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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피터 페르디난드 드러커(1909년 11월 19일 - 2005년 11월 11일)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인 경영 컨설턴트, 교육자, 작가로 활동한 인물로서, 다수의 저작물을 통해 현대 기업의 철학적, 실용적 기초를 세우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경영학 교육의 발전을 이끌었고, 목표와 자기 통제에 의한 경영(management by objectives and self-control)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통한다.

드러커의 저서와 학술 또는 비학술적인 글들은 기업, 정부, 사회의 비영리 부문에서 사람이 어떻게 조직되는가를 탐구하였다. 그는 경영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이자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민영화탈중앙화, 일본의 경제 강국 부상, 시장의 결정적 중요성, 정보화 사회의 출현과 평생 교육의 필요성을 포함한 20세기 후반의 주요한 흐름을 예언하기도 했다. 1959년에는 "지식 노동자"라는 용어를 만들어냈고, 그후 지식 노동자의 생산성이 앞으로의 경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름이 사용된 세 개의 연구소가 있다: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의 그러커 연구소(Drucker Institute)와 the Peter F. Drucker and Masatoshi Ito Graduate School of Management, 중국의 the Peter F. Drucker Academy. 해마다 그의 고향인 비엔나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계 피터 드러커 포럼(Global Peter Drucker Forum)이 열린다.

생애

드러커는 오스트리아-헝거리의 "자유주의적 분위기의" 루터교 집안에서 자랐다. 어머니 캐롤라인 본디(Caroline Bondi)는 의학을 공부했으며, 아버지 아돌프 드러커(Adolf Drucker)는 변호사이자 고위 공무원이었다. 드러커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카스그라벤(Kaasgrabe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에는 지식인, 고위 공무원, 과학자들이 모여 새로운 사상에 대해 토론을 벌이곤 했다. 그들 중에는 슘페터(Joseph Schumpeter), 하이예크(Friedrich Hayek), 미제스(Ludwig von Mises)와 그의 이모부인 한스 켈젠이 포함되어 있었다.

1927년 되블링 김나지움(Döbling Gymnasium)을 졸업한 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비엔나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는 것이 어렵자 독일 함부르그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목화 무역 회사에서 견습생으로 일을 하다, 뒤에 Der Österreichische Volkswirt(The Austrian Economist)라는 잡지의 기자로 일했다. 그후 프랑크프루트로 옮겨서 Daily Frankfurter General-Anzeiger 신문에 취직했다. 프랑크푸르트 시절인 1931년에는 Goethe University Frankfurt에서 국제법과 공법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3에, 드러커는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갔다. 그는 런던에서 보험 회사에서 일하다가 민간 은행의 경제 분석관(the chief economist)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편 프랑크프루트 대학에서 알고 지내던 도리스 슈미츠(Doris Schmitz)와 다시 연락이 닿아 1934년에 그녀와 결혼하였다. 드러커 부부는 미국으로 영구 이민을 하였으며, 이곳에서 드러커는 프리랜서 작가, 기업 컨설턴트, 대학 교수 등으로 일하였다.

1943년, 드러커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그 뒤 그는 교수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는데, 1942~1949년에는 베닝튼 컬리지(Bennington College)에서 정치학철학을 가르쳤고, 1950~1976년의 22년 동안은 뉴욕 대학에서 경영학을 가르쳤다.

1971년에는 캘리포니아의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당시에는 Claremont Graduate School)으로 가서, 미국 최초로 재직 중인 전문가들을 위한 경영자 MBA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97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클레어몬트에서 사회 과학 및 경영학 교수로서 재직했다. 1987년,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 경영 대학원은 the Peter F. Drucker Graduate School of Management으로 이름을 바꿨다(그후 다시 the Peter F. Drucker and Masatoshi Ito Graduate School of Management로 변경됨). 1999년에는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 the Drucker Archives를 설립하였다. 이 아카이브는 2006년에 드러커 연구소(the Drucker Institute)가 되었다. 그는 92세였던 2002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그 뒤에도 기업과 비영리 단체의 컨설턴트로 계속해서 활동하였다.

드러커는 2005년 11월 11일 캘로포이나주 클레어몬트에서 고령(95세)으로 사망하였다.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기술 분야의 창업가인 Nova Spivack은 드러커의 손자이다. 드러커의 부인 도리스 여사는 2014년 10월 10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의 배움

드러커는 1909년 11월 19일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태어났다. 드러커의 아버지 아돌프 드러커(1876-1967)는 외국무역성 차관이었고, 어머니 캐롤라인(1885-1954)은 오스트리아인 최초의 여성 의사였다. 할머니는 로베르트 슈만의 미망인이었던 클라라 슈만의 피아노 제자 중 한 명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늘 공평한 관심과 예의를 갖추었던 분이었다. 드러커는 할머니로부터, 사람은 그의 신분이나 직업이 아닌 개인 자체로서 예의를 갖춰 대해야 할 존재임을 배웠다. 그리고 아버지는 드러커를 비엔나의 지식인 모임인 살롱에 데리고 다니는 등 어려서부터 지식인들의 지적인 분위기에 접할 수 있도록 영향을 주었다. 드러커가 자신의 전기적 이야기인 ‘방관자의 모험’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칠만한 중요한 사건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자매였던 두 사람의 훌륭한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들 두 교사는 드러커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감화를 주었다. 드러커는 한 선생님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성취기준을 부여함으로써 잠재적인 능력을 현실의 성과로 이끌어내는 것의 중요성과 이에 요구되는 끊임없는 연습과 훈련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 한 사람의 교사는 드러커로 하여금 사람이란 감수성과 개성의 발현, 상상력과 개념적 사고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해 주었다.

드러커는 어린 시절부터 천성적으로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관찰자로서의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정부 정책이나 대중에 의해 인위적으로 부여된 상황의 압력 속에서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는 능력이었다. 예를 들면 드러커는 여덟 살 무렵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모였던 아이들에게, 가격을 엄격하게 통제하던 전체주의 통치 하에서 자신의 호텔 고객을 위해 협정 가격 이상의 고급 식사를 제공했다가 문책을 았던 어느 호텔업자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다가 옆방의 어른들이 듣게 되어 걱정을 끼쳤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

또 한 번은 열네 살이 되기 직전의 연말에 사회주의청년단의 선두에 서서 붉은 깃발을 들고 행진했던 일의 기억을 적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자가 지배하게 된 빈에서 공화제를 선언한 날을 기념하는 행사였는데 드러커는 마침 전 날 내린 비로 생긴 물웅덩이를 철버덕거리고 건너야만 했다. 그는 군중의 행진이 전해오는 압력 속에서 대책 없이 그 물웅덩이에 빠져야 했던 순간,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깃발을 옆의 누군가에게 억지로 떠맡기고 대열을 빠져나왔다.

