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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金大中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나는 金大中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 1984년 全斗煥·金大中 거래 담보물로 보유 진로 지분 절반 넘겨
⊙ 1984년 全斗煥·金大中 거래 담보물로 보유 진로 지분 절반 넘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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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 있다면 떳떳하게 책임지고 열심히 일해 재기하겠다!”
⊙ “잘못 있다면 떳떳하게 책임지고 열심히 일해 재기하겠다!”


 
   장 회장은 자신이 “전두환-김대중 간 거래의 보증인 역할을 하면서 10여 년간 주식과 정치자금을 DJ에게 전달했다”며 “규모는 500억~600억원”이라고 주장했다. 또 “(내가) 진로 경영권을 확보한 데에는 정권의 비호가 있었다”고도 했다.  
   장 회장은 자신이 “전두환-김대중 간 거래의 보증인 역할을 하면서 10여 년간 주식과 정치자금을 DJ에게 전달했다”며 “규모는 500억~600억원”이라고 주장했다. 또 “(내가) 진로 경영권을 확보한 데에는 정권의 비호가 있었다”고도 했다.  
    
    
   “나는 DJ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가장 큰 정치 보복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노무현 정권은 2003년 기업정상화를 목전에 둔 진로를 강제로 법정관리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세금을 물리는 등 제가 사회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나는 DJ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가장 큰 정치 보복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노무현 정권은 2003년 기업정상화를 목전에 둔 진로를 강제로 법정관리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세금을 물리는 등 제가 사회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찬삼락’이란 이름의 캄보디아 여권 소지한 장진호
   ‘찬삼락’이란 이름의 캄보디아 여권 소지한 장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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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DJ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가장 큰 정치 보복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노무현 정권은 2003년 기업정상화를 목전에 둔 진로를 강제로 법정관리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세금을 물리는 등 제가 사회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나는 DJ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가장 큰 정치 보복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노무현 정권은 2003년 기업정상화를 목전에 둔 진로를 강제로 법정관리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세금을 물리는 등 제가 사회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장진호는 누구?
장진호는 누구?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은 (주)진로 창업주 고(故) 장학엽(張學燁) 회장의 차남으로 1982년 진로에 입사했다. 이후 그는 사촌형, 이복형과의 분쟁을 거쳐 진로그룹의 경영권을 확보했다. 1988년에는 진로를 그룹체제로 개편, 사업다각화를 시도해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은 (주)진로 창업주 고(故) 장학엽(張學燁) 회장의 차남으로 1982년 진로에 입사했다. 이후 그는 사촌형, 이복형과의 분쟁을 거쳐 진로그룹의 경영권을 확보했다. 1988년에는 진로를 그룹체제로 개편, 사업다각화를 시도해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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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염려한 정부는 진로 화의를 결정, 5년간 채무원금 상환 유예 혜택을 줬지만, 결국 진로는 2003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5년 10월 하이트맥주에 매각됐다.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염려한 정부는 진로 화의를 결정, 5년간 채무원금 상환 유예 혜택을 줬지만, 결국 진로는 2003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5년 10월 하이트맥주에 매각됐다.  
    
    
   “새로운 각하(DJ)의 부담을 줄여드려야 한다”
   “새로운 각하(DJ)의 부담을 줄여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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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로부터 어떤 정치 보복을 당했다는 겁니까.
   —DJ로부터 어떤 정치 보복을 당했다는 겁니까.
    
    

2018년 12월 11일 (화) 11:21 판

김대중의 정치자금 또는 비자금에 대해서는 의혹은 많아도 실상을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2013년 진로 회장이었던 장진호씨의 월간조선과으 인터뷰로 일부가 드러났다.

전두환과 김대중의 비밀거래

개요

1982년 주식회사 진로(眞露)의 창업주 장학엽(張學燁) 회장의 차남 장진호(張震浩)는 상무이사로 진로에 입사했다. 이때 장진호의 공식 지분율은 8%였다. 당시 사장은 장학엽 회장의 조카 장익용이었다. 창업주 장학엽은 건강이 나빠지자 두 아들 장봉용과 장진호가 나이가 어렸으므로 1975년 조카인 장익용에게 사장 직을 주어 회사를 경영하게 했다.

1984년에 들어 진로의 장진호 상무는 전체 진로 주식 900만주의 약 23%에 해당하는 211만 주를 27명의 이름으로 매입해 실질지분율이 30% 정도가 되었다. 주식을 매입하는 데 쓴 돈은 28억 2000만원이었는데, 진로 그룹 소속의 여러 회사의 가지급금 형식으로 마련했다. 가지급금이란 기업이 대주주, 임원 등 특수 관계자에게 용도 지정 없이 지급하는 지출금으로 주로 기업자금을 유용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1984년 11월 주식회사 진로의 정기주주총회가 열렸다. 장진호 상무는 이 정기주주총회에서 부사장이 되어 실질적으로 경영권을 확보했다. 장진호는 입사하면서부터 경영권을 노렸는데, 1984년 11월의 정기주주총회에서 성공한 것이다. 정치인 임춘원(林春元), 1938 ~ 2011)이 막후에서 계획을 하고 실행했다.

임춘원은 누구?

임춘원은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68년부터 서울 종로구 화신백화점 앞에 대한민국 입시학원의 효시격이라 할 수 있는 상아탑학원을 설립하고 운영해 큰돈을 벌었다. 당시 학생 수 8,000여명, 강사 수 250여명으로 웬만한 종합대학보다도 그 규모가 클 정도였다. 그 당시 매월 순익이 8,000만원 이상으로 그 당시 재벌들을 제치고 은행예금 순위 전국 1위를 할 정도로 큰돈을 벌었다.

그런데 당시 박정희 정권의 탄압 속에 시사교양지 『思想界』를 힘들게 출판하고 있던 장준하가 당장 종이값을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장준하는 상아탑 학원을 찾아가 자신이 받은 어음을 할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응한 것이 임춘원이 정치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선생님 때문이다. 당시 나는 상아탑학원을 종로에서 잘 운영하고 있었다. 학생수가 8,000명이 넘었고, 강사수가 250명이 넘는 대학교와 같은 엄청난 규모였다. 나는 그때 많은 돈을 벌었다. 그때 당시 매월 순 이익이 8,000만원 이상이었으니, 그때 은행예금 순위가 전국 1위를 할 정오로 학원이 잘 운영될 때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보고 돈벼락을 맞은 사람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이 당시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의 역할을 하겠노라고 하시며 『思想界』에 심취되어 어려운 시절 돈을 빌려준 것이 보증수표를 드려서 그것이 그만 내가 박정희 정권에 당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선생이 종이 값을 주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 그 종이 장사에게 준 수표가 나를 정치마당에 끌어낸 계기가 되었다. 물론 나는 도망 다녀야 했고, 결국에는 감옥에 갔다. 그러나 지금도 그 당시 내가 했던 일을 생각하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 집사람은 그때부터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이 시작되었다. 그 서슬퍼런 유신시절에 나는 9번을 감옥에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처절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장준하 기념사업회, 『내 속에 살아 숨 쉬는 등불』, '아, 장준하' 추모의 글 모음에서.

1971년 임춘원은 윤보선, 장준하, 박기출 등과 함께 국민당을 창당하여 정무위원이 되었다.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 비례대표 4번이 되었으나 당선되지 못했다. 1974년에는 윤보선, 장준하, 김대중 등과 함께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했다.

각계에 포진한 인사들이 장준하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유신정권에 저항하던 중 임춘원은 감시의 표적으로 운신이 어려운 장준하의 비밀연락책으로 김대중과 인연을 맺었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가 등산 도중 추락사를 당한 날에도 거사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장준하의 집에서 마지막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그 후 장준하의 실족사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다가 남대문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1980-85 임춘원은 부산 동아대학교 재단이사를 역임하고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 참가하여 상임운영위원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 민주헌정연구회(민헌연) 상임운영위원이 되었다.

전두환의 기획거래

장진호는 보유 지분을 늘린 후 1984년 11월 정기주주총회가 열리기 전 자신이 실제 보유한 진로 주식의 절반을 김대중에게 양도했다. 그러니까 김대중은 진로 주식의 15% 정도를 얻은 것이다. 양도한 주식은 동교 기업, 한림장학회, 세광병원 등 김대중 관련 재단이 보유했다(이는 주식회사 진로의 주주명부에도 나와 있다). 이들 재단은 겉으로는 임춘원 소유로 되어 있었다.

