보 부락)

각주

  1. 1.0 1.1 1935년 2월에 일어난 동흥사건의 주역 이홍광(李紅光)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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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2022년 11월 9일 (수) 12:351,704 × 2,236 (1.35 MB)JohnDoe (토론 | 기여)1937-06-06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6사장 김일성의 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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