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준
韓詩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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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1954년 2월 10일 (70세)
출생지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
직업사학과 교수, 동양학연구원 원장
정당무소속
경력한국근현대사학회장
중국 푸단 대학교 방문교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독립기념관
학력단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문학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 문학석사
인하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 문학박사

한시준(韓詩俊, 1954년 2월 10일 ~ )은 대한민국역사학자이고 대학교수이다. 경기도 여주 출생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광복군을 중심으로 한 한국근현대사(한국독립운동사)를 연구하였다.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 단국대학교 인문과학대학 학장,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동양학연구원 원장을 지냈으며, 문재인 정권에서 독립기념관장에 임명되었다.


건국 100주년 설을 학계에서 주장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한 토론에도 참가한 적이 있다.


물론 건국 100주년 설은 웃기는 소리다 건국100 주년설 문서 참조

문재인 또한 건국 100주년설을 밀었던 적이 있다.



경력


저서

  • 1993년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 199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우합작운동(공저)》, 한울아카데미
  • 1999년 《광복의 역사인물》, 연합뉴스(연합통신)
  • 200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전지 현황(공저)》, 범우사
  • 2002년 《이봉창의사와 한국독립운동(공저)》, 단국대학교출판부
  • 2005년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삶과 민족운동(공저)》, 경인문화사
  • 2006년 《황학수 - 대한제국군에서 한국 광복군까지》, 역사공간
  • 2006년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홍진》, 탐구당
  • 2007년 《이자해 자전》, 국가보훈처
  • 200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 중경시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2010년 《세계속의 한국(공저)》, 단국대학교출판부
  • 2010년 《단재 신채호의 사상과 민족운동(공저)》,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 2010년 《Breve historia de la República de Corea(간추린 한국사 - 스페인어판)》, 단국대학교출판부
  • 2012년 《역사에서 찾는 지도자의 자격(공저)》, 꿈결
  • 2012년 《한눈에 읽는 파노라마 한국사》, 노스보스
  • 2013년 《황학수(대한제국군에서 한국광복군까지)》, 역사공간
  • 2013년 《세계속의 한국 - 교류와 소통의 역사(공저)》, 단국대학교출판부
  • 2014년 《범정 장형의 독립운동과 단국대학 설립》, 단국대학교출판부
  • 2015년 《김구(민족과 국가를 위해살다 간 지도자)》, 역사공간
  • 201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역사공간
  • 2017년 《역사 농단(1948년 건국론과 건국절)》, 역사공간
  • 2019년 《일제침략에 대한 한.중의 공동항전》, 단국대학교출판부
  • 20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반만년 역사의 제1 대사건)》, 한울


홍범도 흉상관련 논란

국정감사에 출석하여 독립기념관장은 개인적인 발언이라며 한다는 말이 '홍범도 흉상, 육사에 그대로 둬야' [1]한다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알고보니 문재인때 임명된 역사학자이다. 대통령만 열심히 써우고있는데 여당이든 공공기관장이든 바뀐것이 하나도 없다.

"육사에 홍범도 장군을 비롯해 독립군과 관련한 다섯 분을 모신 것은 (이들이) 우리나라 군인의 정신이나 군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취지 아닐까 생각한다". "군의 정신을 제대로 함양하고, 지도자들에게 그런 정신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흉상은 (육사에) 두는 게 좋다".
― 2023.10.13 한시준,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


김구가 소련의 김일성과 연대를 모색했다는 주장은 역사 왜곡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25권을 집필한 한시준(韓詩俊)은 임시정부의 김구가 해방 직전 연해주 88여단김일성과 연대하기 위해 이충모(李忠模, 1896~ ?)를 파견했다가 중도에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불발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없는 주장으로 역사왜곡이다.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에서 소련 연해주로 가자면 타이위안(太原) -> 베이징(北京) -> 만주 창춘(長春, 新京)을 거치는 것이 가장 무난한 경로이다. 8.15 해방 당시 이충모가 있었던 내몽고의 바오터우(包頭)는 이 코스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더구나 바오터우는 산악 고원지대에 있는데, 연해주로 가는 길이라면 굳이 평탄한 길을 두고, 다른 방향으로 벗어나 그런 험한 산악 지대로 들어설 리가 없다.

김구는 소련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들과 연계를 위해 연락원을 파견하였다. 연락원은 이충모였다. 그는 1945년 3월 이후 중경을 떠났다. 중국측에서는 이충모가 임시정부 외무부의 서북특파원으로 파견되었으며, 그 목적은 중앙아시아 한인과 연락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주54) 그러나 이충모의 목적지는 중앙아시아가 아니라, 연해주의 한인부대였다. 이에 대해서는 임시정부 주석 판공실 비서로 김구를 모셨던 안우생(安偶生)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회고가 있다.