한림장학회는 1984년 4월 설립되었는데, 장진호는 발기인으로 참여해 임기 4년의 이사가 되었다. 설립 당시 한림장학회의 자산은 예탁금 5499만원이 전부였다.

임춘원을 매개로 한 장진호- 김대중의 거래는 전두환의 기획이었다. 전두환김대중을 석방하면서 김대중의 발목을 잡을 장치가 필요했다. 돈이 필요한 김대중도 이에 응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과의 거래에 나설 중계인으로 임춘원을 지목했다. 그는 정치경력이나 성향을 보아 김대중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정치 활동을 재개하고 싶던 임춘원으로서도 이 거래를 성사시켜야 정치 규제자에서 해제될 수 있었다.

임춘원은 전두환 정권의 인사와 논의하여 경영권 분쟁이 있는 진로를 지목하여 전 – 김 거래의 매개로 삼자고 했다. 전두환 정권이 동의하여 임춘원은 장진호를 만나 자신이 장준하 계열에 있으면서 정치를 했던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정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전통과 DJ의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고 했다.

장진호김대중의 거래는 전두환 – 김대중 거래의 일부였다. 장진호가 김대중에게 준 주식은 전 – 김 거래에서 일종의 담보물이었다. 장진호는 이후 1992년까지 매년 40 ~50억 정도의 정치자금을 김대중에게 주었다. 임춘원은 장진호가 제공한 주식을 관리하고 정치자금 전달을 맡았다.

장진호임춘원은 아침에 만날 경우에는 조선호텔(웨스틴 조선)에서 조찬을 했고, 오후에 만날 때는 하얏트호텔 사우나에서 만났다. 주말일 경우에는 힐튼호텔 이발소에서 만났다. 보통 일주일에 2~3번 회동했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회동할 때는 수표를 주었고 차 안에서 수표를 전달하기도 했다. 임춘원은 수표를 받아 동교상호신용금고와 명동 서울증권 매장을 이용해 현금으로 바꾸었다.

현금으로 줄 경우 초기에는 장진호가 임춘원의 아파트로 찾아갔고 나중에는 임춘원이 부암동의 장진호 자택을 찾아가 받았다. ‘임 기사’라는 임춘원의 친척도 심부름을 했다. 현금일 경우 한 번에 3억 원을 넘지 않았다(당시 사과박스 하나에 1억5000만원이 들어갔다). 현금으로 주는 액수는 1년에 10억을 넘지 않았다. 임춘원은 장진호에게 ‘DJ가 너무 많이 요구해서 힘들지만, 내 선에서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임춘원은 1985년 무렵 장진호에게 ‘자꾸 비용이 추가돼 미안하다’며 ‘DJ에게 인사를 시켜주겠다’고 했다. 방안을 논의한 끝에 ‘조우’하는 형식으로 하자고 결정다. 힐튼호텔에서 김대중과 임춘원이 점심을 먹고 나올 때 우연히 마주치는 형식으로 장진호는 김대중을 만났다. 김대중은 ‘반갑다’, ‘고맙다’라고 말했다.

장진호는 돈세탁을 하거나 비자금을 마련하지도 않고 가지급금 형식으로 김대중에게 주는 돈을 마련했는데, 이는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비자금으로 처리하거나 돈세탁을 했다면 문제가 됐을 때 서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가지급금 방식으로는 돈을 가져간 것은 공식 기록으로 남아도 어디에 썼는지는 증명할 수는 없다.

1992년 4 ~5 월 경 임춘원은 장진호를 찾아가 ‘DJ 때문에 힘들다. 주식을 정리하자’고 말했다. 장진호는 약 150억을 주고 김대중에게 준 주식을 인수했다. 장진호는 인수한 주식을 차명으로 보유했다. 진로 주식을 일부 보유한 세광 병원은 주식 인수 이전에 진로 그룹이 아예 사들였다.

장진호가 김대중에게 준 주식을 인수한 직후 임춘원은 ‘사당화(私黨化)’를 비판하며 김대중의 민주당을 탈당했다.

1993년 ‘공직자 재산 공개’로 인해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등이 재산을 공개했다. 당시 임춘원은 민주자유당 국회의원이었다. 이로 인해 동교기업, 한림장학회가 진로 지분을 보유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임춘원 의원은 재산을 신고하면서 진로 주식 매각대금 126억원을 신고하지 않았다. 다음은 1993년 3월 26일 《한겨레신문》이 보도한 내용이다.

임 의원은 지난해 3월 말 현재 동교기업, 한림장학회 이름으로 당시 시가 126억 원 상당의 (주)진로 주식 59만2762주(14%)를 갖고 있었으나, 주식명부 확인 결과 지난해 9월 말 이전에 모두 매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면 주식명부에서 일시에 사라져버린 주식과 매각대금은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월간조선과의 인터뷰

張震浩 前 眞露그룹 회장이 생애 첫 인터뷰에서 밝힌 政經 유착 20年

“나는 金大中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 1984년 全斗煥·金大中 거래 담보물로 보유 진로 지분 절반 넘겨 ⊙ “정치자금은 준 쪽이나 받은 쪽이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 ⊙ “잘못 있다면 떳떳하게 책임지고 열심히 일해 재기하겠다!”

 장 회장은 자신이 “전두환-김대중 간 거래의 보증인 역할을 하면서 10여 년간 주식과 정치자금을 DJ에게 전달했다”며 “규모는 500억~600억원”이라고 주장했다. 또 “(내가) 진로 경영권을 확보한 데에는 정권의 비호가 있었다”고도 했다. 
 
 “나는 DJ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가장 큰 정치 보복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노무현 정권은 2003년 기업정상화를 목전에 둔 진로를 강제로 법정관리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세금을 물리는 등 제가 사회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찬삼락’이란 이름의 캄보디아 여권 소지한 장진호
 
 3월 5일 12시 베이징 시내 한 아파트를 찾았다. 2006년 장 회장이 중국에 온 이후 7년째 살고 있다는 그의 자택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를 한 장진호(61) 전 회장이 문을 열었다. 돋보기 안경을 콧등에 걸친 그의 모습에서 한때 24개 계열사를 거느렸던 대기업 총수의 풍채를 느낄 순 없었다.
 
 인터뷰 전 그와 점심을 먹었다. 식탁 위에는 김치, 깍두기, 멸치볶음, 김, 버섯볶음, 잡채, 미역국 등이 있었다. 기자가 온다고 해서 일부러 소박한 밥상을 차린 것일까. 그에게 묻자 “평소에도 이렇게 먹는다”고 답했다. 40분간 식사를 하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장 회장은 자신이 “전두환-김대중 간 거래의 보증인 역할을 하면서 10여 년간 주식과 정치자금을 DJ에게 전달했다”며 “규모는 500억~600억원”이라고 주장했다. 또 “(내가) 진로 경영권을 확보한 데에는 정권의 비호가 있었다”고도 했다. 그에 따르면 2003년 진로 법정관리 이후는 물론 생애 첫 단독 인터뷰라고 했다.
 
 2003년 9월 장진호 회장은 5496억원을 사기대출 받고 비자금 7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2005년 2월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5년형을 받고 풀려난 그는 가족을 데리고 캄보디아로 출국했다. 검찰이 그의 비자금에 대해 내사를 하고 있던 상황이라 도피 의혹이 짙었다. 현재 검찰 내사는 종결된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는 1991년 진로그룹이 진출한 곳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캄보디아의 최고 실력자 훈센 총리와 친분을 쌓았고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훈센은 자신의 젊을 적 이름인 ‘찬삼락’을 장 회장에게 줬다. 2002년엔 캄보디아 국적도 만들어줬다. 현재 그의 한국 국적은 말소된 상태다.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건 ‘찬삼락’이란 이름이 적힌 캄보디아 여권뿐이란 얘기다. 전직 그룹 총수가 캄보디아 국적을 가지고 중국에 머물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게 인터뷰를 결심한 이유부터 물었다. 장 회장은 “이제 인생을 정리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DJ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가장 큰 정치 보복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노무현 정권은 2003년 기업정상화를 목전에 둔 진로를 강제로 법정관리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세금을 물리는 등 제가 사회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장진호는 누구?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은 (주)진로 창업주 고(故) 장학엽(張學燁) 회장의 차남으로 1982년 진로에 입사했다. 이후 그는 사촌형, 이복형과의 분쟁을 거쳐 진로그룹의 경영권을 확보했다. 1988년에는 진로를 그룹체제로 개편, 사업다각화를 시도해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1988년 그의 회장 취임 당시 진로그룹 계열사는 9개였지만, 96년 24개로 늘렸다. 그룹 총매출은 1987년 4100억원에서 3조5000억원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진로그룹은 1997년 지나친 사세 확장에 따른 유동성 위기를 넘지 못하고 창업 73년 만에 부도처리됐다. 장 회장은 계열사 간 보증, 분식회계, 가지급금 등으로 진로 부실을 초래한 장본인으로 지목됐지만, 경영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부실계열사 정리, 자산매각 등의 구조조정 계획안을 내놓고 화의(和議)를 신청했다.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염려한 정부는 진로 화의를 결정, 5년간 채무원금 상환 유예 혜택을 줬지만, 결국 진로는 2003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5년 10월 하이트맥주에 매각됐다. 
 