드러커는 가족이 알고 지내던 다양한 지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들 가운데는 비엔나의 내로라하는 전문가와 지식인이 많았다. 드러커는 아버지를 따라 일찍부터 비엔나의 지식인 모임인 살롱 문화에 접할 수 있었는데, 이 모임은 음악가, 의사, 법률가, 정치가, 예술가, 경제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토론하는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이 보편적이고도 비공식적인 교육 덕분에, 후기 드러커에서 발화했던, 성과를 중시하고 통찰력으로 가득 찬 실용주의의 씨가 알게 모르게 뿌려질 수 있었다. 드러커는 경영을 논하되 경영을 독립된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인문교양학이 경영과정의 바탕이자 뼈대라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 고전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관심의 폭은 넓어졌고 후일 그의 경영학 연구의 초석이 된 전일적 사고(holistic thinking)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청년기 독일에서의 배움

학교생활에 싫증을 내고 있던 드러커는 김나지움을 졸업하자 사회에 나가고 싶어 함부르크의 어느 상점에 견습사원으로 취직했다. 독일에서 당시에는 어린 나이에도 직업을 갖는 것이 권장되고 용인되는 분위기였으므로, 드러커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 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다. 드러커는 함부르크 대학 법학부에 적을 두었지만 당시의 융통성 많은 학제에 따라 전공과목 외의 다양한 분야를 수강할 수 있었다. 드러커에 의하면, 이 당시 1년 3개월 동안만큼 공부를 열심히 한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견습사원으로서의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흥미 있는 과목의 수강과 함께, 도서관에서 독학으로 고전에 깊이 천착했던 시기였다. 드러커는 2 년 후 함부르크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생활 근거를 옮겼으며 대학도 프랑크푸르트 대학 법학부로 적을 옮겼다.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역시 증권회사 애널리스트를 거쳐, 신문 기자 등 직업과 함께 공부를 병행했는데, 당시 직장 상사로부터 피드백 분석을 통해 자신의 성과를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등 실무를 통해 자신의 강점을 축적한 시기였다. 대학에서는 1931년에 국제법과 공법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주임교수를 대신해서 강의도 하면서 그 곳에서의 성공적인 정착을 모색한 시기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체주의가 도래하자 그의 생각은 전면적으로 바뀌었다[1].

방관자의 모험’에서 드러커는 1932년 봄에 전체주의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겪었던 몇 가지 일을 적고 있다. 그 시절 드러커는 프랑크푸르트의 유력 석간지 ‘프랑크푸르트 게네랄 안차이거’ 경제부 기자로 있었다. 당시는 1차 대전 후 세간에서는 우익이다 좌익이다 하며 격하게 싸우고 있었고, 선거에서 의석을 잃은 나치가 보수 세력의 지원으로 소수 여당으로서 정권을 잡을 무렵이었다. 그의 눈에는 절망한 대중이 히틀러의 절대정권의 품에 몰려가는 모습, 전체주의에 길들여지는 지성인들의 무기력함, 계급투쟁에 미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드러커가 독일에서의 마지막 며칠을 보내면서 생생하게 보았던 체험은 6년 후인 1939년 ‘경제인의 종말’에 왜 사람들은 전체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는가라는 주제로 심층적으로 분석된다. 당시 드러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사건들이 ‘방관자의 모험’에 묘사되어 있다. 그 중에서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 회의에서 겪었던 일은 전체주의에 길들여지고 있는 지성인의 무기력함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스스로 능력이 부족해서 사회적 지위에서 밀려 있던 사람들이 권력과 돈을 위해 나치에 가담하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전체주의 사회가 몰고 올 무섭고 피비린내 나는, 그러면서 천박하고 잔인한 세상을 예견하며 급히 독일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 사건에서 그는 후일 첫 번째 주저서가 될 ‘경제인의 종말’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슈타알에 대한 연구

드러커는 독일을 떠나기 일 년 전인 1932년 봄에 독일의 유일한 보수 정치철학자인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슈타알(Friedrich Julius Stahl)에 관한 책을 써서 출판사에 보냈다. 드러커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입헌주의에 입각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함으로써, 망설이다가 나치독일에 남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입헌을 주장한다면 아무리 외국인 여권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나치가 권력을 잡은 독일에서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책은 1933년에 출판되었는데, 제목은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슈타알 - 보수주의와 그 역사적 전개”였다. 슈타알은 비스마르크 이전 시대의 저명한 보수파 의회법학자, 법에 따른 자유를 주장한 철학자로서 헤겔학파에 대해 철학적으로 반발했던 사람이다. 슈타알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드러커의 정치사상이 상당히 강화되었고, 정치사상가로서 드러커의 모습은 ‘보수적 혁신가’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슈타알은 당시의 정치경제적 제반 문제를 추상적 절대성 같은 개념으로 다루는 데 거의 독단에 가까울 정도로 반대했다. 인간이 희망하는 상상의 세계와 현존하는 실제의 세계는 다른 것이라고 하면서, 슈타알은 "당위적으로 발생해야 할 사건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후일 드러커가 기업에 대해 연구하면서 형성된 정치철학 및 기업철학을 구성하는 주요 원리는 다음과 같이 보수주의적 색채를 띤다[2].

- 변화와 연속의 과정에서 불연속성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

- 인간이 만든 절대개념을 통해 사회를 구원한다는 것에 대한 회의

- 역사적 결정론에 대한 거부

-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선결요건으로서 정신적 가치에 대한 수용

- 권력은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


드러커가 독일을 떠난 후 그의 슈타알에 대한 연구서는 정부의 명령으로 모두 불태워졌다. 그러나 후일 밝혀진 바로는 제2차 세계대전독일의 부흥을 담당한 젊은 관료들 중에 이전에 이 책을 몰래 읽고 나치에의 가담을 중지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칼 폴라니와의 교류