"백범 선생은 이러한 실정에서 몇몇 측근들과 숙고한 끝에 김일성 장군님께 사람을 파견하기로 했던 것이다. … 당시 밀사파견은 주변 분위기를 고려하여 백범·조완구·나(안우생) 이렇게 몇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백범 선생의 신임장을 휴대하고 출발한 이충모는 산서성 태원(山西省 太原)[2]까지 이르러 동북에로의 통로를 탐색하느라 지체하여 중도에서 8·15를 맞게 된 것이었다."주55)
"그는(김구) 김일성 장군님께 연락원을 띄우기로 했는데 그 책임은 이씨(이충모) 자신이 맡기로 하였다. 1945년 봄 리씨는 먼 북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때가 때였던 만큼 그 련락원은 겨우 북경에 이른 채 8·15 해방을 맞게 되었고 그후의 리씨의 소식도 알 길이 없이 되고 말았다."주56)

해방 직후 이충모의 행적으로 보면, 이러한 안우생의 회고는 사실인 것 같다. 이충모는 해방 직후 수원성(綬遠省) 포두(包頭)[3]에 나타나 활동하고 있다. 그는 1945년 8월 23일 포두재류한인의 자치기구인 포두한인회를 결성하고, 8월 25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판사처(辦事處)를 포두 시내에 설치하였다.주57)

포두에 나타난 이충모는 이곳 동포들에게 임시정부 특파원을 자임하고, 그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해방된 지 일주일만에 포두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가 포두지역 근처에서 해방을 맞았던 것임을 말해준다. 포두지역은 중경에서 향한 방향으로 보면 중앙아시아가 아닌 연해주로 가는 길이었다.

주54) 추헌수, 「한인의 최근동태」, 『자료한국독립운동』 2, 80쪽
주55) 안우생·김종항, 「민족대단합의 위대한 경륜」(정병준, 「해방 직전 임시정부의 민족통일전선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 하, 556쪽).
주56) 안우생,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관대히 포섭하시여」(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백범김구전집』 8, 927쪽).
주57) 『광복통신』 제1호, 1945년 8월 30일. 이는 포두한인회에서 발행한 것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조소앙 편 4, 2005(286~287쪽)에 영인 수록되어 있다.

해방 직전 김구와 김일성이 연대를 모색했다고 주장하는 위 글의 필자 한시준은 그 근거로 1949년 월북한 안우생(安偶生, 1907~1991)이 북한에서 1990년에 쓴 글이나[4], 김일성 회고록 따위를 들고 있다. 그러나 그런 자료들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정치선전물에 가까우며 내용도 매우 의심스러우므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근거자료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안우생은 해방을 맞아 김구와 함께 서울로 환국한 직후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지금 평양에 와 있는 32세의 청년 김일성은 어떤 사람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문(問): 김일성씨(金日成氏)와 임시정부(臨時政府)와의 관계(關係)는 어떠하며 최근(最近) 평양(平壤)에 와잇는 삼십이세(三十二歲)의 청년(靑年)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어떤 분인지?
답(答): 김일성씨(金日成氏)는 만주(滿洲)서 활동(活動)하엿슴으로 임시정부(臨時政府)와는 아무 연락(連絡)도 업섯다. 그리고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지금(至今) 상당(相當)한 고령(高齡)인데 평양(平壤)에 와 잇는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엇던 분인지 모른다.

이런 답변으로 보아 안우생은 해방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유명한 김일성은 상당한 고령으로 알고 있으며, 북한에 나타난 젊은 김일성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북한 김일성이 소련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의 88여단에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을 리가 없으며, 김구가 이충모를 특사로 보내 88여단김일성과 연대를 모색했다는 후일의 주장도 거짓일 수 밖에 없다.

1945년 7월 포두(包頭)에 온 이충모(李忠模, 1896~ ?)를 만났던 이자해(李慈海, 1894~1967)는 그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5][6][7]

1945년 7월 중경에서 이충모(李忠模)라는 손님이 찾아왔다. 자신을 한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의 개인비서라고 소개하였다. 이 사람은 자기는 김구 주석의 명령을 받고 12전구에 왔으며, 부작의(傅作義 1895~1974)[8] 장관과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총망히 중경을 떠나 왔기 때문에 김구 선생께서 미처 자해(慈海) 동지에게 편지를 쓸 시간이 없어 직접 나를 만나서 안부를 전할 것을 부탁했다고 했다.