 “새로운 각하(DJ)의 부담을 줄여드려야 한다”
 
 —DJ로부터 어떤 정치 보복을 당했다는 겁니까.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부터 일주일에 3일씩 검찰, 안기부에 불려다니며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거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이 안 될 겁니다. 그 기간에 가택 압수수색도 5번이나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DJ가 나를 조사하라고 두 번이나 그랬대요. 그러니까 1년8개월 동안 계속 족치고, 조져댄 거겠죠.”
 
 장 회장에 따르면,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며칠 후 대검찰청에서 그에게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평소 안면이 있던 윤모 수사관이 그를 맞았다.
 
 윤 수사관은 장 회장에게 다짜고짜 ‘새로운 각하의 부담을 줄여드려야 한다. 정리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DJ로부터 어떤 정치 보복을 당했다는 겁니까.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부터 일주일에 3일씩 검찰, 안기부에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거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이 안 될 겁니다. 그 기간에 가택 압수수색도 5번이나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DJ가 나를 조사하라고 두 번이나 그랬대요. 그러니까 1년8개월 동안 계속 족치고, 조져댄 거겠죠.”


 장 회장에 따르면,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며칠 후 대검찰청에서 그에게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평소 안면이 있던 윤모 수사관이 그를 맞았다.   
 윤 수사관은 장 회장에게 다짜고짜 ‘새로운 각하의 부담을 줄여드려야 한다. 정리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무슨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거였습니까.
 
 “그 얘기를 들으니까 ‘정치자금’ 문제인 것 같긴 한데, 나는 임춘원(林春元) 의원을 통해서 DJ한테 주식하고 정치자금을 준 것밖에 없거든요. 예전에 내 배다른 형하고 엄삼탁씨가 그걸로 괴롭힌 적이 있었는데, 그 자료가 혹시 안기부에 남아 있었던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은 그렇다 쳐도 주식은 왜 줬습니까.
 
 “과거 전통(전두환 대통령)과 DJ가 은밀한 거래를 했고, 그 중간에서 제가 담보물로 주식을 제공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습니까.
 
 “5공 초창기 전통은 DJ를 사형시키려 했지만, 미국이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DJ를 살려주긴 했는데 그가 나중에 정치활동을 재개하면 광주니, 뭐니 하면서 나올 수 있잖아요. 전통 입장에선 그걸 막기 위해 DJ 발목을 잡을 장치가 필요했겠죠. DJ도 살려면 모르는 척 잡혀줘야만 하는 상황이었죠.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돈밖에 없잖아요?”
 
 —거래 내용이 뭡니까.
 
 “제가 담보물로 DJ 측에 (주)진로 보유 지분 절반을 양도하고, 매년 일정 정도의 정치자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주식을 관리하고,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건 임춘원 의원이 맡았습니다.”
 


 “1984년 50억 들여 DJ 쪽에 주식 양도”
 




장 회장은 자신이 “전두환·김대중 간 거래의 보증인 역할을 하면서 10여 년간 주식과 정치자금을 DJ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고(故) 임춘원씨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68년부터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서 입시학원의 효시 격인 ‘상아탑학원’을 운영해 큰돈을 벌었다. 
 그는 71년 윤보선, 장준하씨와 함께 국민당을 창당한 적이 있는데, 그 후 DJ와는 70년대 장준하씨의 비밀연락책을 맡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80년대엔 ‘DJ 자금책’, ‘비자금 관리인’으로 세간에 알려졌고 실제 그는 12·13·14대 야당 국회의원을 했다.


 —임춘원씨가 왜 그런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까.
 
 “그는 제게 과거 자신이 장준하 계열에 있으면서 정치를 했던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정치를 하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전통과 DJ의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래는 전두환 정부에서 기획한 겁니까.
 
 “임춘원 의원과 5공 정치세력 사이에서 상당히 많은 논의가 있었던 걸로 압니다.”
 
 —그건 장준하 계열에 있었던 임춘원씨의 정치경력과 성향을 봤을 때 어울리지 않는데요.
 
 “신군부와 어울리는 사람이 DJ 옆에 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접근 자체를 할 수 없죠. 그런데 임춘원 의원에 대해선 정치경력이나 성향을 봤을 때 DJ 쪽에서 신뢰할 수 있고, 이쪽(청와대)에 DJ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겠죠. 실제 임춘원 의원은 DJ의 자금관리 역할을 하면서, 그의 모든 정보를 파악하는 첨병 역할을 했어요.”
 
 —왜 많은 기업 중 진로가 자금원으로 꼽힌 겁니까.
 
 “당시 우리 회사 내부에 문제도 있었으니까 임춘원 의원 입장에선 자기가 이걸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죠.”
 
 —거래가 있었던 시기는 언제입니까.
 
 “1982년 DJ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 얘기가 시작됐습니다. 그래야 전통 입장에서 DJ를 안심하고 보낼 수 있잖아요. 실제 주식과 돈이 간 건 1984년입니다. 이후 1992년까지 매년 정치자금을 전달했습니다.”


 1980년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된 DJ에게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죄목은 ‘반국가단체 결성’이었다. 이후 그는 두 차례 감형을 거쳐 20년형이 됐고, 1982년 12월 정부의 형집행정지에 따라 가족과 함께 신병치료를 이유로 도미했다.
 
 —보유 지분 절반을 무상으로 넘겨주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그 정도조차 안 하면 담보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식은 언제 양도했습니까.
 
 “1984년 11월 정기주주총회 이전에 거의 양도했습니다. 당시에 50억원 정도가 소요된 걸로 기억하는데 세금이 얼마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주식을 매입한 자금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가지급금으로 했어요. 대부분 (주)진로 가지급으로 했어요.”


 가지급금이란 대주주, 임원 등 특수 관계자에게 용도 지정 없이 지급하는 지출금으로 주로 기업자금을 유용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5공 땐 특별세무조사 받기도
 
 1984년 11월 관련 기사에 따르면 당시 장진호 상무의 공식 지분율은 전체의 8%였지만, 실제 보유 지분은 30%였다. 같은 해 장 상무는 주총 이전 28억2000만원을 들여 전체 진로 주식 900만 주의 22%인 211만 주를 27명의 이름으로 매입했다. 이에 따른 증여세는 17억8000만원이었다. 즉 장 회장이 주식 매입과 증여세 납부에 총 46억원을 썼다는 얘기다. 따라서 DJ 측에 절반을 양도했다면 약 15%의 지분이란 계산이 가능하다.
 
 —양도한 주식의 명의는 누구로 돼 있었습니까.
 
 “임춘원 의원으로부터 동교기업, 한림장학회, 세광병원 등 DJ 관련 재단에 명의이전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건 주주명부에 다 나와 있기도 하고요.”
 
 —그곳들은 다 임춘원씨 소유 아니었습니까.
 
 “임 의원이 운영하는 곳이었지만, 그는 그게 다 DJ 소유라고 말했거든요. ‘동교’ 들어간 건 다 그쪽 방면이잖아요? 재단 자산도 우리 주식과 동교동 건물뿐이었는데요. 또 임 의원이 DJ 최측근 자금 담당이란 건 다 알려진 사실이었고, 그가 관리한 재단이 DJ와 관련돼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한림장학회’ 설립 당시 정관을 보면 장진호 회장의 말처럼 재단 자산은 예탁금 5499만원이 전부였다. 이 문건에는 장 회장이 1984년 4월 이 단체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임기 4년의 이사직을 맡은 정황도 담겨 있다.
 