문화인류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와의 인연은 드러커가 함부르크의 무역회사 견습사원을 하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1927년 겨울 크리스마스 휴가를 얻어 빈에 돌아왔을 때 드러커는 폴라니가 부편집장으로 있던 ‘오스트리아 이코노미스트’ 잡지의 편집회의에 초대 받아 폴라니를 만날 수 있었다. 폴라니 가족은 월급 전액을 당시 넘쳐나던 전쟁 피난민들의 생계를 위해 쓰고 자신들의 생활비는 별도로 벌어서 쓰는 생활을 할 정도로 이미 남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드러커와 폴라니와의 교류는 그 후 드러커의 런던 거주 시절을 거쳐 미국에서까지 오랜 동안 이어졌다. 드러커는 1941년 버몬트의 베닝턴 대학에서 정치학경제학 분야의 학자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칼 폴라니를 전임교수가 되도록 소개했고, 그 자신도 1942년 여름 정부 육군성의 일을 마치고 베닝턴 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던 것이다. 버몬트에서 지내던 1940년 무렵은 드러커가 ‘산업인의 미래’의 초고를 쓰면서 칼 폴라니와 자주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지냈던 시절이었다. 드러커가 2년 후 ‘산업인의 미래’에서 법인 조직이 경제적 조직인 것만큼 사회적 조직이고 공동체 사회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 시절 폴라니는 경제와 사회의 이론적 통합 모델로서, 경제와 공동체를 조화시키면서 경제적 성장과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대안이 있다는 것을 구상한 ‘위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1944)’을 썼다. 그는 자본주의든 마르크스주의를 뛰어 넘어 19세기적 가치의 대안으로서 공동체와 그 안의 인간관계는 분열을 조장하는 시장의 힘으로부터 보호되는 독특한 방식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가 경제사문화인류학을 통해 미래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시도할수록 그는 점점 더 수수께끼 같은 고대와 선사시대, 원시경제 속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드러커는 폴라니와의 교류를 통하여 절대적인 하나의 완전한 좋은 사회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산업인의 미래’를 통해서 ‘완전한 사회 대신 적당히 견딜만한, 그러나 자유로운 사회’를 받아들이자는 보수주의적 관점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런 사회란 폴라니의 이상주의적인 사회와는 달리 시장의 혼란과 불화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개인의 자유를 지키게 되는, 갈등과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과 불일치라는 대가를 치를 것이고, 커다란 선(善)에는 관심을 덜 갖는 대신 적은 악(惡)에는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사회로 묘사할 수 있다[3].

초기에 영향을 준 사람들

초기에 드러커에게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있다. 그는 드러커에게 혁신과 창업가 정신의 중요성을 심어주었다. 드러커는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로부터는 이와 아주 다른 종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34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케인즈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드러커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그 방에 있던 케인즈를 비롯한 모든 경제학자들이 상품의 움직임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달리 사람의 행동에 관심이 있었다."

그후 70년 동안, 드러커의 글은 숫자 계산이 아니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의 책은 어떻게 기업들이 사람들로부터 최선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어떻게 거대한 조직들로 구성된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공동체 의식과 존엄성을 느낄 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자신도 종종 'guru'(전문가)라고 불렸지만, 그는 컨설턴트로서 그 말을 싫어했다. 그래서 한번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guru'라는 말은 'charlatan(허풍선이, 뻥쟁이)'이라는 말이 기사 제목에 들어가기에 너무 길어서 그 말 대신에 쓰는 말일 뿐이에요."

젊었을 때, 그는 두 개의 글을 썼다 — 하나는 독일 철학자인 Friedrich Julius Stahl에 관한 글이고, 또 하나는 The Jewish Question in Germany라는 글인데, 둘 다 나치에 의해 금지되어 소각되었다.

초기 저술을 통해 본 드러커의 정치‧경제적 문제의식

드러커의 초기 저작을 살펴보면, 그는 당대 산업사회의 의미와 산업사회가 주는 기회와 도전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 탐구에 몰입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연구과정에서 드러커는 일찍이 대기업 법인이야말로 현대사회의 가장 유일하고도 강력한 제도이며, 그 안의 전문경영인 군단이야말로 사회의 중요한 리더십 지위를 떠맡고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체제의 작동원리는 드러커에 의하면, 자칫 전체주의적 공격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 위험을 간직하고 있었다.

드러커의 ‘경제인의 종말’에서 전체주의가 대두한 원인, 그리고 전체주의가 주는 공포, 허상에 대해 분석했다. 그는 이 시기에 전체주의적 독재자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기능하는 사회(functioning society)’를 만드는 방안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 주제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연구목적이 되었다. 이런 배경에 따라 '경제인의 종말'의 경제, 경영학적 속편인‘산업인의 미래’에서는 새로운 산업사회의 중추적 기관이 된 대기업 법인이 어떤 역할과 정당성을 가져야만 사회가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분석했다.

그의 초기 두 저술, ‘경제인의 종말’과 ‘산업인의 미래’는 단순히 한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여 발표된 저술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 두 책은 드러커 경영정신을 구성하는 수많은 통찰과 사상을 배태한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이후의 저작을 관통하는 주요 주제들에 대한 개념적 틀을 제시한다[4].

경제인의 종말

1939년 출판된 ‘경제인의 종말(The End of Economic Man)’은 서구 선진국이 경험한 1차 대전 이후의 경제상황, 그 배경 하에 태동한 전체주의의 등장 과정,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 메커니즘에서 자주 공격 받는 문제에 대한 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구 문명사에서 1930년대는 희망과 절망이 교차했던 격동의 시기였다. 이 시기, 마르크스주의, 나치즘, 심지어 파시즘까지 그 어떤 형태로든지 전체주의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등장했으며, 당시까지 유럽을 지배했던 가치, 즉 이성, 개인주의, 의회주의 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보였다(Flaherty 1999, 21). 드러커의 분석에 따르면, 오랜 역사의 서구사회가 갑자기 전체주의 속으로 빠져 든 이유는 대중의 절망감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은 대공황으로 인한 20%를 상회하는 실업률, 경제성장이 영원히 정지할 것 같은 불안한 전망 속에 노동자들은 절망하고 소외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완강히 저항만을 할 뿐이었고, 결국 자유 민주주의 세계의 대부분에서 절망과 낙심의 상태가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5](24-58).

드러커는 전체주의 대두의 원인으로서 ‘경제인’ 개념의 실패를 들고 있다. ‘경제인(economic man)’의 개념은 사실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에 나오는 "네가 오늘 저녁식사를 하는 것은 푸줏간, 술도가, 빵집 주인의 자비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에 의한 것이다."는 부분을 곡해한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본래 뜻은, 시장 질서가 곧 경제지상주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질서의 원리란 (정의의 행동규칙을 지킨다면,) 각 개인이 자신의 업을 열심히 영위하며 이익을 추구해도 시장 질서에 의해 국가의 부가 창출되고 개인이 잘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드러커가 보기에, 사람들은 아직 시장 질서의 원리, 자본주의의 원리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했고, 자본주의의 경제인 개념이 사회적 저항감을 유발한 원인이었다.

