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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단은 중국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도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대대장을 <u>진치첸</u>이라 불렀다. 언어 소통은 러시아어로 했다. 한인들은 자기들끼리는 빈번하게 한국말로 얘기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중국말도 알았다. 우리들에게는 러시아어의 ‘욕’ - 중국어에도, 한국어에도 진하게 스며들어간 예리한 러시아어 표현 – 이 널리 유행했다.
....이 여단은 중국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도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대대장을 <u>진치첸</u>이라 불렀다. 언어 소통은 러시아어로 했다. 한인들은 자기들끼리는 빈번하게 한국말로 얘기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중국말도 알았다. 우리들에게는 러시아어의 ‘욕’ - 중국어에도, 한국어에도 진하게 스며들어간 예리한 러시아어 표현 – 이 널리 유행했다.
...김일성은 아내와 함께 농가 하나를 따로 차지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어린 나이의 두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커다란 불행이 닥쳤다. 즉 그 아들 중의 하나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 아들 유라는 민첩하며 난폭한 소년이었다. 그를 ‘대대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를 위해서 소련군인 차림새와 장화를 만들어 주었다. 하루 종일 병영에서나 들판에서 군인들 사이에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먹고 잠을 잤다. 의심할 바 없이 김일성은 우리 일반장교 사회에서 그를 분리시킨 독특한 몇 가지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 때문에 그는 당과 군사 업무 경험으로 보아 '노장'이라고 간주되었다."}}
...김일성은 아내와 함께 농가 하나를 따로 차지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어린 나이의 두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커다란 불행이 닥쳤다. 즉 그 아들 중의 하나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 아들 유라는 민첩하며 난폭한 소년이었다. 그를 ‘대대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를 위해서 소련군인 차림새와 장화를 만들어 주었다. 하루 종일 병영에서나 들판에서 군인들 사이에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먹고 잠을 잤다. 의심할 바 없이 김일성은 우리 일반장교 사회에서 그를 분리시킨 독특한 몇 가지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 때문에 그는 당과 군사 업무 경험으로 보아 '노장'이라고 간주되었다."}}
박성훈은 북한 김일성이 1939년 가을에 죽은 유명한 빨치산 김일성의 이름을 따라 썼다고 증언한다. 죽은 유명한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 보천보 사건의 주역 [[김일성 (6사장)|6사장 김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성훈은 북한 김일성이 1939년 가을에 죽은 유명한 빨치산 김일성의 이름을 따라 썼다고 증언한다. 죽은 유명한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 [[보천보 사건]]의 주역 [[김일성 (6사장)|6사장 김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88여단 당시 김일성에게는 유라([[김정일]])와 슈라 두 아들이 있었다. 슈라는 일반적으로 해방 후인 1947년 평양에서 익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ref>[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A7%8C%EC%9D%BC 김만일] 위키백과</ref>, 박성훈은 두 아들 중 하나가 [[88여단]] 시절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한다. 이런 증언을 하는 사람이 박성훈 외에도 더러 있는데,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88여단 당시 김일성에게는 유라([[김정일]])와 슈라 두 아들이 있었다. 슈라는 일반적으로 해방 후인 1947년 평양에서 익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ref>[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A7%8C%EC%9D%BC 김만일] 위키백과</ref>, 박성훈은 두 아들 중 하나가 [[88여단]] 시절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한다. 이런 증언을 하는 사람이 박성훈 외에도 더러 있는데,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2020년 2월 13일 (목) 22:17 판

박성훈(Пак Сен Хун)은 소련의 고려인으로 제88독립보병여단의 1대대 대대장 진지첸(김일성) 대위 아래 부대대장이었으며, 당시 계급은 대위(капитан)였다.

그는 북한 김일성이 전사한 선배 지휘관의 이름을 물려받아 썼다고 증언했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요한 증언 중의 하나이다.