 —지분 절반이 넘어갔는데 확인작업이 없었습니까.
 
 “임춘원이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 내가 직접 DJ에게 확인할 수 없잖아요. 주식이 가기 때문에 서로 신뢰하는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전혀 믿지 않았겠죠.”
 
 —청와대 쪽엔 확인해 봤습니까.
 
 “저는 그 일이 있고 나서 5공 정권에서 특별세무조사까지 받았습니다.”
 
 —지금 얘기한 대로라면 당시 정권을 도와준 건데 왜 조사를 합니까.
 
 “혹시 DJ 쪽과 이중 삼중의 다른 관계가 있나 해서 세무조사를 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청와대에 가서 항의했어요. 당시 정무수석이 정순덕(鄭順德)씨였는데, 그를 찾아가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우리 회사를 문 닫게 하려고 하느냐?’고 했죠. 물론 고차원적으로 보면 세무조사는 일종의 쇼였을 수도 있죠.”
 
 
 “청탁성이 아니라 돈세탁 안 했다”
 
 —이후 DJ 쪽에 정치자금은 얼마나 제공했습니까.
 
 “84년부터 92년까지 줬습니다. 처음엔 30억원 정도로 얘기가 있었는데, 진행하다 보니까 보통 연간 40억원, 많이 갈 때는 50억원이 갔어요. 다 합치면 500억~600억원 정도 될 겁니다. 그걸 임춘원이 받아서 DJ에게 가져다줬죠.”
 
 —임춘원씨와는 어떻게 접촉했습니까.
 
 “아침에 만나면 조선호텔(웨스틴조선) 나인스게이트 그릴에서 조찬을 했고요. 오후엔 하얏트호텔 사우나에서 만나 쉬면서 얘기했고, 주말엔 힐튼호텔 이발소에서 만났습니다. 보통 일주일에 2~3번씩 만났어요.”
 
 —그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돈을 전달하는 게 가능합니까.
 
 “그런 곳에선 표(수표)를 주는 거죠. 예를 들어 하얏트 호텔 사우나에서 자연스럽게 내 로커에서 꺼내 가운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주면 아무도 눈치챌 수 없죠. 같이 차를 탈 때도 잦으니까 그 안에서도 하고….”
 
 —돈세탁은 어떻게 했습니까.
 
 “돈세탁은 안 했습니다. 임 의원이 신용금고(동교상호신용금고)를 하나 가지고 있었어요. 수표를 주면 본인이 현금으로 바꾸겠다고 해서 줬죠. 임 의원이 돈세탁하는 창구는 자기 신용금고와 명동 서울증권 매장이었어요.”


 장진호 회장은 1990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에게 100억원을 전달할 때도 돈세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건으로 1995년 말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법원으로부터 실형을 선고받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100억원을 전달할 때도 돈세탁을 하지 않고 수표로 줬죠.
 
 “그것도 가지급을 해서 갖다준 거죠.”
 
 —지방공단 관련 청탁성 뇌물이었잖아요.
 
 “대통령에게 지방공단을 청탁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건 군수나 도지사에게 할 일이죠.”
 
 —대가성이 없는 정치자금이니까 돈세탁하지 않았다는 얘긴가요.
 
 “수표를 보는 순간 우리 회사 돈이라고 나오는데, 대가성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죠. 누가 그렇게 하겠어요? 내가 바보인가요? DJ에게 준 것도 비자금 처리를 할 일이 없었습니다.”
 
 —현금은 부피가 커서 호텔에서 주진 못했을 텐데, 어떻게 전달했습니까.
 
 “초창기엔 제가 임춘원 의원 아파트로 몇 번 갔는데요, 그 뒤부터는 임 의원이 우리 부암동 집에 와서 가지고 갔습니다. ‘임 기사’라고 임 의원 친척이 있는데, 그 사람도 심부름했고요. 그런데 보통 현금은 한 번에 3억원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사과박스 하나에 1억5000만원이 들어가는데요, 그거 들기도 굉장히 어렵거든요. 제일 많이 간 것도 10억원을 넘기진 않았습니다.”
 


 DJ, “나는 돈 몇 푼 받고 장래 망칠 사람 아니다”
 


 —DJ와는 자주 만났습니까.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렇게 도와줬는데 한 번도 못 만났습니까.
 
 “우연을 가장해 마주친 적은 있습니다.”
 
 —85년 5월 지은 동교동 사저가 완공된 다음 만난 겁니까.
 
 “정확하지 않아요. 임 의원이 ‘자꾸 비용이 추가돼 미안하다’며 ‘DJ에게 인사를 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방안을 논의한 결과 ‘조우’하는 형식으로 하자고 결정했어요. 언젠가 힐튼호텔에서 DJ와 임 의원이 점심을 먹고 나올 때 나는 마치 약속이 있는 것처럼 해서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그때 DJ로부터 ‘반갑다’, ‘고맙다’란 얘기를 들었죠.”
 
 과거 DJ는 “내 장래를 위해 ‘더러운 돈’은 받지 않겠다”고 얘기한 바 있다. 다음은 67년 6월 4일 7대 총선에 출마한 그가 목포역 광장에서 한 연설 중 일부다.
 
 “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


 이랬던 DJ가 자기 발목을 잡는 돈인 줄 알면서 장진호 회장으로부터, 그것도 전두환 정권과의 뒷거래를 통해 지속적으로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건 아무래도 납득이 쉽지 않았다.
 
 —돈이 간 내막을 DJ도 인지하고 있었단 얘기입니까.
 
 “‘DJ와 의논하고 합의해서 진행하는 일’이라고 임춘원 의원이 얘기했습니다. 한번은 임 의원이 ‘DJ가 너무 많이 요구해서 힘들지만, 내 선에서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DJ는 선거 때마다 흑자 본 사람”
 


 —임춘원씨에게 준 돈이 DJ에게 갔다는 걸 확인한 적 있습니까.
 
 “임 의원이 DJ 측근으로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그 돈을 가지고 들어간 거죠. 전국구 2번을 받았잖아요?”
 
 임춘원씨는 85년 2월 12대 총선 때 신한민주당 전국구 2번을 받았다. 18년 동안 DJ 경호 업무를 담당했던 함윤식(咸允植)씨 저서 《동교동 24시》에 따르면 임 의원은 ‘공천헌금’으로 6억원을 낸 것으로 돼 있다.


 —임춘원씨가 자력으로 거액의 공천헌금을 냈을 수도 있는데, 그게 진로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를 만났을 때는 돈이 없었어요. 상아탑을 해서 돈을 벌었는데 윤보선씨에게 집어넣고, 장준하씨 뒷바라지해서 돈이 없었어요. 저를 만났을 땐 집도 허름한 주공아파트 한 채밖에 없었고요. 그런데 임춘원 의원이 거액을 들고 가서 전국구 2번을 받았잖아요. 그러면서 DJ 돈줄이란 소문이 났는데 돈이 어디서 났겠어요?”
 
 12대 국회에서 임춘원씨와 같은 신민당 소속으로 의정 활동을 하다가 1987년 DJ의 평화민주당에 함께 입당한 한 전직 의원도 “임춘원이 재력가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실제론 가진 건 많지 않았다”며 “정보부(안기부)와 연결돼 DJ에게 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DJ 자금줄에 대해 들은 얘기는 없습니까.
 
 “임 의원을 통해 많이 들었습니다. 참, 그래서 DJ가 나쁜 사람이란 겁니다. DJ의 가장 큰 자금줄은 연청(민주연합청년동지회)이란 조직을 통한 모금이에요. 행상하는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호남 사람 수십만 명이 몇만 원씩 보내잖아요. 그 사람은 선거할 때마다 흑자를 봤거든요. 그럼 자기가 그들을 위해 뭔가 했어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DJ는 그 사람들의 원을 풀어준 게 아니라 솔직히 전두환 대통령과 거래를 했잖아요? 그것 참 잘못된 겁니다.”
 
 —임춘원씨는 자기를 보호할 장치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장 회장께도 그런 게 있었습니까.
 
 “가지급금 받은 내용밖에 없습니다. 은밀한 거래였는데, 그런 물증이 있다면 보증인으로서 임춘원 의원과 내 역할은 필요 없는 거죠.”
 