산업혁명 이래 자본주의 발전 과정 중 한동안 사람들은 이 중상주의적 이념에 매여 있었다. 마침 1776년에 제임스 와트가 실용적인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산업혁명이 점화된 같은 해에,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국부론을 써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윤을 추구하면 사회는 성장하고 사람들은 행복하게 된다고 했다. 드러커는, 아담 스미스의 경제인 개념은 교과서적인 추상임에도 이를 단순히 경제지상주의로 해석한 믿음이 오늘날(1930년대)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개탄했다(Drucker 1939, 45-46).

드러커에 의하면, 경제인 개념에 입각한 경제지상주의는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형태를 띠고 150년 이상 발전했다. 그러나 1930년대 세계 공황의 여파로 유럽의 노동자에게 있어서 자본주의에 의한 자유와 평등의 약속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 듯이 보였다. 경제적 발전은 평등 대신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특권 계급을 창출했다. 경제적 자유를 통해 평등을 실현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물질적 번영을 갖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는 산산이 깨어져버렸다(Drucker 1939, 40). (이렇게 자본주의는 경기의 심각한 하강기에 공격에 취약해지는 문제가 있다.)

경제인 개념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마르크스 사회주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유롭고도 평등한 사회는 사적 이익의 철폐를 통해서만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적 이익의 철폐는 생산단위를 소유하던 부르주아를 몰아내고, 지속적으로 생산단위를 통합하여 이를 프롤레타리아 커뮤니티가 함께 소유하고 운영하는 체제를 통하여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현될 수 없었고, 실상은 더 많은 중간 특권계급을 양산했고 급격한 관료화로 인해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 본 바 없는 적대적인 계층들로 이루어진 복잡하고 경직된 사회, 국가적 생산성이 떨어지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Drucker 1939, 25-35).

요약하자면, 1930년대 자본주의적 현실에 존재하는 계급사회는 자본주의적 이념, 즉 자유와 평등과 양립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극심한 부익부 빈익빈으로 비쳐질 수 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설명하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경제적 성과를 창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더욱 경직된 계급사회를 유발했다. 따라서 자본주의든 마르크스주의든 경제인 개념에 기반을 둔 이념 및 질서는 모두 실패한 결과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경제적 자유가 ‘자본주의의 경제적 조화에 의해’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자동성(automatism)에 의해’ 자유와 평등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가 근거로 삼고 있던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개념, 즉 ‘경제인의 개념’이 무너지고 말았다. 경제인 개념 실패의 가장 심각한 영향은 모든 사회가 그 성립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근본적 개념이 흔들리면서 개인이 사회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존재의 이유를 박탈당하게 된 것이었다(Drucker 1939, 55).

오랫동안 사람들의 신념으로 자리 잡아 온 ‘경제인의 개념’이 붕괴되고, 설상가상으로 제1차 세계대전대공황이 발생하자, 사람들의 눈에 사회는 비합리적인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처럼 보였다. 사회적 가치의 혼돈, 전쟁과 대공황이라는 격동 속에서 당시의 사람들은 일순간에 악마를 진정시킬 공식, 비법, 단순한 해법을 찾아 헤매었다. 이 사회적 진공상태를 채우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였고, 파시즘은 일단 맹위를 떨친다(Drucker 1939, 70-71). 

드러커는 ‘경제인의 종말’에서 다룬 두 번째의 주제로서 유럽 전체주의의 발흥을 논하면서 포퓰리즘적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드러커는, 전체주의는 정당한 신 사회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유럽의 자본주의가 (잠시 전쟁 등으로) 실패한 와중에 생긴 공백을 메우려는 미약한 시도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전체주의 혁명은 새로운 질서의 출발이 아니라, 낡은 질서의 완전한 전복이 낳은 결과이며,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인간개념(예를 들면, 품위 있는 시장질서 속의 시민들)이 등장하면 사라지고야 말 신기루에 불과하다. 파시즘은 이미 붕괴된 경제인의 개념을 철저히 반대할 수 있을 뿐이다. 파시즘은 경제인의 개념을 대체할 어떤 새로운 개념도 창조해낼 능력이 없다(Drucker 1939, 236).”

히틀러의 전체주의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적 실체는 폐기되면서 그 형식적 외형은 유지되고 있는 현상은 파시즘 전체주의의 가장 중요하고도 전례가 없는 특징이다. 구호와 형식을 갖춘 단순한 겉모습은 마치 빈 조개껍데기처럼 유지하되, 모든 실질적 구조는 폐기되었다. 대중에게 있어 경제 체제의 실체가 수용될 수 없는 것일수록 그 외형적인 형태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컸던 것이다(Drucker 1939, 129-189). 이에 따라 공장이 폐쇄되지는 않았지만 그 운영의 책임은 경영자가 아니라 당에서 파견된 인민위원이 맡게 되었다.

이와 같이 생산 활동과 같은 외적인 형태는 산업 사회이지만 이익 동기를 부정하고 소유권과 경영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즉 경제인 개념을 부정하는 사회인 ‘탈 경제 산업사회(noneconomic industrial society)’는 파시즘이 추구하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하나의 사회적 허상이다. 그것은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초기 파시즘의 혁명적 성격을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드러커는, 서양사에 있어서 파시즘 전체주의 혁명은 역사상의 다른 혁명과 차별화 되는 두 가지 조짐에 대하여 특별한 분석을 요한다고 경고했다. 첫째, 전체주의는 분명한 신조는 없고 오직 과거의 생각과 이념을 철저히 부정하는 데에만 열중하며, 권력의 정당성과 권위 – 이전의 정치사회 시스템이 기반을 두고 있는 일체의 역사를 모두 부정한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파시즘의 독단적인 강령이 제기하는 약속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파시즘에 합류했다. 즉 강령 또는 새로운 경제 질서 이전에 행동이 앞서는 모습에 동조한 것이다(Drucker 1939, 11-12).