몇 마디 말을 마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온 물건정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장관부로 달려갔다. 당일 오후 장관부에서는 간단한 연회를 베풀어 이충모 선생을 접대했다. 손님접대를 부탁한다는 장관부의 명령을 받고 내가 그 곳에 갔을 때에는 이미 20여명의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연회를 마치고 헤어져 돌아올 때 그는, “만약 소련육군이 진입하는 주요 노선을 동북 및 서북으로 하거나 신강 혹은 외몽고로 하여 중국항일군과 배합한다면 틀림없이 일거에 일본관동군을 소멸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소련군에 있는 많은 조선인들은 중국동북에서 이미 몇 년간 항일운동을 했던 풍부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앞으로 충분히 조선독립운동의 중요한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그들과 잘 왕래하여야 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나의 머릿속에서는 반신반의의 정서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감히 그의 논조에 찬성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그에게,“현재 수원, 포두 등지에서 일본에 끌려가 각 부대에서 공작하는 조선 남녀 청년이 약 2천여 명이 되며, 우리는 마땅히 이 방면에서 유력한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전에 고운기 등에게 몇 번이나 적구에 잠복하여 선전공작을 전개하자고 제의하였으나, 한사람도 이 일을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어 결국 경비만 낭비하고 되돌아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언젠가 내가 그에게 또 다른 방면으로의 공작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말로는 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 했으나, 실천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심한 허풍을 떨며 때론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 황당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또 매일 엄청난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행위들은 나로 하여금 도저히 그를 신임할 수를 없게 만들었다.

이때 미국공군이 일본의 나가사끼(長崎)와 히로시마(廣島)에 무차별적으로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주민 상당수가 사상하였다. 당시 그 정경은 아주 참혹한 지경이었다. 게다가 8월 9일 정식으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 소련군이 동북방향에서 일본관동군을 공격하자, 결국 일본은 8월 15일에 정식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 보아 이충모(李忠模)는 연해주로 가던 길이 아니라 1945년 7월 전혀 다른 목적으로 포두(包頭, 바오터우)에 왔다가 거기서 해방을 맞은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안우생 등이 주장하는 김구가 해방 직전 88여단의 김일성과 연대를 모색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한시준은 위 이자해자전(李慈海自傳)의 해제를 썼으므로 바오터우(包頭)에 나타난 이충모가 연해주로 가려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구가 이충모를 보내 88여단김일성과 연대하려했다는 무리한 주장을 했다.

1946년 4월말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함께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이충모(李忠模)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이용상(李容相, 1924~2005)은 당시 이충모가 했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9][10]

『.... 김일성은 벌써 작년에 평양에 왔다는데 도깨비가 대낮에 활개치는 격이오. 새파란 애숭이가 백발이 성성해 돌아가신 노장군의 이름을 도둑질해 달고 나서다니 말이나 됩니까. 그저 우리나라 애국자는 안중근·윤봉길 두분 뿐이고 다른 자들은 다 가짜요, 도깨비들입니다.』

이충모는 북한에 나타난 젊은 김일성이 이미 세상을 떠난 노장군의 이름을 사칭한다고 비판하고 있으니, 그가 김구의 지령으로 88여단김일성과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말도 사실일 리가 없다.

한시준이 이런 근거없는 주장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독립운동사에 집어넣은 것은 역사의 정통성이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한 이승만 진영이 아니라, 건국을 한사코 반대한 김구, 김일성 쪽에 있다는 것을 넌지시 주장하고 싶은 때문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각주

  1. 【2023 국정감사】,서울경제, 2023.10.13
  2. 산시성 타이위안시(山西省 太原市) 구글 지도
  3. 내몽골자치구 바오터우 시(包头市)
  4. 김종항, 안우생, 《민족대단합의 위대한 경륜》 『민족의 은혜로운 어버이품 6』 (평양:통일신보사,1990) p.140
  5. 해외의한국독립운동사료(ⅩⅩⅩⅡ):中國篇(7)李慈海自傳 - 31. 일본이 무조건 투항을 선포 공훈전자사료관
  6. 해외의한국독립운동사료(ⅩⅩⅩⅡ):中國篇(7)李慈海自傳 - 서론 공훈전자사료관
  7. 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 32, 中國篇 7 李慈海自傳 (國家報勳處, 2007.12.20) 31. 일본이 무조건 투항을 선포 : p.336
  8. 부작의(傅作義, 1895~1974) 나무위키
  9. 나의 친구 김영주 (48) - 「국사(國士)」 이충모(李忠模) 선생 [중앙일보] 1991.06.28 종합 20면
  10. 이용상(李容相,1924∼2005), 《삼색의 군복(三色 軍服)》 (서울 : 한줄기, 1994) p.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