 —금전거래가 지속적으로 이뤄졌는데 증거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임 의원과는 일주일에 3일 이상 만나는 사이였고, 그럴 때 수시로 요구했기 때문에 일일이 기록은 해두지 않았습니다. 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임 의원에게 돈이 어떻게 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가지급금으로 처리했습니다.”
 
 —가지급금이란 진로가 회장에게 빌려준 돈일 뿐입니다. 그 기록만으론 어디에 썼는지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떤 효력이 있습니까.
 
 “돈이 나간 걸 공식화하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비자금으로 처리하거나 돈세탁을 했다면 문제가 됐을 때 서로 확인할 수 없잖아요? 한참 뒤에 가지급금 부분이 문제가 됐는데 까발릴 수도 없고,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차라리 처음부터 비자금으로 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보호용이었다면, 장부나 각서 같은 게 더 안전하지 않습니까.
 
 “비자금 처리를 하려면 다른 업체를 통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흔적이 없어지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쓴 게 되잖아요.”
 
 —지금 주장하는 거래가 있었다면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얻은 게 있을 겁니다.
 
 “88년에 5공 청문회를 했잖아요? 임 의원이 얘기하길 ‘청문회 스타 몇 명 만들고 끝날 거다. 소리만 요란하지, 별거 없을 거다’라고 했어요. 실제로도 그랬고요.”
 
 

소리만 요란했던 5공 청문회의 배경
 



고(故) 임춘원씨는 1985년 2월 DJ가 귀국한 이후 그의 ‘자금책’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다.

 5공 청문회란 88년 13대 국회에서 제5공화국 정부하에서의 비리와 광주사태의 진실규명을 위해 개설한 5공 비리특별위원회의 국회 청문회 활동이다. 당시 임춘원씨는 평민당 소속 특위 위원이었다. 이어지는 장 회장의 말이다.
 
 “청문회를 잘 보면 전통을 굉장히 때리는 것 같지만, 알맹이가 없어요. 방송으로 요란하게 떠들기만 했지, 결정타가 없었다고요. 저는 내막을 알고 봐서 그런지 재미가 없었어요. 그런 것들이 ‘전두환-김대중 묵계’의 산물입니다.”
 
 —장 회장께선 DJ와의 거래를 통해 뭘 얻었습니까.
 
 “DJ가 야당 시절엔 우리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습니다. 우리를 조이는 일이 하나도 없었어요. 임 의원이 얘기해서 다 막아줬거든요.”
 
 —그것밖에 없단 말입니까.
 
 “1980년대 후반 우리가 조선공사를 인수하려 할 때 임춘원 의원한테 부탁한 적은 있어요. 우리 정보가 샜는지 떨어지고 말았지만요.”
 
 —5공으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았습니까.
 
 “나는 정권에 부탁할 일이 없었습니다.”
 
 —진로는 국세청이 관리하는 주류기업인 만큼 부탁할 일도 많았을 텐데요.
 
 “우린 국세청하고 수십 년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청와대가 지시해도 국세청이 막아줄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까.
 
 “그건 막아줄 수 없죠.”
 
 —청와대에서 대가가 있었을 텐데요.
 
 “대가가 어딨어요?”
 
 —솔직히 세상에 공짜가 어딨습니까.
 
 “5공이 나에게 특혜를 줬다면 거래가 드러날 수 있잖아요. 그건 전통이나 DJ, 서로 간에 치부니까 알려지면 둘이 같이 죽어요. 절대 그런 섣부른 짓은 할 수 없죠.”
 
 —그럼 정권의 도움을 받은 게 없다는 얘기입니까.
 
 “단지 나를 쓰러뜨리지 않았다는 거라고 할까요. 5공 때 쓰러진 곳 많잖아요? 국제 같은 곳 보세요. 그렇죠?”
 


 ‘장진호 쿠데타’ 도운 5공 정권
 
 그러나 기자가 접촉한 장 회장의 측근들은 그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가 5공 정권과의 거래를 통해 진로 경영권을 확보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진로는 창업주 고(故) 장학엽 회장의 조카 익용(현 서광 회장)씨가 75년부터 경영권을 승계해 사장을 맡고 있었다. 82년 진로에 입사한 장학엽 회장의 차남 장진호 회장(당시 상무)은 경영권을 빼앗기 위해 2년 동안 준비했다. 그가 주장하는 ‘전-김 거래’가 논의될 때 장진호 상무는 ‘쿠데타’를 모의했고, 84년 정기주주총회에서 이를 실행했다. 그 뒤에는 시나리오를 짜고 진두지휘한 임춘원씨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장 상무는 부사장이 됐고 진로의 실질적인 경영권을 확보했다.
 
 —84년 진로는 경영권 분쟁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권의 도움을 받았겠죠.
 
 “5공 때 친한 사람이 많이 있었으니까…. 이런저런 문제로 나를 도와준 사람도 있죠.”
 
 —청와대가 장 회장의 경영권 확보에 힘을 써줬다는 얘긴가요.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 지렛대 역할을 해준 건 사실이겠죠. 그러나 그걸 놓고서 거래를 한 건 아닌데….”
 
 —청와대에는 자금을 주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쪽에 줄 게 뭐 있어요. 이거 하나만으로도 그쪽에 어마어마한 역할을 한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장 회장이 얘기한 게 사실이라면 전두환 대통령은 DJ의 입을 막았고, DJ는 정치자금을 얻었다. 임춘원씨는 DJ 측근으로 있으면서 국회의원을 3번 역임했고, 장진호 회장은 진로를 손에 넣었으니 거래에 참여한 4명 모두 밑지는 장사를 한 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거래는 오래가지 못했다. 92년 5월 임춘원씨는 ‘사당화(私黨化)’를 비판하며 민주당을 나왔다. 이와 관련 장진호 회장은 “당시 임춘원 의원은 용도 폐기돼 동교동 내에서 입지가 없었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92년쯤으로 기억하는데, 임춘원 의원이 간암에 걸리고 나서 태도가 갑자기 이상해졌습니다. 사람이 변한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학모(鄭學模) 사장이 나한테 ‘DJ 쪽에서 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한다’고 얘기를 해요. 이후로도 몇 번이나 그런 말을 했는데, 나는 그냥 만나서 주고, 미국 계좌로 보내라고 하면 그쪽으로 넣어주고, 하여튼 달라는 쪽으로 주기만 했잖아요. 어쨌든 그 시점에 이미 DJ와 임 의원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고 정학모씨는 목포상고, 경희대 체육학과를 나와 ‘주먹 세계’에 몸담았던 인물로, DJ의 장남 홍일씨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장 회장은 1978년 서광주방설비를 경영할 때부터 정씨와 함께 일했다.
 
 —임춘원씨가 간암에 걸린 건 96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임 의원이 간암에 걸렸다고 하면 정계 은퇴를 해야 하니까 밝히지 않은 거예요. 실제로는 그전에 간암이 발병했어요.”
 
 —주식은 언제 정리했습니까?
 
 “92년 4~5월쯤에 임 의원이 ‘DJ 때문에 힘들다. 주식을 정리하자’고 해서 돈을 다 주고 주식을 가지고 옵니다.”
 
 —인수금액은 약 150억원입니까.
 
 “예, 그쯤으로 기억합니다. 92년 주식 정리하기 전에 진로 주식을 갖고 있던 세광병원은 아예 인수했습니다.”
 
 —그 돈이 DJ에게 전달됐습니까.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DJ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내가) 타깃이 되니까, 난 임 의원이 마지막에 돈을 제대로 안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진로 주식 매각대금 126억원의 행방은?
 
 93년 ‘공직자 재산 공개’로 인해 동교기업, 한림장학회가 진로 지분을 보유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14대 대선에서 YS를 지원한 임춘원씨는 당시 민주자유당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재산을 신고하면서 진로 주식 매각대금 126억원을 신고하지 않았다. 다음은 93년 3월 26일 《한겨레신문》이 보도한 내용이다.
 
 〈임 의원은 지난해 3월 말 현재 동교기업, 한림장학회 이름으로 당시 시가 126억원 상당의 (주)진로 주식 59만2762주(14%)를 갖고 있었으나, 주식명부 확인 결과 지난해 9월 말 이전에 모두 매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면 주식명부에서 일시에 사라져버린 주식과 매각대금은 어디로 갔는가.〉
 
 《월간조선》이 입수한 ‘동교기업·한림장학회 진로 주식 인수 검토안’에 따르면 당시 진로는 비계열사 우전석유, 우신공영, 개인 명의 등을 통해 동교기업과 한림장학회 보유 지분을 매입한 뒤 최종적으로 진로문화재단에 출연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 문건에 따르면 당시 진로는 ‘무신고 취득’과 ‘진로 가지급 처리 후 세탁’을 강조하면서 최대한 주식 인수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 92년 7~9월에 동교기업, 한림장학회의 지분을 샀다. 다음은 장진호 회장과의 문답이다.
 