'경제인의 종말'은 거의 한 세기 이전의 유럽 상황을 분석한 책이지만, 시장 자본주의, 즉 자유주의 질서가 어떤 상황에서 전체주의적 망령에 사로잡힐 수 있느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재의 시점에도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드러커가 암시하는 것은 시장경제, 자유주의가 경제적 성과로서 비교할 수 없는 우월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좀 더 견고한 정신적 가치를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한다면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는 언제든지 전체주의의 도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인의 미래

드러커는 1942년에 ‘산업인의 미래(The Future of Industrial Man)’를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드러커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기업 경영에 접목하기 시작했다. 이 책의 주된 주제는 사회적 현상이 된 대기업 조직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기업권력이 정당성을 갖는 조건들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었다. 이 저서는 ‘경제인의 종말’에서 다룬 서구 문명의 정신적 우울증의 속편으로서 현대 산업사회의 실패 가능성을 다루고 있다. 산업혁명 이래 2세기 동안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물질적 진보가 거듭되었지만 사회적·정치적 영역에서는 그와 유사한 진보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즉 여전히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를 창조하지 못했다는 점이 드러커에게는 골칫거리였다. 이런 실패야말로 현대의 선진국들이 직면한 위기의 주요 원인이었다(Flaherty 1999, 31). 드러커는 ‘산업인의 미래’에서 ‘법인 사회(corporate society)’란 표현을 썼는데, 이는 현대 자유경제 사회에서 대기업 법인이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기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드러커는 대기업이 과거의 어떤 사회적ㆍ정치적 조직과도 구별되는 전례 없는 제도적 현상이라고 보았다. 즉 국가권력과 개인 사이에 ‘자치적 기업(autonomous enterprise)’으로서의 사회 제도가 생긴 것이다. 이제 기업은 중앙정부의 지배로부터 벗어 나 자율적인 실체로서 산업사회의 핵심 구성요소로 부상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이 자동으로 기능하는 것은 아니며, 기업은 그 규모와 복잡성 때문에 스스로를 이끌고 조정할 수 있는 별도의 리더십 요원이 있어야만 하는데, 사실, 소유권은 없지만 권력을 지닌 전문경영인은 산업사회의 결정적이고도 대표적인 권력이 되어버렸다. 요컨대 산업사회는 자치적인 기업, 그리고 그 지배주체인 전문경영인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를 말한다[6](Drucker 1942, 60). 사회적인 중추기관이 된 20세기의 대기업들이 축적한 막대한 권력은 드러커로 하여금 기업의 정당성을 분석하도록 한 출발점이었다. 드러커는 “정당성이 결여된 사회적 권력은 절대로 지속될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해서, 기업의 권력은 정당한가?, 아니면 과연 사회적 합의를 거쳐 인정된 권위인가?, 거기에는 문화적 신념과 가치가 빠져 있지는 않은가?, 그 권력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권리가 무력(武力)에 앞선다는 윤리적 원칙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등의 기본적인 질문을 검토했다. 즉, 새로운 실체로 부상한 기업 법인이 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는가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드러커는 만약 막강해진 기업의 정당성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면, 결국 국가가 유일한 통제 주체가 되는 전체주의가 도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권력의 정당성 개념을 좀 더 정교하게 정의하기 위해, 드러커는 ‘산업인의 미래’에서 ‘기능하는 사회’의 요건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그에 의하면 ‘기능하는 사회’란 다음 두 가지 명제를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사회의 결정적 권력은 합법적이고 정당한 권력이라야 한다. 둘째, 사회는 개인에게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Drucker 1942, 28). 사회의 결정적 권력이란 단지 구성원의 수적 비율을 의미하기보다는 그 사회의 역사적 배경에 의해 형성된 지배적 집단을 말한다. 첫 번째 정당성 요건은 지배적 계층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권력이라야 함을 요구한다. 둘째 요건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사회 속에서 할 ‘일’을 부여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개인은 일의 속성 상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경제인의 종말’에서 드러커는 “권력의 정당성이야말로 핵심 문제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자유와 평등은 기독교의 전파 이래 서구의 기본적인 영적 사고체계를 형성해 왔는데, 바로 이 개념에 의해 사회와 정치적 실체의 정당성이 전개된다(Drucker 1939, 15). 드러커는 현대 기업들은 조직의 본질적이고도 인간적인 영역에서의 결함을 다루는 데 실패했으며, 그 결과 기업은 스스로에 대한 성격규정이 견고하지 못했고, 자유와 통합의 사회체제를 모색해 온 인류의 노력은 제대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산업인의 미래’에서 드러커는 1)기업 권력의 정당성, 2)근로자에 대한 지위 및 역할의 제공이라는 두 가지 영역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기업 권력의 정당성

현실적으로 경영자는 다음 세 가지 영역에서 권력을 행사한다. 기업은 재화와 일자리와 부를 창출하는 경제적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경제적 권력, 직원의 생계를 조정하고 고용의 규율을 정립한다는 면에서 정치적 권력, 근로자에 대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권력을 갖는다.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차원에서 구사해야 할 권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한 조직이 이런 세 가지 영역의 권력을 어떤 식으로 적절히 조화롭게 구사할 수 있을 것인가는 드러커에게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는 상대적으로 신생 조직인 대기업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 아직 문화적 공백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드러커의 고민은 기업이 연속적 실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일차적 책임이 경제적 성과에 있지만 단지 일차적 목적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직원의 복지, 삶의 질 같은 비경제적 활동의 문제에서 개인의 권리 영역이나 국가 등 여타 기구의 권위를 침범해야만 하는 점에서 드러커는 어려움을 느꼈다. 결국 이 문제는 해답을 찾는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절충안을 찾는 문제로 보아야 한다. 요약하자면, 기업 권력의 정당성 문제에 대해서 드러커가 고민했던 주제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Flaherty 1999, 38).

- 기업권력이 경제적 역할을 넘어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개입한다면 그 권위(정당성)는 어디에서 오는가?

- 기업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존재라고 비난 받아야 하는가?

- 반대로 기업이 자신의 활동영역을 더욱 확장해서 비경제적 영역에까지 지나치게 활개를 친다면 새로운 형태의 봉건주의가 대두할 위험이 있지 않은가?


