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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저서==
다수의 일본어 저서가 있다.
다수의 일본어 저서가 있다.
* 高峻石, 南朝鮮労働党史, 勁草書房; 1978.
* 고영민,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CNTS-00114447096 《해방정국의 증언 : 어느 革命家의 手記》] 서울: 사계절, 1987.
* 고영민,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CNTS-00114447096 《해방정국의 증언 : 어느 革命家의 手記》] 서울: 사계절, 1987.
* 고준석(高峻石)저, 정범구 역,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CNTS-00047855087 《해방 1945-1950 - 공산주의 운동사의 증언》] (한겨레, 1989년)
* 고준석(高峻石)저, 정범구 역,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CNTS-00047855087 《해방 1945-1950 - 공산주의 운동사의 증언》] (한겨레, 1989년)
:高峻石, 『朝鮮 1945~1950 : 革命史への證言』, 三一書房, 1972
:高峻石, 『朝鮮 1945~1950 : 革命史への證言』, 三一書房, 1972
* 고준석 저, 유영구 역,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CNTS-00047893492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도서출판 글, 1992)<ref>[https://news.joins.com/article/2691546 박헌영에 관한 첫 연구서] [중앙일보  1992.03.01  종합 9면</ref>
* 고준석 저, 유영구 역,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CNTS-00047893492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도서출판 글, 1992)<ref>[https://news.joins.com/article/2691546 박헌영에 관한 첫 연구서] [중앙일보  1992.03.01  종합 9면</ref>
: 高峻石, 『朴憲永と朝鮮革命』, 社會評論社 1991


==참고 자료==
==참고 자료==

2021년 8월 10일 (화) 10:39 판

고준석(高峻石, 1910.11.15[1] ~ 1994)는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수학했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938년 1월 마르크스주의의 연구 실천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기도하다가 동경형사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았다.[1] 1944년 5월 서울로 와서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 기자를 지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고, 남로당 당원이면서 북로당 노선을 지지했다. 1948년 남북협상 당시 북한을 방문했으나 서울로 돌아왔다. 6.25 전쟁 통에 아내가 사망하자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후 일본에 거주하며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고영민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고준석(高峻石, 1910 ~ 1994)

생애


  빈농의 아들로 항일운동…‘어느 혁명가의 수기’ 등 집필 : 제주일보 2018.08.06

고준석, 日서 ‘혁명사의 증언’ 등 저술.

일본 도쿄에서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회사정연구회의 항일 활동.

고준석의 가명은 고영민. 구좌읍 행원리<어등-개>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농의 아버지와 해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1925년 여름부터 오사카 등지에서 8년 간 노동 생활로 야간에 학업을 이었다.

서울로 돌아와서 선만경제연구소(鮮滿經濟硏究所)의 기자와 경성일보사 정경부의 기자로 근무했다.

앞서 1937년 교포 학생들이 와세다대학에서 ‘우리 동창회’를 조직했는데 민족주의 계열인 이상돈(李相敦, 전북 출신·훗날 국회의원)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이에 대학 정경학부 2학년 고준석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계열은 세력을 확대, 동년 11월 회장에 취임하고 새로 선출된 위원 권중돈(權仲敦, 경북 출신·훗날 국회의원) 외 11명의 위원을 소개했다.

다음 회장의 안내로 회원 55명을 인솔해 도쿄의 일일(日日)신문[2]과 전기장려관 및 조일(朝日) 신문사를 견학했다.

1938년 1월 마르크스주의의 연구 실천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기도하던 중 1938년 8월 15일 도쿄경시청(東京警視廳)에 체포됐다.

1939년 10월 30일 도쿄형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학업은 중단되고 오도리<小鳥>경제연구소, 노다<野田>경제연구소의 직원으로 잠시 활동 후 도쿄에서 중외(中外)상업신문(일본 경제신문의 전신)의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고향 친구 임해(任海)[3][4]와 항일 운동에 투신하기로 맹세,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1944년 5월 서울로 들어와 경성(京城)일보 정경부 기자로 활동하던 중 조국광복이 되었다.