 —주식을 인수해서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받아서 차명으로 바꿔놨죠.”
 
 —그 뒤로 DJ 쪽과 돈거래를 한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주식 정리하고 얼마 후 화의에 들어간 상황이라 줄 여유도 없었습니다.”
 
 —DJ에게 이 정도를 전달했다면 당시 집권세력에는 더 많은 돈을 줬겠네요.
 
 “노태우 대통령에겐 나라 위해 써달라고 100억원 준 게 전부입니다. YS에겐 한 푼도 안 갔어요.”
 
 —2003년 임춘원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권으로 흘러들어 간 진로자금이 7000억~8000억원”이라고 했는데요.
 
 “그건 아니고.”
 
 
 강경식 부총리, “진로의 재벌 놀음에 분노 느껴”
 
 —관행적으로 준 건 있지 않습니까.
 
 “그것까지 안 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무슨 결벽증 환자도 아니고….”


 88년 장진호 회장이 진로를 그룹체제로 개편하고 사업다각화를 추진한 이후 진로는 급속한 외적 성장을 이뤘다. 88년 9개였던 계열사는 96년 24개로 늘었다. 총매출은 87년 4100억원에서 3조5000억원으로 늘었다.
 
 하지만 진로의 전성기는 거기까지였다. 97년 4월 진로는 부도를 맞는다. 진로그룹의 주력기업인 (주)진로가 어음 213억원, 당좌수표 83억원 등 총 296억원을 결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진로그룹의 부채비율은 8500%에 달했다. 당시 재정경제원 부총리였던 강경식(姜慶植)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장은 그의 저서 《환란일기》에서 “진로의 재벌 놀음에 분노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진로그룹은 법원에 화의를 신청했다. 채권단은 ‘경영권 포기’를 주장했고, 장 회장은 버텼다. 결국 진로가 파산하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판단에 따라 화의가 성사됐다.
 
 —1997년 부친이 물려준 진로를 부도냈습니다. 당시 어떤 기분이 들었습니까.
 
 “위기를 맞았지만, 우리는 부채보다 자산이 훨씬 많았습니다. 부분적으로 도려내면 정리해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진로가 부실해진 원인으로 사업다각화를 꼽을 수 있는데요. 급속한 사세 확장의 배경은 뭡니까.
 
 “‘30년 계획’에 따라 2010년에 일본의 미쓰이, 미쓰비시를 이기려면 시간이 없었습니다.”
 
 —진로는 국내 대표 주류회사이고 사업구조상 웬만해선 부도를 낼 수 없는 회사였습니다. 그런데도 망했습니다. 지금도 사업다각화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미쓰이나 미쓰비시를 이기려면 장기계획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라 다각화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지 않나요?”
 
 —왜 유동성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세운 모든 사업계획이 최소 5년 이상 투자해야 하는 장기계획이었습니다. 96년부터 매출이 늘고 구체적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유동성 위기를 맞은 겁니다. 그것만 넘기면 해결되는 거였는데.”
 
 —회사 상황이 심각해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까.
 
 “위기를 맞아본 적이 없어 우왕좌왕한 건 사실이지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화의를 신청한 겁니다. 그리고 채권단이 이를 받아들였고요.”
 
 —당시 진로는 장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주로 단기 고리자금을 썼는데, 그 이유는 뭡니까.
 
 “재무 담당자들이 잘못한 부분입니다. 제3금융권에서 일시에 4000억원을 쓴 게 화근이 된 겁니다.”
 
 —그런 일은 회장께 보고가 올라갔을 텐데, 재무 담당자들의 잘못이라고만 하는 건 책임을 회피하는 걸로 보이는데요.
 
 “나중에 유동성 위기가 와서 조사해 보니까 그렇게 됐다는 걸 알았습니다.”
 
 —경영자로서 관리, 감독을 제대로 안 한 거네요.
 
 “그렇죠. 그건 그렇다고 봐야죠.”
 



 “내가 7공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1998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은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총풍’, ‘세풍’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장진호 회장은 두 사건에 모두 개입했다.

 —재벌 2세라서 고생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사업한 것 아닙니까.
 
 “고생을 했다는 의미가 밥을 쫄쫄 굶고 일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73년부터 90년까지 휴가를 간 일이 없습니다. 주위에서 워커홀릭이라고 할 정도로 일만 했습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를 믿었습니까.
 
 “몸집을 불리면 망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는 큰 회사를 인수한 게 없고 대부분 신설했습니다. 다른 곳처럼 특혜입찰로 받은 게 없어요.”
 
 —당시 진로 부실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것 중 하나가 장 회장께서 진로종합유통에서 빌려쓴 1000억원가량의 가지급금인데요.
 
 “(주)진로와 진로유통의 가지급금을 합하면 1700억원 정도 됐습니다. 그중 이자 부분이 꽤 크죠. 실제 원금은 830억원 정도 됩니다. 여기서 2/3에 해당하는 정도가 DJ 쪽에 간 돈입니다.”
 
 —화의 성사 과정에서 정치권에 어떤 식으로 로비했습니까.
 
 “화의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 하는 겁니다.”
 
 —채권자가 정부 입김을 타는 은행들 아닙니까.
 
 “당시는 외환위기가 찾아와서 은행들도 자기들이 생존하는 데 급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YS 정권 말기인데 누구 말을 듣습니까. 나는 매일 잠도 안 자면서 은행 중역 만나서 설득하고, 자정에 찾아가고, 만나지 않겠다는 사람 만나서 설명했습니다. 우리 사장들도 매일 뛰어다녔고요.”
 
 장 회장은 97년 10월 배재욱(裵在昱) 당시 청와대 사정비서관에게 진로 계열사의 화의 성사를 부탁하며 쇼핑백 2개에 1억원을 담아 건넨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진로가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DJ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상당한 기대감을 가졌을 것 같은데요.
 
 “궁극적으로 DJ를 도와준 거니까 ‘우리가 조금 어려워진 걸 풀어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되자마자 나를 조이고, 도덕적 문제가 있는 나쁜 놈으로 만들었어요.”
 
 —도덕적 문제를 만들었다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내가 탤런트 허모씨랑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소문이 돌고 그랬는데, 저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장 회장께선 예전 탤런트들 데려다 술 마시고 그런 재벌 2세 그룹인 7공자로 알려졌잖아요.
 
 “내가 전두환 때 7공자입니까? 노태우 때 7공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70년대에는요.
 
 “70년대는 장모, 박모, 최모 회장이 7공자예요. 내가 무슨 7공자, 8공자입니까. 내가 알지도 못하는 7공자를 어느 날 갑자기 갖고 와서 얘길 하니. 구체적인 걸 한번 말씀해 보세요.”
 
 —7공자라면 재벌 2세들 7명이라는 건 다 알잖아요.
 
 “아니, 술장사하는 사람이 손님들 술집에 데려가는 건 당연한 건데, 내가 그걸 피해다녀야 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리고 술 마시고 바람 한번 피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내가 그런 게 있다면 맞는지 틀리는지 솔직히 얘기해 줄 테니까 가져와 보라는 거죠.”
 
 —그래도 꼬투리 잡힐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이 나온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집 사주고 몇천만 원씩 준 일이 없거든요. 그런데 왜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느냐는 거죠.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탤런트 허모에게 한 달에 몇천만 원씩 주면서 그랬다는데 나는 그 사람 알지도 못해요. 그것 때문에 술집 마담한테 전화가 왔어요. 검찰하고 안기부에서 그걸 확인해 달라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얘기했는데도 막 적어 갔다고. 그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손님하고 술집에 가서 접대하고 어쩌다 오입 한 번 했어. 그게 뭘 어쨌기에, 그걸로. 술장사가 그것도 못 하면 어떻게 장사를 해요. 그런 거 가지고 7공자, 8공자라고 하면 대한민국에 공자 아닌 사람 없게요? 도덕적으로 ‘이런 놈’이란 작업을 먼저 해놓으니까 내가 뭐라고 해봤자 먹히겠느냐고요?”
 