기업 권력의 정당성 문제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드러커는 버남(J. Burnahm)의 ‘경영혁명(managerial revolution, 1941)’을 검토했다. 버남의 경영혁명은 기술 및 산업의 구조가 고도화 되고 기업에 대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현상이 커지면서 전세계 선진국 사이에서 기업이 필연적으로 전문경영인이라는 신종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를 말한다. 또한 드러커는 ‘주주 민주주의’ 주장에 대해서도 검토했다. 주주 민주주의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현상에 따라 주식소유자가 대리인인 전문경영인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그러나 드러커는 실제로 주주들이 소극적인 투자자로 행동하는 존재임을 들어 주주 민주주의라는 것도 일종의 허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경영의 문제에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이 보유한 주식의 주인으로서 주가와 배당에 더 관심이 있다. 이사회의 선임 역시 민주적이지 못하다. 주주들은 기업의 운영을 책임질 이사진의 선임에도 별 관심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경영자가 대리인으로서 행하는 통제권은 기업의 정당성을 주장할 실질적인 근거라기보다는, 마치 고대 사회에서 제례를 집전하는 집전관이 권력을 갖는 것과 같이 형식적인 것이었다(Drucker 1942, 60-79). 그런데 기업의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인 경영자의 위치를 보면, 기업의 정당성 문제가 매우 까다롭고 다루기 힘든 문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대기업의 리더로 등장한 전문경영자의 권력행사는 강제적으로 탈취한 것이 아니라, 주주의 냉담과 무관심 때문에 생긴 진공상태를 채우는 자연스러운 귀결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드러커는 재산권과 분리된 경영자의 권력은 오직 끊임없는 관료주의만이 배태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경영자의 관료화 가능성은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의 배경이 되었지만, 드러커의 문제의식은 권력의 정당성과 지배원리를 다루는 것으로서 대리인 이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임.)

드러커는 관료주의가 존속하면 어떤 제도에 대해서든 변화의 권리를 요구하는 민주적 절차가 훼손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드러커에 의하면, 성실한 전문경영인을 앉히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고 정당성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으며, 경영자의 성실성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라고 해 보았자 ‘계몽적 독재’ 정도에 불과할 것이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선행으로 보이는 것들이 권력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독재로 다가온다(Flaherty 1999, 37).(해설: 대기업의 자율권을 억제하려는 어떤 기도든 모두 기업을 관료주의에 빠지게 하여 결국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되게 할 것이다. 한편, 소유권이 없는 전문경영인이 관료주의에 물들지 않고 오너와 같은 책임감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 사회 문화는 무엇일까? 드러커가 고민한 바, 서구사회조차도 오너십 없는 전문경영인은 위태로운 것이었다.)

업적과 철학

기업 사상가

기업 사상가로서의 드러커의 경력은 1942년에 시작되었다. 그는 초창기에 정치와 사회에 관한 글을 쓰면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 중 하나였던 GM(General Motors)의 내부 운영 과정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유럽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권위라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차였다. GM의 행정 분야 실세였던 도널슨 브라운(Donaldson Brown)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자, 브라운은 그를 초청해서 기업에 대한 소위 "정치적 감사"라고 할만한 일을 하게 하였다. 이는 2년에 걸쳐 기업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었다. 드러커는 모든 이사회 모임에 참석하는가 하면, 직원들과 인터뷰도 하면서, 생산과 의사 결정 과정을 분석하였다.

이렇게 해서 "기업의 개념"(Concept of the Corporation)이라는 책을 출판되자, GM의 다중사업부 구조(multidivisional structure)이 대중화되는 한편, 이에 관한 다양한 논문과 컨설팅, 그리고 서적 출판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GM은 그 결과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이미 GM에게 고객 관리, 딜러 관리, 직원 관리 등에 관한 정책을 재점검할 것을 제안해 둔 상태였다. 기업 내부에서는 드러커의 조언이 너무 과도하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드러커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존경받는 경영자였던 GM의 Alfred Sloan 회장은 그 책의 내용에 너무 기분이 좋지 않아서 본인이 이 책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가 있는 곳에서 다른 사람이 이 책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드러커는 경영학은 "교양 과목(a liberal art)"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역사, 사회학, 심리학,철학, 문화, 종교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융합적으로 자신의 경영학적 조언을 제시하였다. 또, 그는 민간 부문까지 포함하여 모든 기관이 전체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드러커는 1973년의 "Management: Tasks, Responsibilities, Practices"에서 "현대 사회에서는 경영자 집단 말고는 지도자 집단이 없다. 만약 주요 기관, 특히 기업의 경영자들이 공공선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면, 다른 누구도 그것을 할 수도 없고 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드러커는 손이 아니라 정신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현상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상사나 동료보다 특정 주제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거대 조직 속에서 그들과 조화를 이루어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드러커는 이 현상을 단순히 인간 발전의 전형으로서 찬미하는 대신 그것을 연구 분석하여 그것을 조직 경영에 관한 일반적인 개념을 비판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하였다.

이 접근법은 점점 성숙해지고 있던 20세기 후반의 기업계에서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그때 이미 거대 기업들은 기본적인 생산 효율과 대량 생산의 관리적 위계 구조를 완성한 상태였다. 기업의 경영자들은 회사의 경영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드러커는 조직의 정체를 막기 위해 그들의 믿음에서 헛점을 찾아내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공감을 통해 이 일을 해나갔다. 그는 독자들이 선의를 가진 지적이고, 이성적이고, 부지런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가정했다. 만약 그들의 조직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이것은 대개 낡은 생각, 문제를 바라보는 협소한 눈, 내부의 오해 때문일 거라고 믿었다.

그는 최고 경영자들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대규모 컨설팅 기업을 설립했다. 그는 전쟁에서 폐허가 된 조국을 재건하려는 전후 일본의 새로운 기업 경영자들 사이에서 전설이 되었다. 그는 GM, Sears, General Electric, W.R. Grace, IBM 등의 최고 경영자들에게 조언을 제공했다. 또, 미국 적십자, 구세군 등 비영리 기관에게도 경영 컨설팅을 제공했다. 남미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투자 촉진을 위해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이 세운 Adela Investment Company이라는 회사의 고위 경영자들도 그의 조언에 크게 의존하였다.

저작

드러커의 39권의 책은 36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것들 중 두 권은 소설이고, 한 권은 자서전이다. 일본 회화(Japanese painting)에 관한 서적의 공저자로 참여하기도 했고, 경영을 주제로 여덟 편의 교육용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또, 월스트리트저널에 10년 동안 정기 칼럼을 썼으며, Harvard Business Review, The Atlantic Monthly, The Economist에도 많은 기고를 했다.

그의 작품은 특히 일본에서 인기가 있는데, "What If the Female Manager of a High-School Baseball Team Read Drucker's Management(고등학교 아구부 여자 감독이 드러커의 경영학 책을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소설(주인공이 그의 책을 활용해서 엄청난 효과를 거두는 스토리)이 출판된 이후 그 인기는 더욱더 올라갔다. 이 책은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의 일본에서의 인기는 W. Edwards Deming의 인기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이다. 1980년대 후반, Ross M. Brown은 완전히 새로운 New Religion 이론을 최초로 제안한 피터 드러커와 Ferrel Heady의 공적을 인정한 바 있다. 이것은 기원후 1,000~14000년 사이에 있었던 폴리네시아인의 이주는 온화한 기후 조건하에서 발생한 ciguatera 중독 사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명백한 "대중" 경영 및 관리 노력에 의해 가속화되었다는 이론이다.

