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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민성(民聲)』 제2권 제2호 (1946.01.20)에 실린 《凱旋한 우리 팔티산 名將 金日成將軍會見記》 / 平壤 韓一宇 (1945년 12월 작성한 기고문)

(전략)...

그러면서도 自己의 過去, 또는 體驗談은 極히 避하고, 다만 現在와 將來의 「일」에만 關心을 가지었기 때문에, 한때 「가짜 金日成」이라는 流說까지 낳았었다。
이것은 最近 平壤裁判所에서 나온 同志의 判決文에 『元柱라는 金日成은 云云』하여 確實히 「같은」 金日成將軍임이 分明하여졌다。

一九三x年 겨을 어떤날 새벽, 平北 鴨綠江 上流 東興에는 突然 對岸 滿洲로부터 反滿軍 一隊가 警察署를 襲擊하여 警察官 多數를 죽이고 武器多數를 빼앗아가지고 凱旋의 나팔을 불며 悠悠히 돌아갔다。 日本軍警은 이 反滿軍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쩔쩔 매고 있을 때에、 돌아온 人質이 다음같은 事實을 말하였다----
어떤 깊은 山中 密林地帶로 끌려갔는데、 거기에는 큰 共産村落이 있어 男女老若이 모두 즐기며 살고 있다는 것、 모두 每日같이 工夫를 하고 軍隊訓鍊을 한다는 것、 人質에게 씩錢을 주어 돌려보냈다는 것、 그밖에 軍人中에는 十八九歲의 美少女가 있어서 白馬를 타고 部下를 指揮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 等。

그리고 頭目은 中國人이 아니라 實로 朝鮮人이요、 그 나이도 二十臺의 靑年 「金日成」이라는 것이었다。 「金日成」이란 이름을 筆者가 알기는 바로 이때부터이다。

이 기사는 평양에 사는 한일우(韓一宇)가 1945년 12월 김일성을 회견한 후 남한 사람들에게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도는데 대한 해명과 함께 그를 선전할 목적의 기고로 보인다. 당시 북한 실정을 감안할 때 필자가 독자적으로 이런 일을 할 수는 없고 김일성 본인이나 소련군이 지시하고, 기고문 내용까지 검토를 거쳤을 것이다. 이런 기고문을 남한 잡지에 보낸 것은 김일성을 선전하기 위한 공작 차원으로 보인다. 소련제25군사령부 특별정치선전공작대 부책임자였던 레오니트 바신(1915~2006)은 후일 남한에 퍼진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공작을 했다고 증언했다.

  • Jasper Becker,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1.
As Kim's nom de guerre was widely associated with an older guerilla who had performed legendary feats, many suspected him of being a complete fraud, so the next step was to build up Kim's image. "We elevated him into the status of a hero to bolster his work as a leader of Korea," Vassin said. "We had to prove he was a real person, the tiger of Mt. Paektu. We had to find his relations at the village of Mangyoungdae. We also had to discredit the information put out in South Korea that he wasn't the real Kim Il Sung. We had to prove he was an active fighter who had liberated the motherland."

남한 잡지에 이런 회견문을 싣게 한 것도 그러한 공작의 일환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도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과거 경력은 전혀 이야기 하지 않고, 현재와 장래의 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낭설이 나왔다고 변명하였다. 또 항일투쟁을 한 김일성이 맞다는 근거를 댈 필요를 느껴 자신과 아무 관련도 없는 1935년 2월의 동흥사건(東興事件)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며, 동흥사건의 주역은 사건 당시부터 이홍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6사장 김일성이 맞다면 불과 8년전 자신이 주도한 사건은 제쳐두고 10년전 남이 주도한 사건을 자신이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6사장 김일성이 아니기 때문에 보천보 사건을 몰라서 동흥사건을 끌어와 자신이 주도했다며 거짓말을 한 것이다.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모르고 있는 북한 김일성은 6사장이 아니고, 본인도 모르는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김일성이 1942년에 쓴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나, 소련 시절에 쓴 각종 보고서나 이력서에도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도 당시 그 자신이 사건 자체를 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이 또한 그가 6사장이 아닌 증거가 될 수 있다.

1945-10-14 평양시 민중대회 후 고향 만경대를 찾아 조모 이보익과 만나는 김일성

필자 한일우는 자신이 동흥사건 때부터 김일성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거짓말이다.

해방 당시 국내 사람들이 대부분 보천보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는 매우 많지만, 북한 김일성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는 이것이 유일한 것같다. 그는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닌 것이다. 보천보 사건도 유사한 여타 사건처럼 곧 잊혀지고 북한 김일성 본인조차 알지도 못했지만 나중에 재발견하여 자신의 엄청난 항일전공으로 날조 조작한 것이다. 이후의 수많은 역사 날조도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군의 일방적 도움으로 집권하여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된데 대한 컴플렉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平壤裁判所에서 나온 同志의 判決文에 『元柱라는 金日成은 云云』"한 것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북한의 어느 김일성 전기에도 그가 원주(元柱)라는 이름도 썼다고 한 것은 없는 것 같고, 이런 내용의 평양법원 판결문도 알려진 것이 없다. 어차피 남한 사람들이 확인할 수도 없는 평양법원 판결문을 핑계대어 남한에서도 확산되는 그가 가짜라는 소문에 급히 대응하느라 지어낸 말로 보인다.
1945-10-14 만경대를 찾은 김일성 사진
1945-10-14 평양시 민중대회 단상에 선 김일성 사진
1945-10-14 김일성, 강 미하일 소좌 및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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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2022년 6월 5일 (일) 17:371,500 × 2,131 (1.43 MB)JohnDoe (토론 | 기여)『민성(民聲)』 제2권 제2호 (1946.01.20)에 실린 《凱旋한 우리 팔티산 名將 金日成將軍會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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