 —김영삼 정부 권력 실세, 재벌 2세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았나요.
 
 “두 달에 한 번, 석 달에 한 번 만난 건 맞지만, 특별한 이야기는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술 마시고 일반적인 그거였었지.”
 


 “하루에 보통 룸살롱 2곳 갔다”
 
 —조금만 알아봐도 이 정도로 나오는데 7공자 얘기가 안 나오겠습니까.
 
 “그런 건 사치하고 낭비하는 사람들한테 하는 얘기지, 나는 그런 적이 없어요. 업무 중의 하나니까 일을 열심히 한 건 있어도.”
 
 —YS 당시 오모, 김모씨 등 안기부 사람들과도 어울렸죠.
 
 “오모씨는 대학 선배지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김모씨랑 같이 만난 적도 없어요.”
 
 —주로 어떤 술집에 갔습니까.
 
 “저녁때 자기들 업무 끝나고 나한테 습관적으로 전화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죠. 내가 늦게까지 일하는 거 아니까. 그래서 포장마차에 자주 가고, 감자탕집도 가고 그랬어요. 우리가 방탕한 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룸살롱에선 얼마나 썼습니까.
 
 “그때 우리 회사는 술장사를 하니까 당연히 몇 군데 들러야 했거든요. 한 2~3명 가면 1인당 양주 1병 마시는 수준이었죠.”
 
 —룸살롱은 하루에 몇 군데나 갔습니까.
 
 “보통 2곳은 갔죠. 이쪽 업소, 저쪽 업소 분위기가 어떤지 파악을 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업소 사람들에겐 회장이 한 번 가주는 게 직원들 몇 번 가는 것보다 효과가 커요. 그러니까 다 그러고 다녔지.”
 
 —업무 차원에서 룸살롱에 갔다는 얘긴가요.
 
 “우리가 ‘임페리얼’을 만들었잖아요. 그게 제일 많이 팔리는 양주였는데.”
 


 97년 DJ 대통령 당선에 기대감 가졌으나…
 
 다음은 장진호 회장의 이야기다.
 
 “처음엔 속으로 DJ가 진로를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약간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이후로 검찰, 안기부에 끌려다니면서 ‘쇼’가 아니란 걸 알았죠. DJ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1년8개월 동안 일주일에 3일씩 가서 난리를 치고, 고생하고. 이건 뭐 복수극도 아니고.”
 
 —DJ가 압력을 행사했다면 대통령 임기는 5년인데, 왜 1년 8개월만 조사한 겁니까.
 
 “당시는 DJ가 노벨평화상을 타려고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제가 안기부에 대략 ‘예전 DJ와 이런 일이 있었는데 까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보고가 올라갔는지 조사를 그만뒀어요.”
 
 —10여 년간 정치자금을 줬는데 DJ가 그렇게 할 이유가 있나요. 임춘원이란 방패가 없어져서 그런 겁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마지막에 제대로 이행을 안 했다고 밖에 해석이 안 되더라고요. (DJ가) 그렇게 진로를 괴롭힐 이유가 뭐 있어요.”
 
 이에 대해 임춘원씨는 다른 주장을 폈다. 다음은 2002년 12월 그가 모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김대중씨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체 오너들은 대개 퇴출됐습니다. 김대중씨는 그 사람들의 정치자금으로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내치는, 전형적인 토사구팽(兎死狗烹)식 정치행태를 취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따르면 임춘원씨가 장진호 회장으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을 DJ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배달사고를 내지 않았더라도 진로는 ‘팽’ 당할 운명이었단 얘기다.
 
 이어지는 장 회장과의 문답이다.
 
 —97년 대선 때 DJ 쪽에 자금을 줬습니까.
 
 “안 줬습니다.”
 
 —그것 때문에 밉보인 것 아닙니까.
 
 “당시 DJ 쪽 인사 이모씨가 우리 장기하 사장을 찾아와서 요구했지만, 우리는 화의에 들어가는 상황이라 여유가 없었습니다.”
 
 —얼마를 요구했습니까.
 
 “얼마나 했는지는 몰라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겠죠.”
 
 —이회창 후보에겐 줬습니까.
 
 “이회창 후보에게도 안 줬는데요.”
 
 장진호 회장이 이회창 후보에게 직접 돈을 전달한 사실은 드러난 게 없다. 그러나 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동생 회성씨와 이석희 국세청 차장 등이 23개 대기업으로부터 한나라당 대선 자금을 불법모금한 ‘세풍’ 사건 당시 장 회장이 현금 1억원을 제공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총풍 관련자들에게 공작금 7000만원을 주기도 했다. 총풍이란 97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이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북한 측에 판문점 총격시위를 요청했다가 무위에 그친 사건이다.
 
 —세풍, 총풍사건에 개입한 걸 보면 DJ는 장 회장이 이회창씨를 지원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런 이유로 악감정을 가질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만, 선거 때 우리에게 자금을 요구한 걸 보면 그동안 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의구심이 들어요. 그런 것 때문에 내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너는 風이란 風은 다 맞고 다니느냐?”
 




2003년 9월 검찰은 장진호 회장을 배임 등 혐의로 구속했다.

 —실제 진로는 문제가 많은 기업이었잖습니까. 조사할 것도 많았겠죠.
 
 “그럼 우리가 부실해져서 자금이 없는데 무슨 선거자금을 내놓으라고 해요. 그런 얘길 하지 말아야지.”
 
 —정치자금은 돈을 준 쪽이 칼을 쥔 것 아닙니까. DJ가 굳이 진로를 건드릴 이유가 있었을까요.
 
 “둘 다 칼날 위에 서 있는 거죠. 어떻게 받은 사람만 서 있겠어요? 대가성이라면 양쪽 다 서 있는 거죠.”
 
 —대가성으로 준 게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아니죠. 대가성이 아니더라도 정치적 거래를 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떳떳한 일은 아니죠.”
 
 —검찰이 제시한 자료 중 기억나는 건 없습니까.
 
 “총풍, 세풍이죠. 그때 김태정 검찰총장이 ‘너는 풍이란 풍은 다 맞고 다니느냐’고 했어요. 또 이회창씨한테 돈 준 거 내놓으라고 하는데 없잖아요. 계속 그 관련 자료만 수십 개 갖다 댔어요. 안 준 걸 줬다고 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내가 이회창씨를 만난 적은 있거든요.”
 
 —만나서 무슨 얘길 했습니까.
 
 “얘기한 것도 별로 없어요.”
 
 —목적이 있으니까 만났을 것 아닙니까.
 
 “이회성씨는 내가 혹시 돈이라도 주려나 싶어 자리를 만들었는데, 난 돈이 없으니까 줄 게 없죠. 그래서 덕담이나 하고 나왔죠.”
 
 —한 번 만났습니까.
 
 “두 번입니다. 두 번째도 역시 없으니까 못 준 거고요.”
 
 —그럼 DJ는 만났습니까.
 
 “나는 이회창씨든 DJ든 만나고 싶지 않았다니까요. 이회성씨에게 만나게 해달라고 한 적도 없어요. 정학모 사장에게도 ‘내가 DJ를 만나러 가는 것보다는 지금 우리 형편이 좋지 않으니까 당신 선에서 적당히 조정하라’고 하고 물건이나 상품을 지원했어요.”
 
 —얼마나 갔습니까.
 
 “와인 몇 박스, 양주 1000병 이런 식으로 갔습니다. 그건 기증으로 처리할 수 있거든요.”
 
 —당시 누구를 지지했습니까.
 
 “솔직히 되는 사람을 지지하려고 했죠. 아무래도 여당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누가 돼도 나야 큰 문제가 없었고, 회사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파산부 판사와 골드만삭스 측 변호사의 골프회동
 
 진로의 화의 기간은 5년이었다. 이에 따라 진로는 5년간 부채 원금 상환을 유예받으며 자산 매각과 외자 유치를 통한 기사회생을 도모했지만, 2003년 3월 31일 화의 조건에 따른 첫 분기 원금상환을 이행하지 못했다.  
 같은 날 진로는 “1조600억원의 외자 유치를 추진하고 있으니 기존 화의 조건을 바꾸고 원금 상환을 추가로 유예해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진로 채무는 1조7000억원이었다.
 