피터 드러커는 2001년에 The Essential Drucker라는 책도 썼다: 이 책은 그 이전 6년 동안 피터 드러커가 경영학에 대해 쓴 작품을 모아놓은 첫 번째 권이었다. 이 책에 모아놓은 정보는 1954년의 The Practice of Management부터 1999년의 Management Challenges for the 21st Century에 이르는 그 이전에 발견할 것들의 모음이었다. 피터 드러커는 '일관성 있고 매우 포괄적인 내용을 담은 경영학 입문서'로서 이 책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 그는 경영의 의심스러운 결과에 대해 깊히 파고드는 경향이 있는 정도유망한 창업가들이 자주 묻는 질문(FAQ)에 답하기도 하였다.

핵심 사상

그는 경영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상적 지도자로 여겨지며, 그의 작품에는 몇 가지 공통적인 개념이 있다.

  • 탈중앙화단순화. 그는 지휘 통제 모델(command and control model)을 평가절하하였고, 기업은 탈중앙화를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드러커는 기업이 필요 이상의 제품을 생산하고, (아웃소싱이 더 좋은 선택인 상황에서도) 필요하지도 않은 직원을 채용하며, 피해야 할 경제 부문으로 확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 1959년의 The Landmarks of Tomorrow라는 책에서 제시한 "지식 노동자"라는 개념. 그때부터 지식 기반 노동의 중요성이 전세계적으로 점점더 증가해 왔다.
  • "블루칼라" 노동자의 죽음을 예언. 미국 자동차 산업의 변화가 이것이 정확한 예언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 "아웃소싱"의 개념. 그는 기업의 앞방과 뒷방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기업은 자신의 핵심 사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활동, 즉 앞방 활동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뒷방 활동은 그 활동을 앞방 활동으로 여기는 다른 회사에게 맡겨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 비영리 부문의 중요성. 그는 이를 제3 부문이라고 불렀다; 민간 부문과 정부 부문이 각각 제1, 제2 부문이다. NGO는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의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 거시 이론에 대한 뿌리깊은 회의. 그는 모든 경제학파가 현대 경제의 중요한 측면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 미시경제학의 유일한 초점이 가격이라는 점에 대한 비판. 그는 가격이 제품의 실질적인 가치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상업적인 과정을 통해 가격으로부터 제품의 실제 기능을 계산해 보려는 시도가 나온다는 점을 지적한다..
  • 노동자에 대한 존중. 드러커는 노동자를 채무가 아니라 자산이라고 믿었다. 그는 지식으로 무장한 노동자야말로 현대 경제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이며, 혼합형(하이브리드) 경영 모델이야말로 기업에 대한 노동자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사람이 조직의 가장 소중한 자원이며, 경영자의 역할은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주고 그들에게 일할 자유를 주는 것이라는 관점이 이 철학의 핵심이다.
  • "소위 정부의 질병"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그는 정부가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해 줄 능력도 안 되고 그럴 의지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이 정부의 형태에 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The Age of Discontinuity라는 책의 "정부의 질병"(The Sickness of Government)이라는 장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 분야를 지배한 New Public Management(새로운 대중 경영)이라는 대중 경영 이론의 기초를 제시하였다.
  • "계획적인 포기(planned abandonment)"의 필요성. 기업과 정부는 과거에 성공을 거두었던 것들이 현재 상황에는 쓸모가 없다는 점을 간과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모든 실패의 원인이라는 믿음.
  • 공통체의 필요성. 초기에 드러커는 "경제인의 종말"을 예언하고, 개인의 사회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공장 공동체(plant community)"의 출현을 옹호했다. 그는 뒤에 공장 공동체가 현실화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였고, 1980년대에는 비영리 부분에서의 자원 봉사가 사람들이 소속감과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건전한 사회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 기업으로 하여금 한 가지 가치만을 따르게 하는 방법 대신 다양한 필요와 목표를 균형있게 요구하는 방법으로 기업을 경영해야 할 필요성. 목표와 자기 통제에 의한 경영이라는 이 개념이 1954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The Practice of Management의 핵심 키워드이다.
  • 회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고객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이익은 가장 중요한 목표라기 보다, 회사의 계속적인 존재와 지속성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 좋은 회사는 인류의 가장 훌륭한 발명품 중 하나일 수 있다는 믿음.
  • "가장 잘하는 것만 직접 하고 나머지는 아웃소싱하라"는 말은 1990년대에 드러커가 처음으로 "조어(coin)하고 개발한" 기업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은 기본적으로 실행가능한 회사 전략으로서의 아웃소싱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드러커는 1989년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Sell the Mailroom"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아웃소싱의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드러커는 별세 이후인 2009년에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아웃소싱 명예의 전당(Outsourcing Hall of Fame)에 들어가게 되었다
  • 소위 "비고객"(Noncustomers)의 개념. Managing in the Next Society에서 드러커는 백화점을 증거물 1호(Exhibit A)로 지명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백화점보다 그들의 고객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비고객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소매 시장에 대해 28%라는 가장 큰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72%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백화점은 이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들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비판

1987년, 월스트리트저널은 그의 몇 가지 강연에 대한 조사를 근거로, 그가 사실을 정확하게 다루지 않은 사례가 있다고 보도했다. 예를 들어, 그는 청중들에게 일본의 무역 회사인 미쓰이(Mitsui)에서는 모든 직원이 영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드러커는 "나는 역사책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사례를 제시할 뿐이다"라고 해명했다.

또한, 그는 예지력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모든 예측이 다 적중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는 국가의 금융 중심지가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예측했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드러커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목표에 의한 경영"에도 결함이 있으며, 아직까지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혀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Dale Krueger라는 비평가는 이 시스템이 실행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기업들은 결국 목표 달성을 위해 창의성을 육성하는 것과는 반대로 통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드러커는 명저인 Concept of the Corporation에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이었던 General Motors를 비판했다. GM의 중역들 중에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드러커를 기피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Alfred P. Sloan은 드러커에 대한 개인적인 적의를 드러내려 하지는 않았지만, GM 경영에 대한 드러커의 비판을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다.

한국에 대한 평가

피터 드러커는 2002년에 출판된 Management in the Next Society라는 책에서 한국의 창업가 정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문: 우리 미국이 창업가 정신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들보다 많이 앞서 있다는 것에 동의하시나요?