88여단 시절 김일성은 북한 지도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때였으므로, 동료 빨치산 대원들은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들로부터 들은 말일 것이다. 또 박성훈은 해방 후에 북한으로 오지 않고 소련군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과 원수진 일도 없었으므로 김일성에게 불리한 말을 일부러 지어내서 할 까닭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김일성의 자질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박성훈의 김일성 관련 증언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의 저서 《스탈린과 김일성》에 박성훈의 김일성 관련 증언이 나온다.[1]

[권1 p.165]

김일성에 대해 언급한 자료들은 정확히 사실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둘 필요가 있다. 모스크바에 있는 외국 활동가들 사이에는 이야기를 과장 시키는 것이 유행이었다. 즉 모스크바(코민테른, 공산주의 당중앙위원회의 정치부와 스탈린 개인)는 장래의 '민족 영웅'과 다른 나라의 '지도자'로 준비시키고 있었던 정치 군사 활동가들의 진실한 삶의 여정을 비밀로 묻어두기 위해 경력을 날조하곤 했다.

'조선 인민의 지도자'의 과거 동료 (과거 제88보병여단의 제1대대 부대대장인 대위 박성훈과 과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 부장관인 강상호[2])였던 사람들이 증언했듯이 진치첸은 1939년 가을 일본 점령군에 맞선 전투에서 영웅적으로 전사했고 30년대 이름을 날렸던 만주 빨치산 김일성의 이름을 자기 것으로 했던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거 소연방 문서에서 답을 찾아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 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아직 과거 내무인민위원회(NKVD, 후에 국가안전위원회(KGB)) 문서국의 보관물품에 대한 연구가들의 독자적인 행동이 허가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현재 '조선 인민의 지도자' 김일성이 소연방에서 살았던 그 시기의 증인들이 제시한 증거를 바탕으로 이 주장을 믿는다.

[권1 pp.167~168]

소련군 소령인 박성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0년 10월, 하바로프스크시).

"...나는 얼마간 제88보병여단의 제1대대의 부대대장을 지냈다. 나는 우연히 그리로 가게된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나의 이력에 있던 몇 가지 사실들이 소련 사령관의 주의를 끌어 이런 임명을 받게된 것 같았다. 우리 부모님은 지난 세기말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나는 태어나고 공부를 했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러시아어를 배웠다. 일본 공산당의 리더인 가타야마[3]와 행동을 같이 했던 30년대 중반에 나는 소비에트 연맹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소연방을 독일이 침공한 후 곧 붉은 군대의 대열에 소집되었다. ....이 여단은 중국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도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대대장을 진치첸이라 불렀다. 언어 소통은 러시아어로 했다. 한인들은 자기들끼리는 빈번하게 한국말로 얘기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중국말도 알았다. 우리들에게는 러시아어의 ‘욕’ - 중국어에도, 한국어에도 진하게 스며들어간 예리한 러시아어 표현 – 이 널리 유행했다.

...김일성은 아내와 함께 농가 하나를 따로 차지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어린 나이의 두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커다란 불행이 닥쳤다. 즉 그 아들 중의 하나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 아들 유라는 민첩하며 난폭한 소년이었다. 그를 ‘대대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를 위해서 소련군인 차림새와 장화를 만들어 주었다. 하루 종일 병영에서나 들판에서 군인들 사이에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먹고 잠을 잤다. 의심할 바 없이 김일성은 우리 일반장교 사회에서 그를 분리시킨 독특한 몇 가지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 때문에 그는 당과 군사 업무 경험으로 보아 '노장'이라고 간주되었다."

박성훈은 북한 김일성이 1939년 가을에 죽은 유명한 빨치산 김일성의 이름을 따라 썼다고 증언한다. 죽은 유명한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88여단 당시 김일성에게는 유라(김정일)와 슈라 두 아들이 있었다. 슈라는 일반적으로 해방 후인 1947년 평양에서 익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4], 박성훈은 두 아들 중 하나가 88여단 시절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한다. 이런 증언을 하는 사람이 박성훈 외에도 더러 있는데,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함께 보기

각주

  1.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2. 강상호(姜尙昊, 1910~200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가타야마 센(片山潛, 1859 ~ 1933) 위키백과
  4. 김만일 위키백과