 진로는 98년 2월 화의 개시 결정 이후 2002년 말까지 채무 9600억원을 정산했지만, 이는 대부분 이자에 불과했다. 당시 재무구조를 볼 때 채무 1조7000억원에 대한 원리금 상환은 대규모 외자 유치가 없는 한 객관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에 진로 주요 채권자인 미국계 투자금융회사 골드만삭스는 계열사 세나인베스트먼트를 통해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 회사정리절차 개시신청을 냈다. 재판부는 골드만삭스의 손을 들어 진로에 법정관리를 선고했다. 이후 진로는 매각 절차를 거쳐 2005년 10월 하이트맥주에 팔렸다.
 
 장 회장은 “연간 영업이익 2000억원을 내는 회사가 법정관리로 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며 긴 시간 동안 격정적으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골드만삭스는 1년 6개월~2년 전에 진로를 탈취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뒤에는 누군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내 생각으로는 DJ 측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로 법정관리는 법원이 결정한 것이다. 여기에 DJ의 영향력이 작용했다고 볼 만한 정황을 찾기도 어렵다.  
 물론 이 같은 법원의 판단이 내려지는 과정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었다. 골드만삭스가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한 달 전 골드만삭스 측 변호사가 파산부 수석부장판사와 만나 골프를 쳤기 때문이다. 골프 회동이 법정관리 신청을 위한 사전 모임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됐다.
 
 2003년 3월 8일 골프를 함께 친 인사들은 서울지법 파산부 변모 부장판사, 골드만삭스 측 소송대리를 맡았던 김모 변호사, 강모 변리사, 문모 전 진로 사장 등이다. 진로의 법정관리 개시신청은 4월 3일이다.
 
 
 “채권 자기거래가 불법인 줄 몰랐다”
 
 진로가 법정관리로 넘어가고 매각된 가장 큰 원인은 장진호 회장 본인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화의 기간 그의 행적은 부채 상환보다 경영권 방어에 치중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장 회장은 2001년부터 2003년 초까지 H사, C사 등 CRC(기업구조조정) 전문회사들에 예금담보 제공 등의 방법으로 자금 897억원을 지원, 약 5800억원대의 진로 채권을 간접 매입했다.   
 장 회장에 따르면 그는 진로그룹 재무팀장 오모씨에게 6000억원의 채권 확보를 추진하는 CRC 설립을 지시했다. 오씨는 국세청 출신으로 85년부터 진로그룹에서 일하면서 그룹 전체의 자금조달, 자금운영에 실질적인 책임자로 일한 장 회장의 최측근이다.  
 장 회장은 CRC를 통해 진로그룹 채권을 헐값인 액면가의 10% 선에서 사들여 약 5000억원의 차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한마디로 회삿돈으로 내부정보를 이용, 헐값에 채권을 매입해 차익을 노렸다는 얘기다.
 
 —채권 매입자금 출처는 어디입니까.
 
 “진로에서 자금을 줬다고 다 나왔잖아요. 그거 예전에 검찰에서 수십 번 한 내용이에요. 다 조사받은 내용이라고요.”
 
 —채권의 자기거래는 법에 어긋나지 않나요.
 
 “자기 채권을 사는 게 왜 불법인지 옛날엔 몰랐습니다. 나중에 불법이라고 하니까 안 거죠. 맨 처음에 검토할 때는 그런 내용이 없었어요.”
 
 —부채 상환보다 경영권 방어, 사익 실현에 집중한 겁니까.
 
 “부채 상환이 뭡니까. 채권을 누가 사든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경영권 방어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동시에 채무는 소멸하니까 갚는 거랑 다를 게 없는 겁니다.”
 
 그러나 장 회장은 여기에서 별다른 이익을 얻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중간에서 가로챈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돈 없어 귀국 못 해”
 
 한편 장 회장은 캄보디아로 출국할 당시 아내 명의로 된 집을 담보로 대출받고, 주위의 도움을 얻어 마련한 20억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출국 과정에서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했지만, 자금 문제는 그렇지 않다. 20억원을 캄보디아로 어떻게 가지고 갔을까. 장 회장은 “20억원 중 대부분은 ‘코리막스’ 정모씨로부터 송금받은 돈”이라고 말했다.
 
 코리막스는 이탈리아 명품 여성복 브랜드 ‘막스마라’의 한국과 홍콩 판권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로 전국 유명 백화점 대부분에 입점해 있다고 한다. 장 회장은 96년 60억원을 빌려 이 회사 지분을 차명으로 인수했다고 한다. 이 문제로 장 회장과 정씨는 그 후 소유권 분쟁을 벌이게 된다.
 
 장 회장은 캄보디아에서 다양한 사업을 진행했다. 훈센의 딸 훈마나와 공동명의로 ABA(은행)를 경영했다. 차명으로 KTV(룸살롱)를 소유했고, 부동산 개발업체, 경견장(競犬場) 설립을 추진했다. 이런 사실은 장 회장이 한국에서 재산을 빼돌렸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에 대해 《시사저널》은 2010년 3월 장진호 회장과 관련해서 5개의 기사를 보도했다.
 
 장 회장의 반론을 들어봤다. 그에 따르면 경견장은 허가를 내준 경찰청장이 헬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됐다고 한다. 부동산 개발도 중단했다. KTV는 그가 돈을 빌려준 강씨 형제에게 사기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인수했고, 은행의 경우엔 자본잠식 상태에서 무상으로 51% 지분을 인수해 약 2년 동안 밤잠을 자지 않고 일해 정상화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006년 카자흐스탄 업체에 은행을 매각하고 중국으로 건너왔다.
 
 《시사저널》은 장 회장 측근의 입을 빌려 은행 매각 후 세금을 내지 않아 캄보디아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장 회장은 ‘먹튀 의혹’을 부정하며 “밑에 데리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범죄자여서 캄보디아에서 더는 사업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06년 말 장 회장은 은행 매각대금 2000만 달러로 홍콩에 ‘벌웍스’란 펀드를 만들어 자신의 자금원으로 활용했다. 펀드 지분은 훈마나와 50%씩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에 온 장 회장은 “2006년 다롄에 1300만 달러를 들여 나노기술 관련 연구소를 세워 한국에 상장하려 했지만, 2007년 같이 일하던 고모씨가 국정원 기술유출 단속에 걸려 망했다”고 말했다.
 
 장 회장에 따르면 이 사건은 나중에 그와는 관련이 없는 걸로 판명됐지만, 연구소는 문을 닫았고, 자금을 투자한 ‘벌웍스’도 자산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됐다고 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얘기하는 그에게 대놓고 물었다.
 
 —호화 도피 행각, 해외 차명 재산 보유를 전면 부정하는 겁니까.
 
 “작년에 국세청에서 세무특별조사반 3명이 왔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전 대기업 총수 12명의 차명 재산을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건 장 회장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사업한 돈들은 해외 나와서 밤잠 안 자고 일해서 번 겁니다.”
 
 그의 주장대로 “국세청 조사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비판할 만한 일은 크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오지 않았다’는 건 ‘없다’의 동의어는 아니다.
 
 장 회장은 “국내 문제들을 정리하고 떳떳하게 사업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다음은 그와의 문답이다.
 
 —귀국할 생각은 없습니까.
 
 “초법적 조치로 세금을 물려 한국에 있으면 사회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소송을 해야 하는데 공탁금이 없어요. 또 일일이 대응하려면 그게 다 돈 아닙니까. 그런데 나는 돈이 없거든요. 그래서 내가 여기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현재 사업을 하고 있습니까.
 
 “다 망했죠. 앞으로 파이낸싱을 통해 광물자원 쪽 일을 해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왜 다 망했습니까.
 
 “내가 이런 상태로 있으니까 뭔가 있는 것처럼 착각들을 하고 내가 하는 걸 먹을 수 있다고 접근을 하는 거겠죠.”
 
 —그간 주위 사람들로부터 뒤통수를 많이 맞았습니까.
 
 “내가 이제 떳떳하게 일할 수 있도록 과거의 문제들을 털어야겠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바로잡고 싶습니다.”
 
 —금액이 가장 큰 채권 문제는 어떻게 정리할 겁니까.
 
 “잘못한 것들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채권 상환금은 국가에 대한 공적자금 회수, 국세 추징 등 국고로 먼저 환수돼야 하겠죠. 법적 절차에 따라 해결할 생각입니다.”
 
 —본인이 책임질 부분에 대해서도 다 털어버릴 각오가 돼 있다는 얘깁니까.
 
 “잘못이 있다면 그에 책임지고 떳떳하게 살고 싶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해서 재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