답: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기만이에요. 아주 위험한 기만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기업이 생기고 가장 많은 기업이 망하는 것은 사실일 수 있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2등도 아닐 것입니다.

문: 그러면 누가 1등인가요?

답: 당연히, 한국입니다.

문: 40년 전만 해도, 한국에는 산업이라 할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답: 수십 년 동안 한국을 지배했던 일본이 산업을 허용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고등 교육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현실적으로 교육받은 사람들이 없었어요. 한국 전쟁이 끝났을 때, 한국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은 20개가 넘는 산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고, 조선 등 몇 가지 분야에 있어서는 세계 1위입니다.

저서

  • 1939년: 경제인의 종말 (The End of Economic Man (New York: The John Day Company))
  • 1942년: 산업인의 미래 (The Future of Industrial Man (New York: The John Day Company))
  • 1946년: 기업의 개념 (Concept of the Corporation (New York: The John Day Company))
  • 1950년: 새로운 사회 (The New Society (New York: Harper & Brothers))
  • 1954년: 경영의 실제 (The Practice of Management (New York: Harper & Brothers))
  • 1957년: 미국의 향후 20년 (America's Next Twenty Years (New York: Harper & Brothers))
  • 1959년: 내일의 이정표 (The Landmarks of Tomorrow (New York: Harper & Brothers))
  • 1964년: 결과를 위한 경영 (Managing for Results (New York: Harper & Row))
  • 1967년: 효과적인 경영자 (The Effective Executive (New York: Harper & Row))
  • 1969년: 단절의 시대 (The Age of Discontinuity (New York: Harper & Row))
  • 1970년: 기술, 경영 그리고 사회 (Technology, Management and Society (New York: Harper & Row))
  • 1971년: '새로운 시장' 등 논문 모음 (The New Markets and Other Essays (London: William Heinemann Ltd.))
  • 1971년: 인간, 사상 그리고 정치 (Men, Ideas and Politics (New York: Harper & Row))
  • 1971년: 드러커, 경영에 관하여 (Drucker on Management (London: Management Publications Limited))
  • 1973년: 경영: 임무, 책임, 실제 (Management: Tasks, Responsibilities, Practices' (New York: Harper & Row))
  • 1976년: 보이지 않는 혁명: 연기금이 미국에 들어온 과정 (The Unseen Revolution: How Pension Fund Socialism Came to America (New York: Harper & Row))
  • 1977년: 사람과 수행 능력: 경영에 관한 피터 드러커의 최고작 (People and Performance: The Best of Peter Drucker on Management (New York: Harper's College Press)
  • 1978년: 방관자의 모험 (Adventures of a Bystander (New York: Harper & Row))
  • 1980년: 혼란기의 경영 (Managing in Turbulent Times (New York: Harper & Row))
  • 1981년: '새로운 경제를 향하여' 등 논문 모음 (Toward the Next Economics and Other Essays (New York: Harper & Row))
  • 1982년: 변화하는 경영자의 세계 (The Changing World of Executive (New York: Harper & Row))
  • 1982년: 마지막 세상 (The Last of All Possible Worlds (New York: Harper & Row))
  • 1984년: 선에의 유혹 (The Temptation to Do Good (London: William Heinemann Ltd.))
  • 1985년: 혁신과 창업가 정신 (Innovation and Entrepreneurship (New York: Harper & Row))
  • 1986년: 경영의 최전선: 내일의 결정이 형성되어가는 오늘의 현장 (The Frontiers of Management: Where Tomorrow's Decisions are Being Shaped Today (New York: Truman Talley Books/E.D. Dutton))
  • 1989년: 새로운 현실: 정부와 정치, 경제와 기업, 사회와 세계 (The New Realities: in Government and Politics, in Economics and Business, in Society and World View (New York: Harper & Row))
  • 1990년: 비영리 단체 경영하기: 실제와 원칙 (Managing the Nonprofit Organization: Practices and Principles (New York: Harper Collins))
  • 1992년: 미래를 위한 경영 (Managing for the Future (New York: Harper Collins))
  • 1993년: 생태학적 전망 (The Ecological Vision (New Brunswick, NJ and London: Transaction Publishers))
  • 1994년: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Post-Capitalist Society (New York: HarperCollins))
  • 1995년: 격변하는 시대의 경영 (Managing in a Time of Great Change (New York: Truman Talley Books/Dutton))
  • 1997년: 드러커, 아시아에 관하여: 피터 드러커와 이사오 나카우치의 대화 (Drucker on Asia: A Dialogue between Peter Drucker and Isao Nakauchi (Tokyo: Diamond Inc.))
  • 1998년: 피터 드러커, 경영에 대해서 (Peter Drucker on the Profession of Management (Boston: Harvard Business School Publishing))
  • 1999년: 21세기를 위한 경영 도전 (Management Challenges for 21st Century (New York: Harper Business))
  • 1999년: 자기 경영 (Managing Oneself (Boston: Harvard Business School Publishing) [published 2008 from article in Harvard Business Review])
  • 2001년: 드러커의 핵심 사상 (The Essential Drucker (New York: Harper Business))
  • 2002년: 다음 사회에서의 경영 (Managing in the Next Society (New York: Truman Talley Books/St. Martin's Press))
  • 2002년: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 (A Functioning Society (New Brunswick, NJ and London: Transaction Publishers))
  • 2004년: 드러커의 하루하루 (The Daily Drucker (New York: Harper Business))
  • 2008년: 유고작: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 질문 (The Five Most Important Questions (San Francisco: Jossey-Bass))

각주

  1. Atsuo Ueda, 남상진 역, 2007, 「피터드러커 다시 읽기」, 지평(上田 惇生, ドラッカー入門―万人のための帝王学を求めて, ダイヤモンド社, 2006)
  2. Flaherty John E., 1999, Peter Drucker: Shaping the Managerial Mind - How the World's foremost Management Thinker Crafted the Essentials of Business Success, Jossy-Bass Inc. Publishers
  3. Drucker, P. F., 1994, Adventure of a Bystander, New Brunswick, N.J.: Transaction Publishers(이동현 역, 2005, 피터 드러커 자서전, 한국경제신문).
  4. 문근찬, 경영사학 제25집 제1호, 2010. 3
  5. Drucker, P. F., 1939, The End of Economic Man, New York: John Day, Reprint by New York: Harper & Row(1965 by The New American Library of World Literature, Inc.).
  6. Drucker, P. F., 1942, The Future of Industrial Man, New York: John Day (New York : New American Library,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