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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월드컵
최근 수정 : 2019년 7월 28일 (일)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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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에 열린 17회 FIFA 월드컵으로 역대 월드컵 중 처음으로 공동개최(대한민국일본)된 대회다. 국내 최초로 HD로 생중계된 월드컵이기도 하다.

개요

이 대회는 아시아에서 열린 첫 FIFA 월드컵 대회이자 유럽과 아메리카 밖에서 열린 첫 대회이며, 골든골 제도가 시행된 마지막 FIFA 월드컵이자 전 대회 우승국 자동 출전권이 적용된 마지막 FIFA 월드컵이기도 하다. 또한 이 대회는 역사상 1번째로 2개 이상의 나라에서 공동으로 개최된 FIFA 월드컵이기도 하다. 브라질은 결승전에서 독일을 2-0으로 이기고 대회 역대 최다인 5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이 대회 우승으로 브라질은 FIFA 월드컵 우승팀 자격으로 2005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참가 자격을 얻었으며, 이도 또한 해당 대회의 5번째 출전 대회이다. 터키는 대한민국과의 3위 결정전 경기에서 3-2로 승리해 이 대회를 3위로 마감하였다. 중국, 에콰도르, 세네갈, 그리고 슬로베니아가 이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하였고, 터키는 1954년 이후로는 48년만에 처음으로 본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대회는 충격적인 결과와 이변이 속출한 대회로 전 대회 우승팀 프랑스가 승점 1점을 얻는데 그치고 무득점으로 조별 리그에 탈락하였고, 또다른 우승 후보인 아르헨티나도 조별 리그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또한 터키가 깜짝 3위를 기록하였고, 공동 개최국 대한민국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준결승전까지 진출하였다. 또다른 대이변으로는 세네갈이 개막전에서 프랑스를, 16강전에서 스웨덴을 제압하고 8강에 오른 것으로 여기서 터키에게 아쉽게 제동이 걸렸다. 물론, 이 대회에서 가장 강력한 모습을 보인 국가는 브라질로, 이 대회에서 5번째로 FIFA 월드컵을 우승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슬로건

공식 슬로건은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New Millenium, New Encounter, New Start)로 하였다.

개최지 선정

대한민국일본이 1996년 5월 31일, FIFA에 의해 개최국으로 선정되었다. 본래 대한민국, 일본, 그리고 멕시코가 셋이서 따로 경합했었다. 그러나, 두 아시아 국가들이 최종 결정이 나기 전에 협력할 것을 합의하였고, 양국은 멕시코를 제치고 만장일치로 개최국이 되었다. 이 대회는 복수의 국가에서 개최하는 최초의 FIFA 월드컵이다.[1]

결정이 내려지던 시점까지 일본은 단 한번도 FIFA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지 못하였다. (일본은 개최국 선정 이후인 1998년에서야 본선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FIFA 월드컵 개최국들 대회 유치 전까지 한번도 출전하지 못한 국가는 1934년의 이탈리아와 2022년의 카타르 뿐이다. (우루과이는 1930년 초대 FIFA 월드컵을 개최함에 따라 그 전 대회가 없었으며, 이들은 1928년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었다.)

이례적인 개최국 선정은 대부분 시차가 거의 없는 국가들에서 주로 축구를 하던 유럽에는 화젯거리였다.[2] 경기는 유럽 기준으로 아침 시간에 열렸고, 일부 학교와 기업들은 경기일에는 늦게 문을 열거나 근무 시간 초에 사내 응원을 했다.

결과

시청앞을 가득 메운 거리응원

이 대회에서 가장 거대한 돌풍을 일으킨 대한민국.

월드 클래스급 명장의 지도 + 이를 악물고 갈고 닦은 선수들의 실력 + 한을 품을 만큼 뚜렷한 목표의식과 결사적인 투혼 + 세계를 놀라게 한 자국 응원단의 열성적인 응원전 + 장기적인 합숙 및 전지훈련 등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의 협회 차원의 엄청난 지원 + 홈 어드벤티지의 이점 등이 모두 맞물린 팀이 어디까지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 만천하에 알려 준 지표.

사실 아래 길게 서술된 다른 팀들의 행적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팀은 포르투갈 - 이탈리아 - 스페인을 연달아 상대해야하는 끔찍한 대진표를 받았으며 그걸 다 뚫고 4강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게 2002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세계축구 평준화의 선두주자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강팀이 변방국에게 잡히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러나 이 이후에는 2010년 월드컵에서 원정 첫 16강에 진출한 것 말고는 조별리그를 통과한 적이 없고, 대표팀 역시 강팀에게는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러나 이 대회에서 탄생한 신예 스타 박지성, 이영표는 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왼쪽 라인으로 자리잡아 10년 가까이 부동의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부작용

역동성인가? 집단 광기인가?

집단광기의 거리응원
월드컵 경기 시즌이면 살아나는 '붉은 악마'들은 학교에 제출할 리포트와 각족 시험들을 뒤로한 채 온몸에 페인트칠을 하고 불편한 광장에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 목이 터져라 응원하며 자신의 광기를 발산한다. 나는 2002년 월드컵 때 온 시내의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응원단들이 차도로 뛰어들어와 거리를 장악하고 밤새 술과 노래로 지새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자동차 위를 뛰어다니기도 했고 경찰과 공권력을 향해 손짓으로 욕을 던지기도 했다. 평소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도 집단적 열기에 휩싸였을 때는 할 수 있다.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 최규창

북한의 도발을 사소한 문제로 여기는 계기가 됨

월드컵 기간 중인 6월 29일 서해에서 북한 군함들의 도발로 제2연평해전이 발생하여 참수리호가 피침되고, 장병 6명이 전사, 19명이 부상당하는 인명피해를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월드컵 열기에 묻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당시 대통령 김대중은 안보 위기 상황을 무시한채 전사상 장병에 대한 애도나 위문도 하지않고 월드컵 결승전 관람을 위해 일본으로 갔다.

이후 북한이 벌이는 도발 행위들은 과거와 달리 대부분 별것 아닌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하고, 좌파정권 하의 정부 고위직들이나 좌파 정당들은 북한 도발과 관련된 규탄이나 희생자 애도 행사에는 당연한 듯이 불참하는 관례도 생겼다. 북한의 도발이 명백한 천안함 피침 등도 오히려 국군이나 미국이 벌인 자작극이라는 세력들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기여

2002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로, 민주당 후보 노무현은 초반을 제외하고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지지도가 훨씬 뒤졌다. 월드컵을 거치면서 축구협회장이자 FIFA 부회장이었던 정몽준이 상당한 지지세를 확보하였는데, 이로 인해 노무현의 지지율은 더 떨어졌다. 이회창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실시 되자 정치 노선도 전혀 다른 노무현과 정몽준이 후보 단일화 쇼를 벌이고, 이것이 주목을 받아 단일화 쇼에서 이긴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월드컵 열기가 아니었으면 정몽준이 유력 대선후보로 부상하지도 못했고, 노무현이 단일화 쇼로 주목을 끌어 흥행에 성공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노무현 당선에는 정몽준과의 단일화 쇼 외에도 김대업 병풍사건도 크게 기여했다.

당시 노무현의 당선 후유증이 그 비서실장이었던 김정은 수석 대변인 문재인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혐한의 시작

각주

  1. 2004년의 개정안으로 공동개최가 금지됨에 따라 복수의 국가에서 개최된 유일한 FIFA 월드컵이다.
  2. Sports Marketing: Beer for Breakf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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