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애국열사릉(愛國烈士陵)[1][2]에 있는 김규식의 묘소. 그는 1881년 2월 28일생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1880년 12월 28일생은 오기로 보인다.

김규식(金奎植, 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정치인이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차 평양을 다녀왔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6.25 때 납북 당하여 1950년 12월 10일 북한의 평안북도 만포진 근처에서 작고했다.

생애


남북협상

해방 후 미군정은 처음에는 남한에 좌우 합작 정부를 세우는 것을 선호하여 강성 반공 우파인 이승만김구는 배제하고, 여운형과 김규식의 합작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면서 좌우합작은 포기하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추진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소련의 거부로 북한 지역을 포기한 채 남한만의 단독 총선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택하게 된다. 김규식은 이를 반대하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평양을 다녀오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아무 것도 없었고, 남한의 여론만 분열시켜 결과적으로 김일성과 소련에 이용당했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宋南憲, 1914~2001)[3][4][5]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잘 모르고 속아서 추천했던 김규식의 또 다른 비서 권태양(權泰陽, ?~1965)은 북한에 포섭된 인물로 간첩 성시백(成始伯, 1905 ~ 1950)의 직계였으므로,[6] 권태양도 김규식의 방북 결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김규식의 방북을 수행했다가 서울로 돌아왔지만, 6.25 당시 김규식의 납북에 직접 간여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7] 김규식이 방북을 결심하는데는 문화인 108인이 지지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8][9][10] 성명서를 발표한 문화인 108인 중에는 홍명희(洪命憙, 1888 ~ 1968)의 장남으로 역시 월북한 홍기문(洪起文, 1903 ~ 1992) 같은 인물도 끼어 있었다.

참고 자료

북한은 6.25 때 남북해간 요인들을 모두 자진 월북한 것으로 조작하여 기록하고 있다.

함께 보기

각주

  1. 애국렬사릉 위키백과
  2. 애국열사릉 위치 구글 지도
  3. 송남헌(宋南憲, 1914~2001)
  4. [삶과 추억] 독립운동가 고 송남헌옹 [중앙일보] 입력 2001.02.24 종합 25면
  5. [인터뷰] 독립운동가 <송남헌 옹>..내가 만나본 김일성 인상 한국경제 1994.07.11
  6.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저, 선인, 2001) pp.34~36
  7. 김효선, '건국이념의 상실'이 한국미래 어둡게 해 한국논단 2009년 8월호
  8.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2>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2) 密使(밀사)의 往來(왕래) 1971.10.05 동아일보 4면
  9.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7>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7) 金奎植(김규식)의 心境(심경) 1971.10.16 동아일보 4면
  10. 南北協商만이 救國에의 길, 薛義植氏等 108 文化人이 支持聲明 獨立新報 1948.04.29
    文化人 百八名 連署, 南北會談 支持 聲明, 兩軍 同時 撤兵은 大經大法이다.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48.04.29 : 조선중앙일보는 간첩 성시백이 서울에서 간행하던 신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