1945년 9월 이관술(李觀述:울산), 강문석(姜文錫, 제주)의 보증으로 조선공산당에 입당, 당 규약의 초안 작성을 의뢰받았다. 제주도 출신 공산주의자는 강창보(姜昌輔), 김문준(金文準), 김시용(金時容) 등 세 사람 정도였다.

강문석의 사위인 김달삼(金達三)에게 바톤을 넘기니 제주 4·3 사건의 주모자로 이어졌다.

고준석은 1947년 5월 서울에서 북로당(北勞黨)을 지지해 ‘우리 신문’ 주필 겸 정치부장이 되어 북로당의 대변을 한 관계로 투옥되고 신문은 1948년 5월 26일 폐간 당했다.

1948년 4월 남북 협상 취재 차 월북, 남조선 노동당원이면서 북조선 노동당에 가입, 북로당 노선에 동조했다. 평양에 가서 고향 친구 임해(任海)의 부부를 만나게 됐는데, 임해는 북로당 간부로 있다가 북조선인민위원회 기획 부장으로 옮겨 있었다.

임해를 통해 북한의 실상과 북한의 지도상 군상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는 일본 도쿄에서 집필 활동에 몰두해 ‘조선(1945~1950) 혁명사의 증언’(1972), ‘해방 정국의 증언-어느 혁명가의 수기’(1987) 등 많은 저서를 내놓았으며, 공산주의의 증언적 체험기로 일관되게 서술했다.

※필자의 변 : 고준석의 부인 김사임(金師任, 1923~1951)은 항일운동가다. 본관은 광산이며 강원도 이천군의 갑부 김영석(金永石)의 딸로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니홍<日本>여자대학 재학 중 1940년에 결혼했다. 1945년 11월 공산당에 입당, 김철수(金綴洙) 의 당 세포에 소속됐다. 고준석과 함께 1950년 조선노동당 남조선 정치공작위원 사건으로 구속됐으나 출산을 위해 보석됐다. 당시 3남 1녀의 어머니인데 6·25로 전화(戰禍)를 입어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제주일보 2018.08.06

저서

다수의 일본어 저서가 있다.

高峻石, 『朝鮮 1945~1950 : 革命史への證言』, 三一書房, 1972
高峻石, 『朴憲永と朝鮮革命』, 社會評論社 1991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고준석(高峻石, 1910 ~ 1994) : 동경형사지방재판소 수형인명부 - 국가기록원
  2. 지금의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이다.
  3. 김선호, 『조선인민군 :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출판부, 2020년 03월 25일) p.178 각주 143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동한 인물 중에 “임해" 라는 이름을 쓴 사람은 2명이다. 한명은 일본 출신 임해(任海)로, 본명은 임길봉이다. 그는 북조선로동당에서 농민부 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또 한명은 조선의용군 출신 임해(任海, 1900~1962)로, 본명은 주춘길(朱春吉)이다. 그는 조선독립동맹 제1진으로 귀국해 조선신민당에서 중앙집행위원 겸 간부부장을 역임했다. 그는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와 1948년 3월 제2차 전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의용군 출신 임해는 조선신민당 간부부장 시절과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 때까지 한자명을 임해(任海)로 표기했다. 그러나 그후에는 한글명과 한자명을 림해(林海)로 표기했다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178쪽).
  4. 國史館論叢 第70輯 > 朝鮮人民黨(1945~1946)의 변혁론과 사상적 지향(鄭秉峻) > Ⅰ. 해방 직후 혁명단계 논쟁과 조선인민당의 변혁노선 > 1. 해방 직후 혁명단계론의 쟁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 박헌영에 관한 첫 연구서 [중앙일보 1992.03.01 종합 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